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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vs장자] 주체의 변주, 완성에서 과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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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흰나비 작성일15-10-19 11:47 조회28,009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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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의 변주, 완성에서 과정으로
 
김희진(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이번 학기에 들뢰즈와 장자를 만났다. 낯설음과 친숙함이 교차되는 것 같았다. 들뢰즈의 앙띠 오이디푸스는 첫 장부터 그 난해함에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한 학기 내내 길을 잃고 헤맨 것만 같다. 그래서 장자만이라도 꼼꼼히 잘 읽으리라 다짐했는데 원문과 주석을 빼니 책 두께에 비해 텍스트가 적어 어렵지 않게 쭉쭉 읽어나갔다. 그러나... 학기 중반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아무런 질문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질문이 없다는 것은 생각을 안 한다는 것과 같다. 책을 읽고서 놀랍다’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등의 소감을 밝히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사유를 멈춘 채 책을 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서 흠칫 놀랐다. 장자건 들뢰즈건, 이해를 못하는데 추호의 의심과 호기심조차 없이 그대로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도 책과 밀착되어 있다고 느끼기는 커녕 내 안의 견고한 어떤 것이 새로운 개념과 힘들이 범람하는 듯한 이 책들에 섞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책의 내용에 대한 질문이 아닌 내 태도에 대해서 질문이 생겼다. 책 앞에서 나는 왜 이리 견고한가? 바꾸어 말하면, 나는 왜 조금의 틈도 열지 않고서 나의 무지를 고수하는가? 질문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아들이 부엌으로 와서는 레고장난감으로 만든 동물모양의 뭔가를 보여주었다. 건성으로 잘했다고 대답하는 내 옆에서 한참을 설명하는데, 그것의 이름은 무슨무슨 용()이며, 특징은 뭐고, 이러저러한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설명을 마치고선 애지중지 선반 위에 올려놓는다. 며칠 후 다들 학교에 가고 조용한 시간에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던 내 시야에 그것이 들어왔다. 나는 갑자기 퍼뜩 정신이 들면서 저것이 주체다!’ 라고 속으로 외쳤다. 그것은 정말 하나의 주체였다. 며칠 내내 견고한 아상에 대해 생각하던 차였는데, 매일 마룻바닥에서 발에 밟히고 채이는 레고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들뢰즈의 주체 개념이 이해가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토록 견고한 나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끼워맞추기식의 비유로 점철될 것을 우려하면서도 지금이 아니면 쓸 수 없을 것 같아 이 레고놀이의 세 가지 종합을 풀어보려 한다. 앙띠 오이디푸스는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어도, 아이가 언제까지나 레고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뒤섞여버림, 무의식 속의 욕망기계
작년 작은 아들의 생일에 레고를 사주었다. 큰 상자 안에 9봉지가 들어있어 완성되면 베이스캠프, ‘아이스 헌터, ‘불사조 기지가 만들어질 것이다. 며칠 간만이라도 조용히 앉아 혼자 놀며 나를 귀찮게 하지 않기를 바랬는데, 아이는 뭐가 없거나 어려울 때마다 걸핏하면 나를 불러댔다. 더 큰 문제는 내가 그것들이 서로 섞일까봐 매일 너무나 열심히 분류하여 정리하느라 청소시간이 두 세 배로 늘었다는 것이다. 기존에 있던 레고들도 많아서 나는 칸칸이 분류할 수 있는 수납장을 마련해 라벨링을 하고, 각각의 조립설명서와 함께 정리해두었다. 얼마 후 지인에게서 엄청난 양의 레고를 또 얻게 되었는데 그 양이 어찌나 많았는지 큰 플라스틱 통 세 개에 그득그득 나누어 담았다. 구분과 분류가 불가능한 레고의 바다! 아이들은 갑자기 레고부자가 되어 신나게 놀았다. 그러다가 사단이 났다. 작은 아이가 라벨링해서 잘 구분해 둔 새 레고 조각과 혼돈상태라 할 수 있는 큰 상자의 조각을 함께 갖고 논 것이다. 나는 마구 화를 내며 뒤섞인 것들을 다시 분류했다. 8시간에 걸쳐 골드 드래곤하나를 찾아냈는데, 그 시간동안 아이를 몇 번이나 울렸는지 모른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는 생각에 화딱지가 났다. 조립설명서를 펼쳐놓고 조립 순서에 따라 필요한 레고조각을 그 혼돈상태에서 찾아내는 일은 정말 너무나 힘들었다. 다시 하고 싶지 않아서 골드드래곤만 찾고 나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습게도 아이는 골드드래곤만 안 건드리고, 다른 것들은 다 잘 가지고 논다. 그리고 이제 레고놀이를 하며 나를 부르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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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고 조각은 한 면은 볼록하고 다른 면은 오목한 형태로 반드시 다른 것과 만나게끔 되어있다. 완성된 작품의 표면조차도 전부 볼록하거나 오목하다. 이것은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하는 기계이다. 이 각각의 레고조각들은 접속하고, 연결되고, 절단된다. 레고조각의 본질은 접속이다. 다른 어떤 조각과의 접속을 욕망한다기보다는 존재의 본질 자체가 그렇다.
 
생산하기를 항상 생산하기, 생산물에 생산하기를 접붙이기라는 규칙은, 욕망 기계들의, 또는 생산의 생산이라는 1차적 생산의 특성이다.” (앙띠 오이디푸스,들뢰즈과타리 p.31)
 
 
아이는 레고조각의 본질을 알아보았다. 접속하고 연결하는 자체로 만들기라는 놀이를 생산해 낸 반면에 나는 무지개색 수납장 안의 조립설명서에 등록된 이름인 불사조’ ‘골드 드래곤따위만을 보았다. 그래서 하나의 레고조각을 보면 아이는 즉시 거기에 다른 레고를 접붙이기를 행하고, 나는 그것이 어디에 속한 조각인지를 파악하려고 할 뿐이다. 소속과 이름만이 중요하고, 그것이 획득되면 끝인 것이다. 책과 섞이지 못하는 나는 서랍장에 고이 모셔둔 골드 드래곤이다. 소파에 조용히 앉아있던 나는 그 라벨에서 내 이름을 보았다. 난장판이 된 마루에서 열중해서 놀고 있는 아이가 손대지 않는, 외톨이 장난감이다.
 
 
만들어진 것, 주체의 탄생
아이는 레고를 처음 샀을 때만 조립대로 만들고, 그 후엔 설명서를 보지 않는다. 그냥 심심해서 어슬렁, 두리번 거리다가 그것에 손이 가면 한 번 건드려본다. 이렇게 저렇게 끼워보다가 재미있으면 주저앉아서 계속해서 상자들을 뒤집어가면서 만든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길 과정은 목표나 끝으로 파악되면 안 되며, 과정 자체의 무한한 계속과 혼동돼서도 안 된다 (앙띠 오이디푸스,p.28)고 했다. 설명서 없는 레고 놀이는 끝이라는 게 없다. 그냥 계속 접붙이며 생산하는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접붙이는 과정만 무한히 반복되는 것은 자폐증이나 편집증이다. 레고조각을 끝없이 끼우고만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어느 순간 흡족해서 작품이 탄생되는 것. 접속기계가 절단기계가 된다. 이 절단은 즉각 다른 과정과 다시 연결된다. 그래서 이것은 끝이 아니라 하나의 마디이다. 이 마디에서 다른 놀이로의 진입이 이루어진다. 아이는 작품에 이름을 붙이고, 기능을 상상한다. 상대가 듣거나 말거나 이러저러하다고 말로 설명하는 것은 기입과 등록이다. 아이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말의 용법을 터득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아직 말을 못하는 갓난 아기는 놀 때 어떤 완성도, 표상체계도 없이 붙였다 떼었다만 반복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이름을 얻은 후, 그것은 하나의 주체로 태어난다. ‘주체란 잔여로서 생산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탄생한다. 목표한 것이 있었던 것이 아님에도 레고작품에 삼족오라는 이름을 붙인다. 삼족오를 닮지 않았어도 그냥 그렇게 부른다. 책이나 TV, 어딘가에서 들어봤기 때문이다. 등록의 표면이 사회체라는 것은 얼마나 타당한가! 이렇게 과정의 마디에서, 만들어진 것을 언어적 표상으로 가두는 행위가 수반되는데 들뢰즈·가타리는 이것을 n+1이라는 수식으로 설명한다. 언제나 따라붙는 마지막 +1은 모든 만들어진 것을 어떤 표상 안에 가둔다. 엄마고, 학생이고, 직장인이고, 진보고, 보수다. 우리는 그 과정을 잊은 채 이름만을 간직한다. 진보라는 이름이 붙어 버리면 그 이름이 붙기까지의 과정은 모두 하나의 척도로서 인식되며 향후의 행위도 그 이름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이름은 우리에게 초월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386세대가 그렇고, ‘5·18’이 그렇다. 보수와 진보? 지식인? 아줌마? 가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이름들이 다 그렇다. 표상이기 때문이다. 라깡에 따르면 주체란 이렇게 사회적 표상을 내재화함으로써 탄생되는 것이라고 한다. 순간의 배치가 만들어낸 과정의 마디마다 잔여로서의 주체는 형성된다. 이것은 우리가 현재 어떤 아이덴티티를 갖고 존재하는가를 결정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하지만, 과정이 수단이 되고 주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서, 만들어진 주체를 고정되고 초월적인 척도로 삼는다면, 그 이후의 과정이란 시공간의 배치와 전혀 접속하지 않고 조립설명서대로 만들어지는 카피만이 있을 뿐이다. 현대인의 삶이 모두 그렇지 않은가, 어쩌면 다 이렇게 똑같은 아빠이며, 똑같은 대학생일까? 사회의 언어적 표상에 붙들린 채 자기 삶을 꿰어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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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이 초월적 표상에 휘둘리지 않는다. 자기 힘으로 만들어낸 장난감에 애정을 갖지만 고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놀이를 통해 변주한다. 쉽게 이름을 바꾸고, 형태를 바꾸면서 기능을 변화시킨다. 반면에, 우리는 각각 하나의 주체이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을 사랑한다기보다는 집착한다. 변주는 고사하고 작은 조각 하나라도 떨어질세라 전전긍긍한다. 주체를 규정하는 다양한 관점은 호칭, 정체성, 역할규정, 성격 등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렇게 라는 주체를 형성하는 그 많은 형용사와 명사 중에서 과연 과정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예전에 형성된 주체의 낡은 형상을 쫓으며 과거를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를 책과 섞이지 못하게 했던 것도 바로 이 표상적 주체다. 어떤 이름이 초월적으로 작용했을까? 곰곰 들여다보니, 책을 이해하건 이해하지 못하건 나는 감이당 학인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냥 이 정도에서 텍스트의 표면을 더듬거리는 것만으로도 이 이름을 유지할 수 있고, 거기에 만족하고 있었다는 것, 책 앞에서의 견고한 무지는 안일함이자 교만이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가 아는가 모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를 완성된 주체로 여기고 책을 외부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완성되었는데 무엇이 들어오겠는가! 과정을 사유한다는 것은 현재의 나라는 주체가 책 속의 낯섬과 조우하여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화()하는 것, 변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머리 싸매고 책을 파고들어야 하는 이유는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울림을 찾기 위해서일 것이다.
 
부수기, 오상아(吾喪我)
애지중지 갖고 놀던 레고 장난감은 여기저기 굴러다니다가 아이에게서 슬슬 잊혀진다. 자연스레 부숴지기도 하고, 아이가 직접 부수기도 하면서 주체는 다시 허물어져서 기입되지 않은 욕망의 흐름들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그것이 부숴지는 순간, 그것에 붙였던 이름도 사라진다. 설명서대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부숴졌을 때나, 만들어졌을 때나 동일하다. 하지만 아이가 과정으로서의 놀이를 하고 나서 만들어진 완성품은 본인에게 다시 만들라고 해도 똑같이 만들 수가 없다. 가득 쌓인 레고조각들 중의 어떤 한 조각에 아이가 손을 뻗칠 때, 그 순간의 배치가 만들어낸 작품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이름들이 사라지는 순간, 다시 무엇과도 접속 가능한 상태로 변한다. 욕망이 다시 흐른다. 이것이 들뢰즈 가타리가 말하는 순수내공의 상태, ()이다. 어떤 것으로도 분화되지 않은 채, 에너지가 꽉 찬 상태이다.
 
우리는 이름을 잃어버리면 존재 자체를 잃는다고 여긴다. 이름 석 자 뿐 아니라 여기에는 나의 사회적 위치를 포함하여 현재까지 내가 이룬 모든 것이 포함되었다고 여겨서 이름을 잃으면 그 과정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수지 못한다.
 
장자는 지금 이미 각기 하나의 사물로 존재하면서 만물의 근본인 무극의 도에 돌아가려 한다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소!” (장자, p.535)라며 견고한 주체의 해체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만물은 생성될 때 자연의 도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이치를 고스란히 그 안에 담고 있지만 우리는 언어적 표상을 붙들고 있어서 그 타고난 무극의 도를 만날 수가 없다. 인간에게 있어 무극의 도란 들뢰즈가 말하는 무의식의 욕망하는 기계들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무극의 도에 돌아갈 수 있을까? 레고처럼 부서져서 돌아가는 것, 죽음뿐일까?
 
장자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수많은 주체와 표상들의 각축장에 다름 아니다. 주체와 표상을 이루는 것은 언어적 기표이다. 그래서 장자는 말()은 진리가 아니며, ()는 말로 담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언어는 표상으로도 작동하는 한편, 우리가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방편이다. 너와 나를 구분 짓지 않고서는 이 세상은 혼돈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말을 익혀버린 우리는 진리와 도를 만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주체의 의식 너머에, 언어의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무의식의 욕망기계들. 무의식이란 말 자체가 의식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 아닌가! 그런데 장자는 제물론에서 오상아(吾喪我)”로 주체와 무의식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 식은 재와 마른나무가 된 듯이 자기를 잊는 것.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은 듯 자기의 모든 것을 잊는 것이다.
수없는 것에 바람이 불어 서로 다른 소리를 내고 있어도 온갖 구멍이나 피리 각기 스스로가 소리를 내는 거야. 그러나 모두 각자가 제 소리를 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정말 사나운 소리를 나게 하는 게 누구일까? (장자,제물론, p.50)
장자는 어떻게 스스로를 잊을 수 있느냐는 제자의 물음에 퉁소소리를 들어 설명한다. 주체 각각이 낸다고 여겨지는 소리들은 사실 그들의 본질(질료)이 거리에 따라 바람과 함께 운동하는 소리라는 것이다. 주체를 잊어버리고 만물이 관계하는 작용을 느끼는 것이 오상아의 상태이다. 들뢰즈의 개념에서는 알의 상태, 레고철학(!)에서는 부서지고 뒤섞여 다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생산이며 작동이다. ‘오상아와 알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다시 욕망의 다른 접속들을 가능케 하고, 다른 주체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다시 생산된다. 만들어지고 허물어지는 과정의 순환을 형성하는 것이다.
 
조립설명서와 동일화
요즘은 일정 금액을 내고 레고놀이를 할 수 있는 블럭방이라는 놀이공간도 있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이 레고를 만드는 과정과 완성만 있을 뿐, 그 완성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돈을 낸 시간이 지나면 빈 손으로 나와야 한다. 그렇다면 이 블럭방의 놀이를 주체의 탄생과정은 있으나 주체에 집착하지 않고 쿨하게 주체를 버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내가 아이와 겪었던 사건을 반추해보면, 조립설명서가 있는 한 레고조각은 부서진 후에 무엇도 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들은 낱개로 떨어져 있음에도 어디에 접속해야 할지, 무엇이 되어야 하는 지에 관해 한 가지 길밖에 정해져 있지 않다. 그곳의 레고는 잘 포장된 상자에 진열되어 있고, 턱이 있어서 다른 것과 섞이지 못하게 구조된 책상에서 만든다. 아이들은 거기서 멋진 스피도즈암흑의 성따위를 만들어낼 수 있고, 완성 후에는 자랑스런 포즈로 인증샷도 찍는다. 하지만 완성품에 대한 향유는 강렬하지 않다. 아이들이 아쉬워하면서도 레고방 문을 대부분 쉽게 나서는 것도 그 완성품이 자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척도에 의한 것이고, 과정의 끝이고, 목표였다. 변주될 수 없는 그것은 조립설명서의 것이다! 내일이고 모레고 다시 와서 같은 척도에 의해 동일한 것을 또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문득 사람들이 겉으로는 멋져 보이는데도 자기의 인생을 하찮게 던져버릴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납득이 간다. 삶이란 욕망기계들의 무한한 접속이다. 이것이 동일한 틀에 맞춰진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멋진 삶의 완성품을 표상하는 한 현실과의 간극에서 괴로울 것이고, 억지로 끼워 맞추어진다 해도 그 삶은 이미 자신의 삶이 아닌 것이다.
 
앙띠 오이디푸스장자, 이 두 권의 책은 너의 표상체계를 부수고, 무의식의 세계를 만나라고, 그 안에서 꿈틀대는 욕망의 흐름을 보라고 한다. 현재 우리의 모습은 완성이자 끝이 아니라 무엇도 될 수 있고 어디로도 갈 수 있는 과정에 있다. 하지만 견고한 무지의 주체는 책의 표면만을 더듬으며 조립설명서를 찾으려한다. 나는 한 학기동안 주구장창 척도를 없애라는 말을 하고 있는 텍스트에서 척도를 건지려하면서 길을 잃고 헤매었다.
 
사람들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삶을 결정하게 되는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 순간엔 자기가 알던 자기를 잊는다. 욕망의 벡터를 바꾸는 오상아의 경험은 너무 강렬해서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나에게도 마치 우주의 한 점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경험이 있었다. 엄마, 주부라는 이름과 내가 있는 곳, 나이뿐 아니라 이름마저도 없어진 그때, 나는 나를 잊었었다. 나는 꿈틀대는 욕망에게 공부라는 다른 길을 열어 주었었다. 분명히. 하지만 나는 다시금 하나의 척도를 찾고 있었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맹렬히 비판하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프스적 치료를 닮았다. 오상아의 강렬함을 체험해서 나의 욕망이 흐르는 배치를 바꾸어 놓고서는, 다시 공부를 척도로 삼는 것이다. ‘감이당, ‘들뢰즈장자를 표상적으로 사유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반동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레고는 언제나 오목한 동시에 볼록하다. 완성된 후에도 언제고 아무데나 결합할 수 있고 다시 완전히 부서질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욕망의 본질도 모두 임시변통의 재주꾼(앙띠오이디푸스,p.7)이다. 과정의 마디마다 오상아하기. 나를 잊고 무엇과도 다시 접속 가능한 상태로 만들기. 그것이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끊임없는 과정을 사유하는 삶이다. 설명서를 던져버린 레고놀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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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세경님의 댓글

세경 작성일

글 올리셨네요~ 전에 잠깐 이야기해주셨는데 이렇게 완성되었군요. 레고철학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