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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vs 루쉰] 인식의 동요를 일으키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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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 작성일16-02-01 07:12 조회25,225회 댓글3건

본문


인식의 동요를 일으키는 질문

 

김지숙(감이당 대중지성 3학년)

 

올 봄, 중학교 3학년인 큰 아이한테서 엄마의 철학책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 이를 전해들은 지인들은 사춘기 남자아이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흔한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라고 했다. 그런데 여름이 되었을 때 봄날에 내뱉었던 아이의 말이 단순히 그냥 지나칠 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휴직 상태라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자연스레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이 눈에 들어왔다. 문제는 하나하나가 눈에 거슬린다는 거였다. 소소한 일상의 습관에서부터 심지어 책 읽고 공부하는 모습까지도. 평소 공부를 통해 알게 된 것들을 아이에게 알려주며 그렇게 조언해 주었는데도 변하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 실망되기도 하면서 화가 났다. 나의 훈계는 반복되었고 횟수 또한 점점 늘어났다. 결국, 아이가 달라지지 않는 것은 다 스마트폰 때문이라며 그것을 던져버렸다. 아이는 와장창 깨진 스마트폰을 들고 오열했다. “엄마가 뭔데 내 인생에 관여하느냐, 엄마가 공부한 것을 왜 나한테 강요하느냐, 엄마처럼 살기 싫으니깐 잔소리 좀 그만하라!”는 절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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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쯤 되니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올해 초 아이가 했던 말이 사춘기 학생의 치기어린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것과 무엇보다도 나의 조언과 훈계를 아이는 잔소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왜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일까.


내가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나 자신을 이끌어 줄 어떤 가치를 공부를 통해 찾고 싶어서였다. 당시, 나는 미디어나 사람들이 말하는 천편일률적 가치를 따르며 중심 없이 흔들리고 또 거기에 얽매여 세상을 편협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물론 공부를 하면서 이런 나를 확실히 보게 되었으니 공부의 장으로 들어선 것은 잘한 일이다. 하지만 아이한테 조언한다고 했던 것은 공부하면서 배우고 알게 된 것들을 옳다고 믿어서였는데, 이것 역시 나의 사고를 또 하나의 틀에 가두는 것이니 예전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아이가 보인 격한 반응은 그것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는지 이것을 점검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자신을 구원하고 삶의 주인이 되는 공부를 한다고 그럴 듯하게 말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마나한 공부, 아니 독이 되는 공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질질 끌려 다니는 삶, 거기에는 질문이 없다!

3년 전, 나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 동안 내 지반에 대해 어떤 의심도 없이 살아왔던 나로선 솔직히 그들이 신기하기도, 부럽기도 했다. 언젠가 나도 그들처럼 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에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공부는 버거웠고 지지부진했다. 40여 년간 묵은 사고가 너무나 견고했기에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였는지 아이들만큼은 유연한 사고와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힘을 조금이라도 빨리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제도권 교육이 사고를 획일화하고 굳게 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한 몫 하면서 틈나는 대로 배운 것들을 아이들에게 알려 주었다. 물론 그것을 따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생각만큼 내 말에 귀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고, 특히 큰 아이는 이런 나를 답답해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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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의 소설 야단법석은 제목 그대로 변발 때문에 한바탕 야단법석을 떠는 마을 사람들을 보여준다. 칠근이 대처에 나갔다 셴형 주점에서 들은 황제가 보위에 올랐다는 말에 마을은 술렁인다. 문제는 황제가 변발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변발을 올렸던 자오치 영감마저도 변발을 내리고, 변발이 없으면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지 책에 나와 있는 것을 조목조목 읊어댄다. 듣고 있는 칠근댁의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녀의 남편인 칠근은 이미 대처에 나가 변발을 잘랐기 때문이다. 왜 그랬냐고 윽박질러 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곧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이런저런 가늠을 하느라 바쁘기만 하다. 하지만 어떤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대처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기다릴 수밖에. 그런데 열흘 남짓 지났을 때 황제가 보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자오치 영감이 변발을 다시 올리고 장삼을 입지 않았다는 것과 셴형 주점에서 별다른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게 그 증거라면 증거다. 그렇다면 혁명군은 성공했고, 사람들은 변발 때문에 더 이상 난리법석을 떨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지금 칠근은 칠근댁과 마을 사람들에게 상당한 존경과 대우를 받는다. 육근의 댕기머리도 벌써 커다란 변발로 변해 있었다.(‧‧‧)최근 발을 싸맨 그 아이는 집안일을 도울 만은 했는지 열여섯 개 구리 못으로 땜질한 주발을 들고 뒤뚱거리며 마당을 오가고 있었다.(루쉰, 야단법석, 외침, 그린비, 2012, 92)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혁명군의 성공은 잠시였고 육근의 전족과 변발을 보아하니 지금은 황제가 다시 보위에 오른 게 분명하다. 미루어 짐작컨대, 앞으로도 계속 마을 사람들은 혁명군의 성공이냐 황제의 보위냐에 따라 변발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야단법석을 떨 것이다. 그런데 정녕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다. ‘Yes’말고는 답이 없을 듯싶다. , 마을 사람들을 보라! 자기가 변발을 해야 할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거나 질문하는 자가 있는가. 아무도 없다. 이러하니 상황이 바뀔 때마다 눈치만 보면서 갈팡질팡, 우왕좌왕하며 질질 끌려가는 삶 말고 어떤 삶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무지해서라고? 그렇다면 글자깨나 안다는 소위 지식인이라는 자오치 영감은 어떤가. 그에게는 질문도 없고, 게다가 자기 생각도 없다. 단지 책에 나온 것을 좔좔 외면서 사람들에게 겁이나 주고 있다. 그 또한 무지한 마을 사람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들의 행동을 두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그랬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피곤한 상황을 계속 이어나갈 것인가. 그래서 삶은 늘 선택의 기로에서 좋든 싫든 결단을 하도록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의심하고 질문하면서 고민할 수밖에. 이것은 자신을 무지에서 빠져 나오게 하는 길이자 동시에 자기의 삶을 주도하게 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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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돌이켜보면 공부를 하면서도 질문이 없었다. 아마도 누군가 가르쳐준 대로 따라가는 것이 무척이나 편했을 것이다. 더욱이 책과 선생님이 가르쳐 준 것이니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는 밑줄 긋기에 바빴고, 심지어 어떤 책에는 밑줄 치지 않은 데를 찾는 게 더 쉬울 정도였다. 선생님들의 강의에도 늘 감탄과 끄덕임뿐이었고 그것을 정답인양 아무 의심 없이 기계처럼 받아들였다. 물론 이것을 아이한테도 그대로 전해주었다

어떤 날은 굳이 대학가지 않고 백수로 살면서 공부하는 것을 이상적인 모델로 얘기하며 고전과 철학책을 읽으라고 했다가, 또 어떤 날은 대학까지 마치고 훌륭하게 강의하시는 선생님을 만나면 이런 삶이 최고라며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다그쳤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아이는 내 말이 진정 깊은 고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의 생각과 책에 나온 것을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음을 눈치 채고도 남지 않았을까. 따라서 아무리 철학과 고전을 통해 다르게 생각하는 법을 배우라고 해도 아이는 시큰둥했고, 생활 습관을 고치라고 해도 귓등으로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게 이해가 된다. 이것도 모르고 나는 계속해서 닦달해댔으니 아이가 엄마의 철학책을 다 불태워버리고 싶다고 폭발했던 것이나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그러니 제발 내 인생에 관여하지 말라!”고 절규했던 것 모두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책과 선생님 말씀을 교조로 삼는 영락없는 광신도였다. 그래서 고민도 질문도 없이 그것들에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으니 삶의 주인이 되기는커녕 자오치 영감처럼 무지의 길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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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 믿음에서 비롯된 배타적 인식


공부를 시작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훨씬 다양하고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유연해진다면 포용력도 그만큼 커지리라는 기대에서 말이다. 하지만 아들과 생각지도 않게 관계가 어긋난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전보다 더 딱딱해지고 많이 협소해졌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평소 자주 연락하던 친구나 지인들도 아주 중요한 일 아니면 특별히 만나는 일이 줄었고, 심지어 형제들조차도 그렇다. 처음엔 공부하느라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서 그런 거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내가 일부러 그들을 피하고 있었다. 이것 또한 공부하면서도 질문하지 않는 내 태도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시대마다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인 에피스테메가 있음을 보여주면서 서양의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탐사한다. 르네상스 시대는 닮음, 고전주의 시대는 재현의 질서, 근대는 인간이라는 서로 다른 에피스테메 때문에 시대와 시대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푸코는 말한다. , 시대마다 에피스테메를 토대로 사유하게 되므로 말과 사물의 질서가 달라지고 그 결과 지식의 배치가 바뀌어 각 시대 사이에 불연속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광인만 해도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우주의 비의를 찾으려 했으나 고전주의 시대에는 광인을 이성으로 사유할 수 없으므로 인식의 대상에서 배제하고 감금했다. 근대에 와서는 광인을 정상에서 벗어난 병적인 상태로 규정한다. 시대마다 광인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도 다르다.


이처럼 사람이라면 누구나 시대적 에피스테메 안에서 사유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것을 바탕으로 형성된 담론이나 지식이 개인의 인식의 토대가 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에피스테메 안에서 사유가 가능한 것은 동일자로서 취급되지만 사유가 불가능한 것은 모두 배제되면서 타자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동전의 양면처럼 타자의 역사이자 동일자의 역사라는 것! 따라서 이분법적이고 배타적인 인식과 함께 동일화하려는 사유는 늘 역사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결국 문제는 타자, 타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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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자신의 것이지, 그들 누구도 나에게 간섭할 권리는 없어요!” (루쉰, 죽음을 슬퍼하며, 방황, 347)


가정의 전제, 구습 타파, 남녀평등, 입센과 타고르, 셸리들에 관해서 이야기해주면 두 눈에 순진하고도 호기심으로 가득한 빛이 어려 있었던 여자, 쯔쥔. 구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던 그녀는 쥐안성과 교제를 한지 반년쯤 되어 이처럼 단호하게 말한다. 전혀 구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중국 여성을 대신해 그녀는 희망을 보여주며 쥐안성의 영혼을 진동시킨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남자의 사랑을 얻는 순간 마치 얻을 것을 다 얻었다는 듯 그녀는 밥하고 강아지를 키우는 것에만 그리고 주인집 여자와 병아리 때문에 암투를 벌이는 데에만 온 정신을 쏟는다. 또한 쥐안성이 사랑을 고백할 때에 어떤 자세를 취하고 어떤 말을 했는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며 복습할 뿐이다. 그가 머뭇거리면 아예 허위적인 위로의 답안을 내도록 강요한다.


그녀가 연마한 사상과 활달하고 두려움을 모르던 언사는 결국 한낱 공허에 지나지 않으며 더구나 자신은 이 공허에 대해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어떤 책도 읽지 않고 있었고, 이 삶을 도모하는 길을 향해서는 반드시 손을 맞잡고 나아가거나 아니면 홀로 분투해 가야만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 남의 옷자락에 매달리기만 한다면 그가 전사라고 할지라도 싸울 수 없게 되어 함께 멸망하고 마는 것이다. (같은 책, 362)


나는 나 자신의 것이지, 그들 누구도 나에게 간섭할 권리는 없어요!”라고 침착하고 단호하게 말하던 그녀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이제 그녀는 쥐안성의 인식으로는 도무지 사유할 수 없는 사람, 말하자면 타자일 뿐이다. 결국, 두 사람이 헤어지는 길만이 새로운 희망이라고 결론을 내린 쥐안성은 그녀에게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을 고백한다. 이에 쯔쥔은 쥐안성을 떠나고 사랑을 잃은 인간은 죽고 만다는 진실(같은 책, 368)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들려오는 소식은 그녀의 죽음뿐이다.


그런데 쥐안성이 가정의 전제, 구습 타파, 남녀평등, 혁명이나 진보를 얘기할 때 과연 쯔쥔은 그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래서 중국의 낡은 사상에서 완전히 깨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녀는 쥐안성에 대한 사랑이 그토록 열렬하고 그렇게 순진했기 때문(같은 책 350)에 사랑하는 사람의 말로서 귀담아 들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두 사람이 마치 같은 인식의 토대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쯔쥔의 말과 행동이 쥐안성의 영혼에 울림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의 사상과 이념 외에는 다른 것을 보지 못한 다시 말해 푸코가 말한 타자성을 인식하지 못한 쥐안성이 동거 후 쯔쥔의 행동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여, 쥐안성이 자질구레한 일이 굳세고 두려움을 모르는 쯔쥔에게 이토록 뚜렷한 변화를 줄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다.’(같은 책, 355)고 고백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들의 관계가 파국으로 끝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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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공부를 통해 알게 된 지식들을 다시 내 인식의 토대로 삼았다고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쥐안성처럼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공부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니 당연히 옳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더 큰 문제였다. 그러다보니 내 인식의 틀 안에서 판단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타자로 생각하고 배제했다. 내가 친구들이나 형제들을 만날 때 불편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지식에 대한 맹목적 믿음과 더불어 나의 배타적 인식은 날로 커져만 가고 있었으니 사람들과의 관계가 팍팍해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에피스테메의 단절, 인식의 동요


앞서 보았듯이 공부를 하면서 지식은 좀 늘었는지는 몰라도 그것밖에 보지 못해 공부가 도그마가 되고 독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말하자면, 공부를 통해 알게 된 것들을 전부라 생각하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강요하거나 또는 그것과 다르다고 배제시키려고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하는 질문도 이와 다르지 않다. , 시대마다 담론과 지식이 달라져 불연속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가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지식도 언젠가는 또 달라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배운 지식이 전부이며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푸코의 말을 좀 더 들어보자.


만약 그 배치가 출현했듯이 사라지기에 이른다면, 18세기의 전환점에서 고전주의적 사유의 밑바탕이 그랬듯이 만약 우리가 기껏해야 가능하다고만 예감할 수 있을 뿐이고 지금으로서는 형태가 무엇일지도, 무엇을 약속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어떤 사건에 의해 그 배치가 뒤흔들리게 된다면, 장담할 수 있건대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푸코, 말과 사물, 526)


지금은 고전주의적 사유의 밑바탕인 재현의 질서라는 에피스테메는 사라지고 현재로서는 그것을 예감할 뿐이다. 따라서 푸코는 밀려오는 파도에 의해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이 어느 순간 사라지듯, 근대의 에피스테메인 인간도 언젠가 사라질지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지식이 누군가를 판단하는 잣대나 근거가 될 수도 없고 하물며 그것을 따르라고 할 수도, 다르다고 배제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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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떻게 해서 에피스테메의 단절이라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각 시대에 통용되던 지식에 대해 다른 방식의 질문, 말하자면 인식의 동요를 일으키는 질문이 나올 때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야 새로운 담론이 생기고 지식의 배치가 바뀔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결국, 공부하면서 배워야 할 것은 지식에 얽매이고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안에서 보지 못하는 것을 찾아내고 질문하면서 단단하게 지층을 이루고 있는 자신의 인식을 깨 나가는 것이리라. 루쉰의 다른 소설 작은 사건의 주인공 가 그랬던 것처럼.


는 인력거를 타고 S문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희끗한 머리에 몹시 남루한 옷차림의 여인이 그것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 보기엔 그녀의 저고리가 바람에 펄럭이면서 인력거 체에 걸린 것인데 굳이 인력거꾼은 가던 길을 멈추며 다친 데는 없는지를 묻는다. 상처가 대수롭지도 않고 본 사람도 없는데도 그녀를 부축하고 주재소로 들어가는 인력거꾼이 갈 길 바쁜 로선 참 못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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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의 말대로 노파의 잘못이라고 나 몰라라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인력거꾼이 그때 지나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바람이 불지 않았더라면 노파가 그것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물론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이런 상상을 해봐야 부질없는 일이지만 넘어진 노파를 보고 그의 입장에 서서 한번 쯤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역시나 인력거꾼은 넘어진 노파를 모른 척 하지 않고 부축하면서 괜찮은지를 물었고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날 자신의 벌이가 날아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파와 함께 주재소로 들어간다. 인력거꾼 탓을 하는 노파가 어떤 요구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에게 다가온 순경이 다른 인력거를 잡으라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일이 금방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인력거꾼의 행동은 잘잘못을 가리는 논리도 중요하지만 다친 데는 없는지 먼저 그것을 살피는 인지상정의 미덕 어쩌면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를 보여준 셈이다. 이것이 의 마음에 소용돌이를 일으킨 걸까. 갑자기 인력거꾼이 순식간에 우러러봐야 볼 수 있을 정도로 커지더니 가죽 두루마기 안에 감추어진 그의 소아(小我)를 쥐어짜고 있는 것이 아닌가.’(작은 사건, 외침, 74) 다가온 순경에게 동전을 인력거꾼에게 전해달라고 하면서 는 생각한다. ‘ 자신을 돌이켜 보게 되면 어떡하지? 아까 일은 잠시 접어 둔다 해도 한 줌 동전은 또 무슨 의미였을까? 그를 치하하려고? 내가 그를 심판할 수 있을까? 나는 나에게 답을 할 수가 없었다(같은 책 ,74).


이 일은 지금도 종종 기억이 난다. 그래서 종종 고통을 참으며 나 자신을 돌이켜 보려고 노력한다. 지난 몇 년 동안의 문치(文治)와 무력(武力)은 한 구절도 머리에 남아 있지 않다. 어릴 적 읽은 공자 왈’, ‘시경에 이르기를처럼 말이다. 그런데 유독 이 자그마한 사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면서 더욱 또렷해지곤 한다. 나를 부끄럽게 하고, 나의 쇄신을 촉구하고, 내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면서. (같은 책, 74)


당시의 작은 사건은 에게 있어 에피스테메의 단절과도 같은 경험이었을 것이다. 마치 망치로 맞은 것처럼 몇 년 동안의 문치와 무력을 깡그리 잊히게 할 정도니 말이다. 이것은 사소한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질문하면서 자신의 인식에 파장을 일으켰기에 가능했다. 하여 남을 무시하는 태도가 나날이 더해 갔던 그를 나쁜 성벽에서 끌어내(같은 책 72) 주었으니 어떻게 이 일을 잊겠는가. 만약 그 일에서 어떤 인식의 동요도 없었다면 여전히 는 자신의 견고한 인식에 갇혀 인력거꾼이 쓸데없이 일을 만들어 스스로 욕을 보려 한다고, 노파의 허풍은 가증스럽다고(같은 책, 73)무시하며 소아(小我)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공부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사건을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는 힘을 기르고 나아가 견고한 자기를 깨부수며 새롭게 하는 힘을 키우는 것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의 인식을 뒤흔드는 질문, 즉 인식의 동요를 일으키는 질문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부가 나를 보게 하는 앎이어야지, 지식만 쫒다 자신은 놓치고 남에게 훈계나 하며 경계를 짓는 수단이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의 말대로 고통스럽고 부끄럽지만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채찍질하고 쇄신해 나아가는 것, 그래서 곧 공부가 수행이자 고행인 것이다이럴 때 공부가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개인적인 신념이나 사고방식의 올가미에 걸려 있던(푸코, 말과 사물, 526) 자기를 진정으로 구원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리저리 흔들리며 갈팡질팡하는 자신을 부여잡는 덤도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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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안정미님의 댓글

안정미 작성일

지숙샘~~~
글 완전 공감하면서 읽었어요.
같은 태양족이라 그런가... 딱 내 얘기 같다는....
좋은 글 고마워요.
 병 신 년에도 (인터넷 금지어러서 띄어썼어요.ㅋㅋ)
기대할게요.

화이트님의 댓글

화이트 댓글의 댓글 작성일

정미샘 ~~! 공감하셨다니 막 동지애가 치솟습니다 ㅎㅎ
남의 들보는잘 보면서 자신의 탁함은 보지 못하는 게 모두의 문제지만 태양족이 좀 심하긴 하지요 ?ㅋㅋ
바깥으로 가 있는 시선을 거두고 자신을 직시하는 공부를 올해도 쭈욱 ~~함께 해요 ^^

애독자님의 댓글

애독자 작성일

선무당 사람 잡는다고 하죠. 어설픈 배움은 편견과 독선이 되어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속박합니다. 아는 게 병이 되는 경우. “엄마의 철학책을 다 불태워버리고 싶다”는 아들의 ‘분서갱유’는 이런 끔찍한 현실에 대한 공분이요 구국의 결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진정한 배움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과 사건을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는 힘을 기르고 나아가 견고한 자기를 깨부수며 새롭게 하는 힘을 키우는 것”-나의 진리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고집이 아니라, 타자의 거울을 통해 나의 무지를 자각하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 그런 점에서 온몸을 던져 나의 무지를 보게 하고, 나에게 존재가 붕괴되는 체험을 선사한 아들은 내 공부의 큰 ‘질문’이자 ‘선지식’이네요. 든든한 스승이자 벗과 함께 살고 계시다니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