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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와 근대적 주체의 不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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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공이산 작성일13-10-15 21:08 조회3,307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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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잡다한 책들과 취미로 세월을 보내던 중 2007년 겨울 도저히 용납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두 가지 사건과
맞닥뜨린 후 잠시 앞뒤 두서 없는 고민에 빠졌었다.
그 고민의 끝자락에서 두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는데,
첫째는 "왜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였고
둘째는 "그렇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였다.
다시말해 우리 사회의 발가벗겨진 구조와 작동 원리를 알고 싶었고 그 종말을 예상해 보자는 거였다.
 
일단 얕은 고민 끝에 품은 평범하고 두리뭉실한 의문이기는 하되, 몇 사람과의 대화를 거치고 나자
나름 심각하고 무거운 과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과제를 한 번 제대로 풀어보기로 했다.
 
우선 사회 구조의 문제.
우리 사회를 이토록 천박하고 줏대 없는 인간 군상들로 가득 채우게 한 주범으로 '토지 사유화의 문제'와
'금융 자본주의'를 꼽았고 여기에 초점을 맞췄다.
 
토지는 우리 삶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이다.
당연히 우리 모두(현재의 우리 모두와 앞으로 태어날 우리 후손들 모두) 이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하며,
동등한 기회를 가지고 향유할 수 있어야 하는 사회 공공재이지만 이것이 배타적 재산권과 투기의 대상이 되었고
이런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생산과 분배의 과정에서 심각한 왜곡과 불균형이 빚어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그 왜곡과 불균형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고, 그 부담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불행의 근본이다.
지대와 토지 분배에 대한 많은 책들이 있지만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에 이 문제가 가장 명쾌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이 책 덕분에 골치 아픈 토지 사유 문제와 지대 문제를 쉽고 즐겁게 공부할 수 있었다.
이 책은 19세기 출간 당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만큼이나 유명세를 탔고 당시 주기적인 경제 불황과
빈곤의 심화 원인을 파헤친 역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자본의 원시적 축적에서 시작하여 자본주의의 비극적 종착점인 금융자본주의까지 다다르고 보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토록 잔혹하고 탐욕적인 원리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이 새삼 끔찍했다.
태환화폐 시대의 종말과 함께 발호하기 시작한 금융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정치적 슬로건을 앞세우고
전세계를 자신의 논리로 전일화하고 있다.
갑작스런 베를린 장벽 붕괴로 유럽 단일 화폐의 구상을 지연시키고, 테러를 이용하여 오일달러를 길들이고,
천안문 시위를 주도하여 중국 경제를 자신에 종속시키려 획책하고, 일본에서는 부동산 거품을 일으켜
엔화의 기세를 주저앉히는 등, 금융자본의 음모와 횡포는 그 광대한 범위와 강밀도에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 사건들의 이면을 살펴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유로화, 오일달러, 위안화, 엔화 등 유일한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의 라이벌이 될 수 있는 화폐의 성립을
저지하려는 일련의 목적에 맞닿는 것이다.
이 정도면 정말 전지 전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의 사람들은 설마 그 정도일까?'하고 의문을 품는다.
그렇다면 금융자본의 전능함과 탐욕성을 상징하는 두 가지 사건을 예로 들어보겠다.
하나는 1992년 '헤지펀드'의 대부 《조지 소로스》가 영국 파운드화를 공매도 하여 영국 정부와 힘겨루기를 한 적이
있는데, 불과 2주 만에 영국 정부는 손을 들었고 이들은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헤지펀드의 무자비한 공세에 영국이라는 나라가 단 2주 만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암살에 금융자본의 음모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은본위 화폐(태환화폐)를 염두에 두고 있던 케네디의 피살은 금융자본주의의 추악한 속살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인데 이런 유형의 주제는 문자를 통하기보다  술자리의 '썰"을 통해야 제 맛인 고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로 넘긴다.
어떤가? 금융자본가들의 잔혹성과 대담함이 조금은 이해되시는가?
이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나라(그렇다고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는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다.
'중국'이다.
중국이 갑작스레 수출에서 내수 창출로 경제 드라이브를 전환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한국은? 웃자고 하는 소리밖에 안 된다.
 
아무튼 현재 우리 사회의 운명을 주관하고 지배하고 있는 금융자본은 산업자본과는 달리 실물 경제와는 아무런 상관 없이
자기 증식 욕망을 무제한적으로 채우려 하는 게 본원적인 생리인데, 이미 그 자체의 욕망 안에 파국적인 종말의 기미를
담지하고 있는 셈이다.
구체적인 물질적 부의 생산과 분배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의 신용' 혹은 '조작된 신용'을 담보로
무한 증식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이상 그것은 필연적으로 반윤리적이며 반사회적인 욕망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함께 간다는 '동반 개념'이 아예 탑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니, '일자리 창출' 같이
혹시나 하는 기대감은 일찌감치 접어두는 게 좋다.
(정운찬 전총리가 왜 그런 착각을 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무자비하고 파렴치한 금융자본의 논리가 말초신경계까지 뻗쳐있는 한국 사회의 미래는 뻔한 것 아닌가?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한국 사회가 이 지경이 된 것은 해방 공간과 개발 독재 시대에 토지공개념을 제대로
세우지 못해 온 나라가 땅으로 투기하는 열풍에 휘말린 결과 토건 세력에게 정권을 넘겼고, 충분한 준비 없이
어설프기 짝이 없는 방식으로 세계화의 논리에 발을 내밀었다가 먹성 좋은 투기 자본이 구사하는 신자유주의 드라이브에
말려들어 그나마 쌓아왔던 재산은 다 까먹고 재기한답시고 오로지 부자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초지일관 돈만
쫓으며 살다보니 스스로의 정신력과 체력을 헛되게 탕진하여 건전한 이성에 근거한 판단력을 잃고 외부의 힘과 논리에
휘둘리며 사는 사회의 미래는 암담함 그 자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정신과 체력을 양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개인적인 양생법은 대강 알겠는데, 사회 양생법은 전혀 알지 못하니 이것도 하나의 공부 과제가 된 셈이다.
단, 개인이 전부 양생에 성공하면 사회는 저절로 양생 된다는 순진한 생각은 하지 않는다.
개인과 사회간의 상보작용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개인과 사회 전체가 함께 가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팁으로 한 가지 보태자면, 줏대 없이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아온 우리는 2015년을 즈음해서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특히, 뒤늦게 남들 따라 땅과 집으로 한몫 챙기려 나섰던 사람들은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 없이 살아온 민초들이 같이 겪어야 하는 고초는 무엇이란 말인가?
끝으로 위에서 한 번 등장한 투기꾼 《조지 소로스》의 한탄을 달아둔다.
"도대체가 시장을 모르겠어, 이미 음악은 멈췄는데 사람들은 계속 춤을 추고 있단 말이야....."
 
여기까지 이르렀지만 속 시원한 구석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울체가 쌓인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만들었다.
"우리 스스로 자정 능력을 만들고 구원의 기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방도가 없을까?"
그래서 시작한 공부가 '운명학'이다.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공부가 되었지만, 이로 인해 사주명리학과 주역을 만나게 되니 헛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미래를 예언하는 데 관련된 책들을 뒤지기는 했지만, 저자의 정체가 의심쩍은 경우도 많았고 제목은 미래를
말하지만 과거만 이야기하는 책이 태반이며 대개가 혈액형별 성격 맞추기 정도의 수준이다 보니 공부가 아니라
호기로운 잡담만 실컷 한 뒤의 헛헛함만 남았다.
一夫 선생의 '정역'에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엄청난 내공과 깊은 공부가 필요한 영역이라 더 깊게 파고 들지 못했다.
그나마 사주명리학은 재미와 현실적 실용성을 동시에 맛볼 수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개개인의 운명과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에 한정되는 것 같아 대운과 세운을 따지는 대목에서 흥미를 잃었다.
하지만 육친론과 음양오행설에 기초한 건강, 심리 분석까지 공부하는 동안은 정말 엄청난 노다지를 발견한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약간의 공부만으로도 기상청 일기예보보다 정확도 높은 정보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을사년, 신사월, 갑자일, 병자시 生이다.
아마도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감이당분들도 이 여덟 글자를 가지고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으리라.
여러분의 예상대로다.
식복은 부족하지 않되 항상 간당간당하게 산다.
정규직을 가져본 건 아득한 옛날이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줄곧 타향살이다.
성적보다는 어머니의 헌신으로 서울로 올라간 후 한번도 고향 부산에 돌아간 적 없다.
서울에서 경기도 남쪽으로, 다시 경기 북쪽으로 옮겨 살다, 지금은 경남 진주시에서 서식하고 있다.
그리고 직장 덕분에 전국에 있는 화력 발전소 건설 현장을 돌아다녔다.
곧 서울로 권토중래할 것이다.
하는 공부 또한 이것저것 잡식성이고 쉴 새 없이 대상을 옮겨 다니니 공부에도 역마살이 붙었다.
이쯤 되면 더 이상의 자기소개서나 이력서가 필요 없지 않은가?
두고두고 대단한 학문이라는 찬탄을 하게 된다.
깊이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
좋은 스승 없이는 할 수 없는 공부라 여기는 소치다.
 
그러나 지금 내가 찾는 것은 세계와 인간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변화 원리이고 법칙이다.
사주명리학을 접어두고 좀 더 확장된 영역을 다루는 것을 구하던 중 '우주 변화의 원리'라는 책을 발견했다.
돌아가신 《한동석》이라는 분이 쓴 책인데, 언뜻 보기에도 깊이가 심상찮아 보였고 책 소개글에
한의학과 교수들이 책 중간을 넘기지 못하고 덮어버리는 책이라는 말에 투지가 불타올랐다.
투지가 치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금방 드러났다.
음과 양, 오행 정도만 알고 있던 나에게는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몇 번이나 일었지만, 분명 내가 찾는 무언가를 담고 있다는 생각에 읽고 또 읽었다.
그 와중에 주역을 모르고는 진도가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주역 공부를 시작했다.
보통의 공부는 하면 할수록 나아지고 있다는 성취감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데, 이 방면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속담이 제격으로 들어맞는다.
역시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한다.
한동석 선생도 좋은 스승과 도반들이 있었기에 공부의 경지를 세울 수 있었고 이 책을 세상에 낼 수 있었다.
나 같은 재주 없는 사람이야 새삼 일러 무엇하겠는가?
 
재미 삼아 이야기 한 토막 하자면 직접 주역점을 친 적이 있다.
걷지도 못하는 놈이 날아봤다는 말이다.
나 스스로의 문제로 친 것은 아니고 친구의 간절함에 못 이겨 한 달 간격으로 두 번 점을 쳤다.
내 사주에 活人을 해야 무탈하다는 메세지가 숨어 있으니, 이것도 활인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점을 친 것이다.
그렇지만 절대로 장난 삼아, 시험 삼아 점을 치지는 않았다.  
이미 나에게 주역은 소위 '한 번 해보는'그런 학문이 아니다.
산가지로 효를 뽑는 것은 너무 번거롭고 전문적이어서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이 애용했다는 척전법을 썼다.
우선 세 개의 동전을 정갈하게 하고 점을 보는 당사자는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해야 한다.
친구는 정말로 목욕재계를 했다.
그리고 동전에 자기의 혼을 실어야 한다. 동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동전을 사심 없이 던진다. 던질 때 내 바램이나 욕심이 실리면 안 된다.
고민은 동전을 손에 쥐기 전에 끝내야 한다.
결과가 나왔다.
다들 아시겠지만, 주역의 점괘는 두 가지를 말해 준다.
첫째, 점 보는 당사자가 처해 있는 현재의 객관적인 상황과
둘째, 그 상황을 지혜롭게 풀어나가는 군자의 도리다.
상담과 충고의 성격이 강한 것은 사주명리학과 동일하지만 避凶趨吉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피흉추길의 길이 다르다.
처음에는 '풍화가인' 괘가 나오고 한 달 후에는 '지화명이' 괘가 나왔다.
친구가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소름과 전율'이 연신 터져나왔다.
마치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자기 직장내의 역학관계와 문제점을 꿰뚫어 본 후 풀이 해주는 듯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많이 놀랐다. 경탄 했다.
다음 날 친구는 과감히, 망설이지 않고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고, 지금은 다른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
처음 진입했을 때 이런 충격적인 감흥을 맛본다는 것은 정말 복이다.
나와 인연이 닿는 것인가?
다만, 공자와 정약용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의 도움이 있지 않고는 도달하기 불가능한 공부라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된다는 점이 문제다.
감이당에 접속한 계기도 이것이다
 
이 글의 제목이 그래도 '근대인의 부재'인데, 아무 상관 없는 듯한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딱히 제목이나 주제 없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제목은 써야 글이 올라간다고 해서 제일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적어 놓은 것이다.
이왕 제목으로 '근대인'을 설정해 놓았으니 준비가 덜 된 대로 말해보겠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지금 한국 사회를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한 것이 무엇인가?
처음에 그 원인을 물질적 기반으로서의 구조에서 찾았지만, 그것은 존재와 사유의 형식틀에 관한 문제이고
주관의 내면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개인, 가족, 직장, 지역 사회, 국가 조직 등. 특정 카테고리를 지정할 필요도 없이 하나같이 무언가에 휘둘리고 있다.
그것도 혼자 휘둘리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휘둘리는 것도 함께 해야 제 맛이 나는 한국인들의 심리 상태를 어떤 외국인은 들쥐 근성이라고 했고,
우리는 단일민족 특유의 공동체적 동질성 확보 욕구라고 하지만 내가 볼 때 단지 줏대와 자존심을 내버렸기 때문이다.
19세기 사회적 혼란과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정국의 민족 분열, 분단 상황하의 군사 독재 시절, 금융 위기 시절을 겪으면서
큰 부담인양 내다버렸다.
대신 체득한 것이 줏대 없이 영악하게 사는 지혜다.
항상 다수 속에 묻혀 있어야 안심이 되고, 모난 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이 하는 것은 일단 다 따라해야 하고 남들이 피하는 것은 절대 하면 안 된다.
그 결과 줏대와 자존심 없이, 아무런 기준점을 갖지 못한 채 집단적으로 휘둘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의식이나 자기 결정이나 자기 반성이 있을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삶도 추상적인 우리의 삶이 될 뿐 자기가 결정하고 실행하는 삶이 아닌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역사가 그래서인지 타인을 우습게 여기고 경멸하는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이 한국인만큼은 우습게 여기고 경멸한다.
줏대와 자존심 없는 인간이 누구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는가?
지금이 노벨상 수여 기간이니 하나 예를 들자면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이 안 나오는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서
비롯된다.
줏대와 자존심이 없으니 나만의 세계관과 문체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
요즘 소위 베스트 셀러의 대열에 끼는 한국 소설과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비교해 보면 이해가 쉽다.
세계관과 문체와 이야기 배치, 어휘 구사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다를 수가 없다.
중남미 작가 특유의, 북유럽 작가 특유의, 남유럽 작가 특유의, 미국 작가 특유의, 이런 특유의 무엇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왜 많은 한국 소설가들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만 들어서면, 혹은 나이만 좀 먹었다 싶으면 개인의 구원에
목매는지도 줏대와 자존심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개인의 구원에 목매는 작가가 노벨상 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는가?
줏대와 자존심은 치열한 자의식에서 비롯된다.
자의식은 스스로서의 자기인 즉자적인 의식과 그에 대립하고 관계 맺는 타자와의 통일의 산물인 주체성에서 나온다.
그 주체성이란 타자와의 대립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을 정립하며, 타자와의 대립을 극복하고 자신 안에서 통일시킴으로써
스스로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는 주체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자의식은 그냥 선험적으로, 공짜로 주어지는 하늘의 선물이 아니다.
그것을 형성하고 지켜내기 위해 서구에서는 수 세기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지역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눈물과 피와 열정을 쏟아부었다. 
인식하고 사유하며 결단을 내리고 실천하는 근대의 주체성과 자의식은 그렇게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확보된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그것을 얻기 위해 대가를 지불한 적도, 그래서 가져 본 적도 없다.
 
1980년대 한국 사회는 주체(북에서 말하는 주체가 아니다. 자기 검열에 엄격해지는 요즘이 너무 서글프다)와 변혁의
열병을 앓았고, 그 열기가 식자마자 잔치가 끝났다는 탄식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휘둘렸다.
그러한 급격한 변신이 놀랍고 우스꽝스러웠다.
물론 당시 한국 사회에 넘쳐나던 교조주의와 모든 사상을 하나의 정치적 강령으로 해석해버리는 경직성의 반작용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변신이 느닷없기는 했다.
내가 보기에 대안 모색에 성실했던 소수를 제외하고는 겉멋에 휘둘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모더니즘에 대한 정확한 규정 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 하는 것이 얼마나 황당하던지.
모더니즘을 규정하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단일화된 규정을 할 수도 없고.
주체적인 자의식이 없기는 배운 놈이나 못 배운 놈이나 다를 바 없다.
사실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주도한 사람들이 너무나 부럽다.
조상들이 피 흘린 대지 위에서 그들은 당당하게 조상들이 힘겹게 쌓은 근대적 인간성, 혹은 이미 또 다른 우상이
되어버린 독단적 이성을 해체하고 모든 것을 새로운 판 위에서 다시 짜기 위해 모색하고 사유하는 호사를
마음껏 누렸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말과 어휘와 행동은 당당하게 빛을 내고 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대중은 그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조상의 은덕을 바탕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 하는 판에 끼어들어 우리도 그러한 전통과 권리가
있는체하며 끼어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 공부가 일천해서 푸코와 들뢰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수용하지 못해 빚어내는 용렬함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말은 우리 한국 사회에서 아직 너무 멀고 낯설다.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해체 하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가져본 적 자체가 없다.
그런 상태에서 무엇으로부터의 탈주이고, 무엇으로의 질주인가?  
내심을 말하자면 이 또한 부러운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타자와의 끊임 없는 상호 인정투쟁을 통해 스스로를 확립하고 주체로서의 자기 의식으로
실존적 결단을 내리며, 자유를 위해 존재의 모든 것을 거는 용기와 승리의 쾌감을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탈주와 질주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잔인한 일이다.
나에게는 오히려 바리케이트 앞에 선 사르트르가 절실하다.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18세기와 19세기 조선 지성의 궤적과 그것의 물질적 토대를 공부하려 한다.
한국 사회가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 결여하고 있는 것을 찾기 위해서다.
고미숙 선생님의 도움이 절실한 부분이다.
동시에 서구인들이 걸었던 그 험난했던 길을 다시 걸어보고 싶어졌다.
정작 한국사회에 필요한 양식이 그 길섶마다에 숨겨져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시대착오적인 복고주의자가 된 듯도 하지만 현재의 잘못을 발견했다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가 원점에서 그 원인을 찾아 올라오는 것도 지혜의 한 방편이라 생각한다.
 
잡설이 길어졌다.
왠 듣보잡것이 사설을 이렇게 길게 늘어놓나 하고 질책하지 마시기를.
점점 갈수록 글이 짧아질 것이다. 그리고 곧 한솥밥을 먹는 식구가 될지도 모르지 않는가?
이 글을 끝까지 머리를 끄덕이며 읽어주신 분이 혹시라도 있다면 술 한 잔 사고 싶다.
연락만 주시라. 술을 위해서는 불원천리다.
정말로 술 한 잔 마시기 위해 서울 올라간 것이 여러 번이다.
상대방이 갑자기 펑크를 내는 바람에 혼자 술 마시고 내려온 적도 있다.
댓글로 연락 주셔도 무방하다.
한 가지 께름칙한 것이 감이당과 접속하고자 하는 인간이 푸코와 들뢰즈를 들먹였다는 점이다.
문전박대의 핑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 맥락이 맞는 질책은 내가 바라는 바이다.
올바른 충고는 한고조 유방만큼이나 즉각적으로 잘 받아들이는 게 내 장점이다.
대신 국량이 비좁기로도 유명하니 너무 가혹하게는 하지 마시길.
 
추후로 근대적 인간성에 대해 능력이 닿는 대로 글을 올릴 생각이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서구 지성사, 혹은 혁명사는 사마천의 사기보다 더 유익하고 치열하며 재미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들은 지성과 실천과 물질적 부의 흐름이 긴밀하고 역동적으로 함께 움직였다. 부럽고도 부러운 일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단초나 단서가 없나 열심히 찾아봐야 겠다
 
 
 
 
 
 
  
 
댓글목록

봄날님의 댓글

봄날 작성일

내공이 대단하신 분입니다, 밥벌이외의 공부를 이렇게 넓고 깊게 하시다니.....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 ^*^ ()

우공이산님의 댓글

우공이산 댓글의 댓글 작성일

우선 칭찬은 달게 받겠습니다.
잡다한 공부를 정리 정돈할 때가 된 것 같아 조바심만 준동하는 요즘입니다.

우공이산님의 댓글

우공이산 작성일

초장부터 이런 민폐를 끼치다니.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감이당님의 댓글

감이당 작성일

안녕하세요. 감이당입니다. 글을 <감성에세이> 게시판에 올려놓으셨기에 자유게시판으로 옮겨놓았습니다. 현재 <감성에세이> 게시판은 <감이당 대중지성>에서 같이 공부하고 있는 학인들의 글을 올리는 게시판으로 용도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 점은 내부방침이므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양력 2024.5.12 일요일
(음력 202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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