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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易理와 서양 辨證法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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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공이산 작성일13-11-01 18:25 조회4,035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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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규정은 곧 부정(否定)이다."
 
규정과 부정의 동시성과 양면성을 간파한 스피노자의 간명한 이 명제는 동, 서양의 지혜를 꿰뚫는 철리(哲理)다.
앞으로의 논증을 위해 이 명제를 변증법적으로 조금 변형시켜보자.
"모든 존재는 自體 내에 부정성으로서의 모순을 갖는다."
이 명제는 서양 철학의 존재론과 인식론, 논리학의 한 축을 이루는 변증법적 추론의 핵심 명제다.
이제 이 명제가 어떻게 동양의 역리와 만나는가를 살펴보자.
 
나는 상수학과 주역 공부를 시작할 때 동양의 우주관이 '一者로서의 道'를 중심으로 조화와 질서의 바탕 위에서 구축되어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 했었다.
중국과 한국의 철학(인도 철학은 또 다른 논리와 체계를 갖는다)은 서양 철학과는 달리 인식론과 존재론에 대한 논의에 처음부터 윤리학과 미학이 개입하며 궁극적으로 그 논의의 정점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실천이성을 중심으로 순수이성과 판단력에 대한 논의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양의 철학에서는 當爲에 대한 실천적 요청과 美는 분리될 수 없고,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인식에도 당위가 결여될 수 없으며,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법칙 위에도 당위가 군림하게 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비판이 시종일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주의 운행은 조화와 질서의 원리에 따르고 그 산물인 자연은 평화와 균형을 근본 성정으로 삼는데, 유독 인간 사회만이 무절제한 사리사욕 때문에 길흉화복의 기복과 정의와 불의의 파행이 점철되는 것이다."
만약에 그 간단 없는 기복과 파행이 인간 사회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이라면 성인들의 말씀대로 인간의 본성은 본디 우주와 자연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니 부단한 교육과 수행 정진을 통해 본성을 회복하면 된다.
그런데 공부가 진행될수록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懷疑가 고개를 들었다.
음양 오행론과 오운육기론을 공부하다 보니 이 우주 자체가 제 각각의 太過不及에 따른 不平之氣로 운행되고 있었다.
五行이라는 말 자체가 그 행로가 순탄하지 않고 기복이 심하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음양 사행이 아니라 오행이 된 것부터가 未土(十土)가 개입될 수 밖에 없는 치열한 대립과 투쟁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며, 行字의 글 안에도 험난한 여정의 象이 숨어있다.
오운 육기론도 마찬가지다. 五運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운동의 象을 가지며, 육기론에서는 금화교역작용의 과도기적 존재 양식인 寅申相火가 끼어든 자체가 그러하다.
그렇다면 조화와 상생을 실현해야 할 생장수장(生長收藏)의 운동이 모순에 찬 굴신(屈伸)의 운동을 하게 되는 단서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 답과 질문이 주어지는 곳은 다름 아닌 우주 변화의 역원(力源)이라고 할 無極과 자기 외화의 과정에서 본질을 드러내는 太極인 바, 무극과 태극은 이미 자기 안에 자기 부정성으로서의 모순을 가지며, 이 점이 바로 동양의 역리와 서양의 변증법이 만나는 접점이 된다.
참고로 이후 우주의 외화작용과 내변작용의 원리에 적용할 서양 변증법적 논리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각양각색의 변증법적 논리가 출몰하지만 19세기 초 독일 관념론을 집대성한 '헤겔'의 철학 체계에서 그 개념과 논리 형식이 완성되는데, 그의 표현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자체내에 담지된 모순성과 부정성으로 인해 '외부로부터의 강요 없이' 타자를 산출하며 그 타자와 관계 맺는데 타자와의 관계 맺음은 자기 반성의 운동 과정이고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정립한다."는 것이다.
 
다시 동양 역리의 출발점이자 서양 변증법적 논리의 무대가 되는 무극과 태극으로 돌아가자.
무극과 태극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관계는 어떻게 자리매김 해야 하는가?
사실 무극은 실체적 개념이 아니다. 실체 개념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의 형식이 인식 조건으로 작동해야 하는데 무극은 이미 그런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무극에 대한 논의가 다양하게 진행되었고 특히, 태극과는 다른 무극의 존재론적 특성 때문에 무극은 논의 대상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道를 언어로 설명하면 이미 그것은 道가 아니라고 하듯이 무극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무극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사하는 언어 역시 인식 행위와 다름 없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 위에서 이루어지며 경험적 추론의 산물이자 사회적 합의체이기 때문이다.
直觀知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은 동양의 지혜가 언표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러나 公論을 위해 굳이 제한된 우리의 언어로 설명하자면 무극은 形이 배제된 象으로 설명될 수 있다. 무극이 태극과 구분되는 점이 이 부분이다. 무극과 태극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글자가 '極'인데, 이 극이라는 글자는 形을 산출하는 자기 외화 활동의 절정을 의미하므로 極 앞에 無가 붙은 무극은 形이 산출되는 외화 작용이 전혀 없는 것을 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무극을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상태와 과정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무극을 우주 변화의 실체가 아니라 우주 변화의 근원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무극을 좀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무극은 절대 無의 진공 상태도 아니며 혼돈과 알 수 없는 것들의 뒤죽박죽 상태도 아니다. 우주에는 절대 無도 존재하지 않고, 절대 有도 존재하지 않을뿐더러(절대 무와 절대 유를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율배반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혼돈이나 뒤죽박죽의 상태에 대한 언급은 이미 多者性과 順次性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宋代의 성리학은 무극을 어떤 동적인 것도 배제한 적막무짐(寂寞無朕)의 상태라고 말하였고, 一夫 선생은 우주 운동의 시작이자 끝으로서의 中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 문제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현대 물리학이 내세우는 빅뱅 이론을 예로 들어보자.
현대 물리학도 빅뱅 이전의 세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한다. 다만 어떤 조건이 조성되자 빅뱅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뿐이다. 그 조건의 구성이 무엇이고, 그 조건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빅뱅의 순간에 시간, 공간, 에너지, 물질이 형성되었다는 것인데, 시공간과 에너지, 물질이 없는 세계를 우리 인간들의 인식과 사유는 포착하지 못한다.
그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세계다. 빅뱅은 말 그대로 순식간에 일어났고 빅뱅의 순간으로부터 10억분의 1초만에 입자가 생겨났으며 1백만분의 1초만에 쿼크들의 결합에 의해 수많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만들어졌다.
비유하자면 태극이 시작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빅뱅 순간의 온도인 수십 兆에 달하는 절대온도와 10억분의 1초, 1백만분의 1초는 우리가 추상적으로 인식할 수는 있어도 경험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이다. 빅뱅 이론에 빗대자면 알 수 없는 빅뱅 직전의 상태가 무극에 해당하고 빅뱅의 순간부터 태극이 격발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게 알 수도 없고 언표될 수도 없는 무극이 어떻게 우주 변화의 본원이 되며, 태극의 모체가 될 수 있는가?
이제 무극의 상태와 태극으로의 전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변증법의 논리를 적용시켜보자.
앞에서 무극에 대한 설명 중의 하나로 '적막무짐'의 상태와 변화 본원으로서의 '中'을 말했는데 그 둘의 공통점은 자기 완결의 상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즉, 타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만족적이며 추상적인 통일을 달성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모든 동적인 것이 배제된 상태이며 中으로서 완벽한 균형을 이룬 순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자기 완결의 상태에 있는 무극이 어떻게 태극을 격발시키고 우주 변화의 力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데 여기에 동양 역리의 묘미와 변증법적 논리가 숨어 있다.
이러한 무극이 태극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극 그 자체에 내재한다. 먼저 무극에서 태극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말하자면 하나의 '실체로서의 무극'에서 다음 단계인 또 다른 하나의 '실체로서의 태극'으로 전이하는 것이 아니다. 과정과 상태로서의 무극은 태극으로 전이하는 것이 아니라, 극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추상적이며 즉자적인 통일의 상태를 이룬 무극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규정성 때문에 이미 그 속에 자신에 대한 부정성을 갖는다. 그 부정성이란 추상성에 대해서는 구체성으로, 무반성적인 것에 대해서는 관계에 대한 의욕으로, 통일에 대해서는 분열의 기미로 나타난다. 이런 분열의 기미는 바로 一陰 一陽의 기운이 서로 적대적인 모순 관계가 아닌 추상적인 동일성의 상태로 상호 교차하면서 태동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는 자신을 타자화(外化) 하는 운동은 일어나지 않고 단지 양적으로 내압(內壓)을 높여가는 과정이 진행될 뿐이다. 일음 일양의 운동이 상호 적대적인 모순의 대립관계를 형성하여 자기 외화에 이르는 것은 무극에서 태극으로의 전환 이후에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일음 일양의 운동은 태극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적이다. '太極生兩儀'라는 말도 있거니와, 공자와 주자도 一者인 태극에서 일음 일양 운동이 비롯되었다고 했으니, 무극에서 이미 두 기운이 태동하고 있었다는 말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공자를 비롯한 主流 유학자들은 언표될 수 없는 무극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명확하게 언표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류 유학자들의 입장이다. 한 가지 예로 공자가 제자들이 제기한 귀신의 존재에 대해서 그것은 논할 바가 못 된다고 대답한 것은 잘 알려진 바다. 이런 주류 유학의 입장 때문에 인격신인 조물주를 상정한 신학적 논의가 유학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神에 의해서든, 전설 속의 반고에 의해서든 외부에서 주어지는 '최초의 충격'이라고 할 수 있는 무극의 단계를 생략하고 논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한 두 번째 문제점은 일음 일양 운동이 무극의 상태에서도 과연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답하기 위해 우선 음과 양이라는 兩儀에 대한 正名 작업(개념 정립)이 이루어져야 한다. 음과 양은 별개의 실체가 아니며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생성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우주 안의 어떤 대상, 즉 그것이 존재이든 운동이든 음과 양의 기운은 형태를 달리하며 그 자체에 내재하는 바탕이자 기운이다. 거시적인 우주 존재와 운동에도 음양은 내재하며 미시적인 입자에도 음양은 공서하고 있다. 음양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음에는 양이 내재하며, 양에는 음이 내재한다. 純陰之氣나 純陽之氣는 우리의 추상적 사유에서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규정은 곧 부정이다."라는 명제가 동, 서양의 지혜를 꿰뚫는 哲理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면 무극이나 태극을 一者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극과 태극에 해당하는 一者에서 一이란 홀수 1이 아니라 2의 0승으로서의 1이라고 봐야 한다. 음과 양의 통일자로서의 一者인 것이다. 감성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도담'님의 글에도 이 부분이 적시되어 있으니 읽어 보시기 바란다. 그러므로 무극 단계에서도 태극 단계에서와는 발현 방식만 다른 뿐 일음 일양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굳이 무극을 태극과는 다른 것으로 분리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빅뱅 이론을 이야기 하면서 빅뱅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 조성의 문제를 제기하였었는데, 현대 물리학이 침묵하는 지점을 동양 역리는 무극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상수학의 역리로 설명하자면 무극은 태극을 준비하는 단계로서 '음작용이 극에 달한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외부로부터의 일격이 필요 없이 '양작용이 주를 이루는 태극 운동'의 출발을 가능하게 하는 단계로 무극 존재의 불가피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여기서 혹자는 질문할 것이다. 무극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고? 그에 대한 답이 내가 지금 이글을 쓰고 있는 이유다.
서구식 교육에 길들어진 우리의 인식체계 및 사유체계는 무의식적으로 단선적이며 직선적인 표상체계를 형성한다.
우주의 변화와 운동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최초의 출발점'과 '최종의 종착점'을 직선적인 표상 안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동양의 표상 체계가 원환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무극과 태극의 운동에서 태초의 시원을 찾아 헤매곤 한다. 그러나 동양의 역리에는 신의 개입이 요청되는 태초의 출발점이란 없다. 무극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는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무극은 태극 운동의 완성에서 생겨난다. 상수학적 역리로 말하자면 태극 운동의 정점이자 새로운 출발점이 되는 一水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 무극이다. 존재론적으로 보면 一水이고,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二火의 운동을 시작하는 자리이며, 卦로 보면 坎爲水의 坎卦 자리를 만드는 것이 무극인데 결국 이것은 태극운동의 결과인 것이다. 이 부분을 좀 더 상세히 설명하기 위해 '皇極'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너무 길어질 것이므로 다음으로 미룬다.
분별하고 규정하는 서구의 인식 체계로는 순환론적 오류라고 지적할 만한 이 부분이 동양 역리의 핵심이며 변증법적 논리가 생동하는 곳이다. 서구에서 변증법이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학문 체계가 되지 못하고 찬밥 신세가 되어 하나의 방법론에 머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것이면서 동시에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서구의 주류 인식 체계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동양의 圓環論的 세계관인 역리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빅뱅 이전에도 수많은, 그리고 다양한 빅뱅이 있었다. 이처럼 신의 일격을 대신한 무극과 一者의 본격적인 자기 외화가 실현되는 태극 운동은 우주 변화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두 가지 축이다. 무극에서의 추상적이고 무반성적인 모순은 일정한 압력에 달해 태극으로 자체 전환되고 태극 운동은 본격적인 모순의 발현으로 자기 외화를 실현하여 타자를 산출하며, 그 타자와 관계 맺는 과정에서 태과불급을 동반한 갈등과 대립의 양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태극은 이러한 험난하고도 굴곡 심한 분열과 통일의 과정을 거쳐야만 무극의 추상적인 통일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자기를 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주 역시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자신의 정립(인간에게는 공부이자 노동이며 사랑이다)을 쟁취하는 운동을 쉬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결코 순조롭지도, 평화롭지도, 호의적이지도 않은 이유다. 여기서 정작 우리가 간취해야 할 지혜는 이 우주의 운동에는 어떤 의도도, 목적도, 절대자의 奸智도 없다는 것이다. 단지,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모든 존재에 내재하는 모순과 자기부정성으로 인해 우리는 타자와 관계 맺는 행위로서의 반성과 자기 정립을 위한 삶을 멈추지 못할 뿐이다.
 
조화롭고 질서 잡힌 우주 운동이 익숙한 나에게 이렇게 순탄치 않고 굴곡 심한 우주 변화 운동의 양상이 처음에는 낯설었다. 그런 것은 사리사욕이 판 치는 인간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더 공부를 진행하면서 낯설었던 것들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토록 직관적이면서도 논리적이고, 거시적이면서도 精緻한 우주론이 있다는 것이 정말 놀라왔다. 라이프니쯔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서구인들이 주역에 심취했었다는 것은 그만한 근거와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공자의 말씀처럼 좀 더 일찍 발견하고 시작하지 못한 것이 한이다.
 
이 글을 시작할 때 정작 쓰고 싶었던 이야기는 우주 운동과 우리 삶의 치열한 격전지인 금화교역과 인신상화 부분이었다. 이 부분은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갈등과 대립의 근원인 '私的 所有'의 문제를 설명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七火가 자신이 충분히 극하는 九金에게 도리어 주도권을 넘겨주어야 하는 이 상황은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교훈적이다.
끝으로 조선의 연암과 다산이 살았던 시대에 독일에서 근대 사회 형성을 주도했던 교양인이자 작가인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했던 말을 달아둔다.
 
"여보게,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라네."
 
  
 
 
 
댓글목록

명도님의 댓글

명도 작성일

우공님 안녕하세요~ 사주가 여기 이일이고 역마살이이 또 이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진리 실상 진여라 합니다. 음양오행이 지배하는게 여기이고 지수화풍 사대가 다 여기에서 시작합니다. 이건 시작도 없고 끝이 없습니다.
시작이 이일이고 끝이 이일입니다.책 첫페이지와 끝페이지가 다르지 않아요. 항상 이일입니다. 일반책은 다 읽어야 하지만 이건 첫페이지 아니, 제목에서 끝이 납니다. 하루 24시간, 1년 365일...항상 이것 뿐입니다.

명도님의 댓글

명도 작성일

글 보낸 시간이 새벽인데.. 이사를?  바쁘신 모양입니다 ㅎ 프랑스의 사르트르, 알제리 출신의 알베르.카뮈, 독일의 괴테 전부 대단한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들 모두가 다 여기에 있지요 ㅎ 나하고, 아니 우리하고 같이 존재합니다. 무엇이 진리입니까? - 오늘은 좀 추우면서도 나들이 가기 좋은 날입니다. / 무엇이 법입니까? - 괴테의 파우스트가 참 재미있습니다.

우공이산님의 댓글

우공이산 댓글의 댓글 작성일

예. 사주에 있는 역마살이 작동을 멈추지 않는군요. 이사라는 게 원체 계획과 예상을 뒤집는 일이 다반사라 이제 겨우 정리가 되는 군요.  괴테는 자기 능력도 출중했지만 시대와의 불화를 겪지 않은 것이 큰 행운이었죠 .
능력 있는 사람일수록 시대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이 조선의 인물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점입니다.

우공이산님의 댓글

우공이산 작성일

안녕하세요. 명도님. 지금 이사 중이라 답글이 늦었습니다. 괴테. 괜찮은 사람이죠.
명도님 글 항시 잘 보고 있습니다.
.

명도님의 댓글

명도 작성일

반갑습니다~ 괴테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래서 옛날 누가 도가 무엇인가요? 하니 조주선사가 <뜰앞의 잣나무다>라 했을까요. ㅎㅎ 통하면 <뜰뒤의 소나무다>라고 해도 똑같습니다.
주역의 64괘가 여기오면 다 똑같네요.  화엄경의 선재동자가 찾아간 53 선지식이 전부 같은 사람이고 <팔만대장경>의 글귀가 心자 한 글자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