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80 고전학교 시즌3] 이반 일리치 강의, 발제/ 박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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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니맘 작성일23-08-27 08:00 조회101회 댓글0건본문
2020년 초부터 3년이 넘게 코로나19 라는 전대미문의 경험을 했다. 얼마 전에 하와이와 캐나다의 산불로 인한 대재앙 앞에서 네메시스 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자연의복수!!!!! 1970년대, 지금으로부터 무려 50여년 전에 이런 사태에 대해 경고 하셨던 분이 있었다. 그 분이 이반 일리치 이다. 지난 3월 감이당에서 공부 하면서 처음 알게 된 인물이다. 이반 일리치는 192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어머니가 유대인이었던 이유로 중부 유럽을 떠돌면서 살아야 했다. 이탈리아에서 화학, 신학, 역사학 분야에서 학위를 받았다. 1951년 로마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나 1969년 사제직을 버리고 현대 문명에 근원적 도전을 던지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말년에는 암 진단을 받았으나 현대식 의료를 거부 했다. 2002년 12월 2일 독일 브레멘 에서 생을 마감 했다.
70년대라고 하면 우리는 경제 성장과 개발이라는 말이 귀에 박히도록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반 일리치는 1973년에 [성장을 멈춰라] 라는 책을 발간 한다. 그 책에서 그는 그때까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술, 성장, 개발 등에 대해 문제 의식을 제기 했다. 지금까지 당연 하다고 생각 했던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점에서 일리치는 낯선 단어를 사용 한다.
“도구” 라는 개념을 들고 나오는데, 기계, 기술, 테크놀로지, 장치, 제도 등을 포괄 하는 단어이다. 이런 도구들의 성격 자체가 어느 시점이 지나면 삶의 편리성을 증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억압 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도구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며, 도구의 규모와 속도가 인간의 삶을 억압 하며 무력 하게 하고 제도가 가치를 왜곡 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일리치는 공생적 도구와 조작적 도구 라는 개념을 도입 한다. 공생적 도구는 생산성을 높이고 삶의 질을 개선 해 주며 사람과 환경 사이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상호 작용을 뜻하는 말이다. 한편 조작적 도구라 함은 익숙함과 편함에 중독 되어 어느 한계를 넘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 버린 것을 말한다. 조작이라고 하는 건 삶의 물리적 측면 뿐 아니라 욕망까지도 포함 한다. 전문가와 정책 당국자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사회적 표준에 입각 해서 사는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의 삶을 살기 위한 도구를 함께 만들어야 공생적이고 자율적인 삶이 가능 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도구를 우리가 재배치, 재구도화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리치가 얘기 하는 좋은 삶으로 “버내큘러” “커먼” 이라는 개념을 소개 한다. 버내큘러(vernacular) 라는 단어가 의미 하는 것은 사회적 명령과는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을 의미 하는데, 돈을 쫓는 일이 아니라 기쁨과 보람을 주는 일을 찾고, 기존의 직장에 취직 하려고 애쓰는 대신 새로운 일을 창조 하고, 쇼핑과 여행보다 산책 하고 사색 하는 삶을 기꺼이 선택 하는 것. 커먼(common)이라는 단어는 자기 소유는 아니지만 함께 쉴 수 있는 공용 공간이다. 환경이 이제 커먼이 아니라 부가가치를 창출 할 수 있는 자원이 되어 버리는데, 미래 대안 사회를 위해서 남아 있는 커먼을 방어 해야 하고, 나아가 새로운 커먼을 창조 해야 한다고 한다. 도시 안의 녹지, 임노동이 아닌 상태의 협동조합, 대중 지성들이 함께 모여 지식을 생산 하고 순환 시킬 수 있는 인문학 공동체 등이 더 많이 다양하게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교육제도와 의료제도인 학교와 병원을 지적 했다. 일리치는 학교와 병원이 다 필요 없다고 얘기 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가 고안한 서비스를 사용 하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 하는 것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함으로써 자율적으로 자신을 돌보는 능력을 회복 하여 관료화 된 교육제도와 의료제도로부터 자기 몸에 대한 권력을 되찾아 와야 한다는 것이다. 일리치는 평생 자율적인 인간으로 살기를 원했으며 동시에 이웃을 환대 하고 그들과 함께 사는 삶을 꿈꾸고 실험 했다.
일리치의 얘기가 많은 부분이 타당 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자연의 복수가 시작 된 이 시점에 무엇부터 고쳐 나가야 할 지 아득하기만 하다. 그러나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말처럼 “한치 앞이 내다 보이지 않을 때도 한발을 떼는 것, 희망이 있다고 믿는 것이 정치적 행동이다” 라고 했는데, 그 한발을 떼는 것이 무엇 일까? 함께 논의 해 보아야 할 일이 아닐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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