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기 3주차-신지학 세미나와 비폭력저항 세미나 후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멍뚱깽 작성일24-10-09 14:19 조회37회 댓글0건본문
<1,2교시>황금사슬을 잇는 환생의 매커니즘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으로 나의 모든 것이 끝난다는 두려움과 아쉬움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죽음은 삶의 한 과정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육체는 없어지지만 정신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신지학에서는 몸, 혼, 영이 인간의 본질이라 이야기하는데, 혼은 몸과 영 사이를 오가며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근대교육을 받고 자라온 우리에게는 낯선 이야기이지만, 이러한 사유는 근대문명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하는데, 고대 지혜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책에서 제시하는 환생의 근거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같은 환경에서 성장한 개개인들의 극심한 차이들, 심지어 같은 부모 유전자를 받았음에도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출몰하는 천재들의 무수한 사례가 그 증거라고 한다.
환생이 수긍이 가는 과학적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에게 다음 생의 찬스가 있다는 생각에 다소 안심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현생에서 이루지 않으면 큰일날 것 같던 온갖 욕망들이 부질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신지학에서는 환생을 통해 혼의 정신적 도덕적 역량이 증가되면서 진화한다고 하는데, 수억겁의 생을 반복하다보면,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나의 혼도 보다 성숙해질 기회를 만날 것이다. 우리 존재는 삶과 죽음을 잇는 황금사슬로 이어져 있어서, 과거의 나의 기억은 어딘가에 저장이 되어 있어 같은 악업을 반복하지 않는 안전장치가 되어주고, 죽음은 소멸이 아니고 혼을 정화시켜주는 과정이 되어준다. 반면 우리가 쌓은 악업 또한 분명히 우리에게 남아 다음 생에서 그것의 결과물을 낳게 한다. 그러니 현생에서 물질적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은, 나머지 생 전체를 오염시키는 일이 되며, 혼의 성장을 위한 선업을 쌓는 것 만이 현생의 유일한 목표이자 의미로 남는다.
한가지, 환생을 거듭하면서 모든 혼이 다 진화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불교의 육도윤회는 천도에서 지옥까지 오가며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말하는데, 그것을 벗어나는 열반을 최고 경지로 설정된 이유다. 이 대목에서 많은 학인들이, 지난주 곰샘 강의를 떠올렸다.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는 열반이라는 것이,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을 맞이하건 그 모든 조건을 긍정하는 것이라 하신 말씀이었다. 소연샘은 마하트마 간디가 생각났다고 했다. 함석헌샘의 글에서 말씀하신대로, 수십만 군중 앞에서 연설하며 마지막을 맞이했다해도, 간디가 남긴 말은 ‘오, 라마!’ 한마디로 압축될 수 있다고. 평생을 인도 민중들에게 바쳐진 삶, 육신을 떠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신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맡긴 그 순간이야말로 열반 아니겠냐고. 열반이란 ‘목표 달성’이 아니라 ‘생의 긍정’임을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 싶다.
한가지 더, 신지학의 시조 블라바츠키는 세계의 본질을 깨달은 이후 사회 봉사에 매진했고, 애니 베전트도 인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불교에서도 열반에 이른 이가 중생을 구하기 위해 돌아온다는 하는데, 깨달은 혼을 더 위대하게 만드는 대목이며, 모든 존재가 단일한 하나의 본성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신지학 사유와도 맞닿아 있다. 은미샘이 신비주의 전통의 믿음 하나를 이야기해줬는데, 스승들의 지혜나 지성을 어딘가에(?!) 숨겨놓으면, 준비된 제자가 그것을 찾아쓴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위대한 스승들의 지혜는 그의 죽음이나 열반 이후에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오랜 세월 중생에게 영향을 미친다. 시공간의 차이를 초월해 모든 존재를 연결하는 황금사슬로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 아닐까. 그래서 열반에 오른 자가 더 많은 연결을 위해 나서는 것 아닐까. 그런 면에서 3교시에 공부한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정의는 성숙한 혼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3교시-가장 낮은 자에게 기꺼이 바쳐진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간디>
우리는 사회주의자들과의 대화 속에 나타난 간디의 생각들을 읽었다. 글의 배경이 된 시점은 인도 독립 전후였다. 우리나라의 해방 전후를 떠올려보면, 온갖 종교, 온갖 이념, 온갖 종족 집단이 각자의 목소리를 분출하는 격변과 혼란이 연상된다. 게다가 사회주의집단은 그중에서도 가장 목소리가 크고, 정교한 논리로 무장해서 쉽지 않은 상대였을 것 같다. 그러나 간디는 그런 상대 앞에서 너무나 심플하고 담백하게, 그리고 흔들림없이 이야기한다. 누구보다도 자신은 사회주의자라고 확신한다고.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의 폭력 홍호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고, 폭력 혁명과 국가의 통제가 만들어내는 평등사회의 취약함에 대해 역설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하인이 해주는대로 맡기지 말고 스스로 힘으로 생활해야하지 않겠냐고. 그리고 왜그렇게 파업을 많이 하고 피곤하게 사느냐고. 그리고 비폭력적 불복종의 힘을 묵묵히 보여준다.
당시 인도 사회주의자들에게, 간디는 정말 힘든 상대였을 것이다. 사회지도층이면서도 먼저 목소리 내기보다 고요히 들어주는 관대함, 기꺼이 가장 낮은 계층에 머물며 가장 간소한 일상을 수십년 다져온 단단함, 예리한 통찰과 지혜에 압도되었을 것이다. 학인들과 이야기하며 간디자서전을 떠올려보니, 간디는 먼저 소리내거나 화낸 적이 없었다. 영국유학을 반대하던 친척들, 남아공의 폭력, 온갖 전쟁들도 간디를 폭발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표현하며 고요히 상대를 설득한다. 이것이 어떻게 평범한 인간에게 가능한 것일까. 간디야말로 환생의 증거 아닐까. 혹시 붓다가 환생한 분 아닐까 반은 농담삼아 이야기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신지학의 이야기 하나를 다시 떠올려보자. 환생의 기억을 우리는 잃어버렸지만 어딘가에 있다. 스승들의 지혜도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영향 받는다. 금아샘은 ‘내 생각은 나의 것이 아니다’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존재 자체가, 물론 모든 악업의 결과물들과 함께, 스승의 지혜들 또한 구성한 것 아닐까. 우리가 그것을 기억해내거나 보지 못할뿐. 그렇다면 내 자아의 욕망에만 사로잡히는 것은 정말 무지의 소산이 아닐 수 없고, 우리가 이번 생에 만난 모든 인연 조건들을 부정하거나 한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만났던, 원망하거나 분노했던 사건들을 떠올려본다. 점점 그것을 한탄할 이유를 찾기 어려워진다. 그 사건들로 인해 내가 배우고 꺠닫고 성찰했던 시간들을 떠올려볼 때, 그것은 감사한 인연이기도 했다.
끝없이 죽음과 삶을 반복하며 혼의 진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죽음도 환생도, 다음 생의 어떤 인연 조건들도 모두 감사하고 긍정해야할 황금 사슬의 한 고리일 뿐이다. 그 사실을 잊지않고 만나는 인연마다 긍정하는 지혜를 배워가는 것, 아마도 그것이 자기 구원의 시작 아닐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