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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주차 - 톨스토이, 신념에 기반한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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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비 작성일24-08-22 21:28 조회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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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는 기독교가 본래 혁신적이고 자유로운 인생관을 제시하며, 사랑과 평화를 중심으로 한 진정한 기독교적 가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이러한 기독교의 본질이 변질되었고, 국가주의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변모했습니다. 이에 따라 많은 러시아인들이 진정한 기독교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독교가 강제적으로 도입되면서 인민들의 생활을 크게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상황을 비판하며, 진정한 기독교는 민간 신앙으로서 사랑과 평화의 종교로 퍼져 나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특히 러시아 농민들이 지닌 자유롭고 고차원적인 인생관을 받아들여, 이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간디의 사상과도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삶의 실천을 통해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점에서 특히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절제된 생활과 사치스러운 문화를 비판하며, 러시아 사람들이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지적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 사회와 이슬람 세계의 종교적 문화에 대한 비교도 이루어졌습니다. 러시아는 보드카와 같은 사치품이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반면, 이슬람 사회는 금욕적인 생활방식과 종교적 실천을 통해 삶을 지배합니다. 이슬람 신자들은 하루 다섯 번 기도를 통해 종교적 의무를 다하며, 사치나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와 신의 명령을 중시하는 생활방식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전쟁, 파괴적인 상상물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전쟁 뉴스는 단순한 소식 그 이상이다. 전쟁은 정치적 도구나 국가 간의 분쟁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낸 가장 파괴적인 상상물이다. 나는 오랫동안 전쟁을 국가의 필연적인 결과로 보았다. 과거의 국가들은 생존을 위해 전쟁을 피할 수 없었고, 현대에도 전쟁은 국가의 필요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나의 생각은 완전히 바뀌었다. 전쟁이란 것이 필연적이라기보다는 정신 이상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윤 대통령의 최근 연설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북한과의 전쟁 가능성을 강조하며, 반국가 세력을 처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연설은 마치 전쟁이 곧 다가올 필연적 사건인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이 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인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국가 간의 갈등을 넘어, 국가라는 상상의 산물이 만들어낸 정신 이상으로 보였다.


국가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국가의 개념은 불과 몇 세기 전에 만들어졌다. 영토, 국민, 주권이라는 개념도 17세기, 18세기에야 등장했다. 이는 곧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의 복합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상상의 산물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키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보며, 나는 이 상상적인 논리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넓은 러시아 땅을 조금씩 점령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이야말로 정신 이상자의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크라이나 내에서도 전쟁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있다. 처음에는 젤렌스키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왜 이렇게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국민의 절반이 전쟁을 그만두자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젤렌스키는 계속해서 전쟁을 고집하고 있다. 전쟁이 처음부터 우크라이나의 의지가 아닌, 외부의 강요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미국의 무기 지원과 전쟁 조장이 과연 우크라이나 국민을 위한 것이었을까?

이러한 생각을 하다 보면, 우리의 인생관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제자리를 걷게 될 것이라는 깨달음이 든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전쟁 영화를 보며 전쟁을 당연시해 왔다. 폭력적인 정의의 행사조차도 정당화하는 문화를 받아들이며 자라온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정의란 폭력으로 실현될 수 없다. 이는 과거 간디가 주창한 비폭력 저항의 정신에서도 드러난다.

이와 관련하여,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을 떠올리게 된다. 시아파의 시조로 여겨지는 알리의 죽음은 단순한 권력 투쟁의 결과가 아니다. 알리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무저항으로 메카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했다. 이는 폭력에 대한 저항이 아닌, 순수한 정신의 승리였다. 이 죽음은 시아파의 서사시가 되었고, 종교적 탄생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는 미션 영화에서 신부님의 죽음과도 닮아 있다. 어떻게 죽었느냐가 그 이후의 역사를 결정짓는 것이다.

 

신념에 기반한 저항

우리가 순교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순교는 단순한 죽음이 아닌, 종교나 신념을 위한 고귀한 희생을 의미한다. 순교는 종교나 사상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해왔다. 기독교 역사에서 순교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들은 그들의 죽음을 통해 신앙을 증명했으며,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념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톨스토이는 저항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순교가 인간의 정신적 상상력과 신념을 각인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본다. 순교는 개인의 영혼이 인간성을 뛰어넘어 어디까지 위대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이다.

톨스토이는 이 점에서 단순한 저항이 아닌, 진정한 신념에 기반한 저항을 주장한다. 비록 저항이 때로는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이는 여론을 형성하고 더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는 기독교의 순교자들이 그들의 희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규합했던 것처럼, 신념을 가진 자들의 저항이 결국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톨스토이의 신념은 단지 과거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저항과 희생을 통해 변화와 진보를 이끌어내고 있다. 톨스토이는 국가와 종교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지배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며, 그는 단순히 국가나 종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인간성을 어떻게 훼손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고 있다.

특히, 톨스토이가 주장하는 국가에 대한 반감은 당시 러시아의 독재적인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그는 국가가 농민들을 착취하고, 전쟁을 위해 사람들을 강제로 동원하는 것을 비판하며, 국가의 폭력이 어떻게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지 설명한다. 이와 같은 폭력적인 국가에 대한 반감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주제로 남아 있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와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가 권력의 폭력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

 

 국가와 시스템에 대한 깊은 회의 

그러나 톨스토이의 주장은 단순히 국가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사회가 점점 더 안전해지고, 폭력이 감소하는 과정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이 시스템에 의존하는 경향을 경고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디지털 기술과 시스템에 의존하며 살아가지만, 이러한 의존이 때로는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고, 문제 해결의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작은 실수나 부주의가 우리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으며,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와 시스템은 우리 삶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과 국가의 존재는 언제나 우리에게 유익한 것일까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요?

고전 문학과 철학자들의 논의 속에서 우리는 자주 인간 본연의 힘과 자연으로의 회귀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를 들어, 소로는 숲에서의 자급자족 생활을 통해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힘을 깨닫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병에 걸리거나 극한 상황에 처해야만 겨우 그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하고 모든 것을 가진 상태에서 그러한 삶을 선택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톨스토이 역시 국가와 시스템에 대한 깊은 회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국가가 시스템을 구축하고 유지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는지를 통찰하며, 그러한 시스템이 진정으로 우리를 보호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던졌습니다. 전쟁에 나가 총을 드는 행위조차 국가의 명령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되지만, 이는 과연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것일까요? 국가를 위해 동포를 쏘아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또한,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치안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국가의 기능은 분명 중요한 부분이지만, 이는 결국 선택의 문제일 뿐입니다. 특히, 사회적 약자나 어린이들, 장애인들이 이러한 폭력에 대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가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필요해 보입니다. 그러나 국가가 아닌 다른 시스템이 이 역할을 대체할 수 있을까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절대악에 직면하게 됩니다. 뉴스에서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끔찍한 사건들이 보도되며, 이러한 악에 대한 정의는 톨스토이의 시대와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이는 우리가 국가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해방으로 이어졌지만, 그 과정에서 무국적자가 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은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국가가 없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그들은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채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결국 시스템의 바깥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러시아 역사 속에서, 몽골의 지배 아래 250년간 고통받았던 러시아인들이 짜르의 강력한 통치를 통해 독립을 이루었을 때,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국가가 다시 태어난 것처럼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상상 속의 설정일 뿐, 실제로는 이전의 억압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시스템과 국가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상상의 국가관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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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 1차 세계대전에 수백만의 청년들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들의 죽음은 한낱 숫자로만 취급받을 뿐이다. 애국심에 들떠 참가했던 나는 결국 친구들과 전우들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다. 적국도 나와 같은 사람인데 왜 죽여야 하는 것일까? 국가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아니다. 장군들의 야심 찬 전략과 자존심 때문에 수많은 청년들이 희생되었다. 죽지 않아도 될 청년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날 보고서는 "서부 전선 이상 없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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