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3학기8주 - 무감각 속에서 깨어나기: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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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비 작성일24-08-28 08:59 조회22회 댓글0건본문
감이당 화요대중 지성 /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 202408
시스템과 개인의 도덕적 의식
현대 사회에서 평화는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우리는 타국의 전쟁이나 민족 문제에 대해 무감각하게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무감각은 심지어 우리 역사 속의 5.18 민주화 운동이나 제주 4.3 사건 같은 사건들에도 적용되곤 합니다. 고통에 무감각한 태도는 인간 본성에 어긋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상태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이는 어떤 면에서 하나의 최면 상태와도 같으며, 이로 인해 우리는 도덕적 정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러한 무감각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전체주의적 사상과 이념은 인간적인 관계와 도덕을 덮어버릴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사상 검증을 위한 인민재판과 같은 비인간적인 행위들이 자행되었으며, 이는 단지 북한이나 중국 공산당의 문제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과거 중동이나 유럽에서도 존재했던 일이며, 심지어 우리나라에서도 군대 내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편리한 시스템과 쾌락에 길들여져 이러한 폭력의 이면을 쉽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우리는 현재 평화로운 시기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과 쾌락은 사실 폭력을 감추고 있는 장치일 수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논리적으로 이것이 옳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무감각 속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하는 것을 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와 같은 작가는 인간이 양심의 목소리를 잠재우는 수단으로 술이나 마약 등을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는 인간 본성의 자유와 반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항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조직적인 반항은 또 다른 명령 체계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토스토이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반항(저항)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이는 비록 미약하고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지만,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사회의 도덕적 딜레마는 영화나 문학 작품에서도 자주 다뤄집니다. 예를 들어, '박하사탕'과 같은 영화는 순수했던 청년이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어떻게 불균형에 빠지고,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그립니다. 이러한 불균형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뿐만 아니라 개인의 도덕적 혼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결국, 사회적 시스템과 개인의 도덕적 의식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갖추더라도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개인의 도덕적 각성이 없는 한,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문제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자신을 지배하는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는 결국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대됩니다.
저항의 실천적 측면
비폭력 무저항과 불복종은 유사한 개념으로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비폭력은 폭력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며, 이는 물리적 힘이나 강압에 맞서 싸우지 않고 평화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반면, 불복종은 도덕적 이유로 권위에 저항하는 행위를 뜻한다. 이는 부당한 법이나 규칙에 따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행위이다.
간디의 사상은 이러한 불복종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부당한 상황에서 저항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보았으며, 자아의 본성과 인간애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불복종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는 저항할 때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말 것을 권장했으며, 필요하다면 희생을 감수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비폭력 무저항 사상은 인간의 존엄성과 도덕성을 지키기 위한 강력한 도구로 여겨졌다.
그러나 비폭력 무저항이 실제로 얼마나 실현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경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폭력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악의 순환을 멈출 수 있는 방법으로 간디가 강조했지만, 이는 매우 어려운 선택이다. 폭력을 받더라도 저항하지 말라는 간디의 주장은 인간 본성에 반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무저항의 실천이야말로 진정한 도덕적 우위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간디와 톨스토이는 비폭력의 중요성에 대해 공통된 신념을 가졌지만, 그들의 접근 방식은 달랐다. 톨스토이는 문학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며 도덕적 질문을 던졌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글로 풀어내어, 독자들에게 인간 본성과 도덕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반면, 간디는 행동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며, 사회적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비난받더라도 신념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차이는 톨스토이가 정치적 실천보다 도덕적 질문을 중요시 여긴 것과, 간디가 사회적 실천을 통해 변화를 이루고자 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현대 사회에서 비폭력과 도덕은 여전히 중요한 화두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의료 시스템에서 의사들이 돈을 목적으로 일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 고민이 제기되곤 한다. 공부를 하고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의사가 되는 것은 숭고한 뜻이라기보다는, 안정적이고 돈을 많이 버는 일명 '성공한 직업'을 추구한 결과이다. 20년간 돈이 성공이고 공부가 성공의 길이라고 길들여진 그들에게, 돈도 벌지 못하는 곳에서 일하라고 하면 좋아하겠는가? 이들은 사회가 길러낸 우리 시대의 거울이다. '성공'이라는 미신에 매몰되어 있는 사회에서 길러진 사람이 그 외의 다른 곳에서 의미를 찾기란 쉽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도덕적 기준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충돌할 때, 그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게 된다. 이러한 현실은 비폭력주의가 단순히 이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천하기에 매우 복잡한 윤리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톨스토이와 동양 사상의 만남
톨스토이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토대로 현대 문명을 비판하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탐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을 직시하고, 사랑과 도덕의 가치를 되새기는 것에 중심을 둔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단순히 기독교적 교훈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도덕성과 윤리를 탐구하며, 이를 통해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삶의 가치를 제시하려 했다.
현대 문명은 개인의 욕망과 물질적 가치에 치우쳐, 본래의 인간성을 잃어가고 있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상황을 깊이 비판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인간 본연의 선함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글은 단순히 기독교적 도덕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윤리에 대한 깊은 고찰을 담고 있다.
특히 톨스토이의 사상은 동양 철학과도 교차점을 찾을 수 있다. 동양 철학은 자연의 이치와 조화를 중시하며, 인간의 도덕성을 본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이러한 관점은 톨스토이의 사상과도 맞닿아 있으며, 그는 동양 철학에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넘어선 더 깊은 도덕적 통찰을 발견하려 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여전히 톨스토이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과학과 합리주의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도 한계에 봉착한 지금, 우리는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서양 철학자들은 대안 모색에 있어 동양 사상으로 눈을 돌리기보다, 여전히 서구의 틀 안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톨스토이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을 갖는다. 현대 문명의 문제를 직시하고, 인간 본연의 도덕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의 사상은 동양 철학과 결합하여,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제, 서양과 동양의 지혜를 결합해 인간 본연의 선함과 도덕성을 되살려야 할 시점에 서 있다.

영화 <박하사탕>
그의 삶이 파괴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순수했던 청년이었던 그는 군에 입대하여 민간인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때부터였을까? 사회에 복귀하여 고문 경찰이 되면서부터였을까?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면 행복할 거라고 믿었던 순간부터였을까? 사업가로서 불륜을 저지르면서부터였을까? 삶이 파괴되어 지친 몸을 이끌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그는 과거로 돌아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그는 세상에 홀로 던져졌으나 아무도 그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위로 받을 수 없다. 그가 의지했던 사회도 국가도 가족도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통한의 외로움과 총 한자루뿐이다. 그럼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영화는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아니다. 중요한 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윤리를 세워야 한다. 남에게 휩쓸려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고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정당화했던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일까?
자신의 몸에 총을 겨누었을 때 희망처럼 찾아온 그녀와의 만남, 하지만 그녀는 이미 시한부였다. 의식이 없는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를 보고 싶어 했다. 순수했던 나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나는 도대체 누구였던 걸까? 지금 나의 삶도 기차가 달려오는 철길 위에 서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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