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3학기 - 망나니 귀족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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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비 작성일24-07-13 22:05 조회21회 댓글0건본문
감이당 화요대중지성 / 희진샘 강론 / 리라이팅 / 20240702
톨스토이의 마지막 여정
레프 톨스토이의 마지막 순간은 그의 삶처럼 극적이었다. 82세의 나이에 톨스토이는 가정 내의 갈등과 부인 소피아와의 불화로 인해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가 집을 떠난 주요 원인은 부인의 강한 집착과 재산 문제에 대한 갈등이었다.
톨스토이는 한 의사와 함께 몰래 가출을 감행했다. 그는 딸에게만 자신의 위치를 알리며, 추격을 피하기 위해 기차표를 여러 번 바꾸며 이동했다. 그러나 그의 가출 소식은 곧 발각되었고, 딸들과 소피아는 그의 뒤를 쫓았다. 결국 톨스토이는 여행 중 폐렴 증세로 쓰러져 작은 기차역인 아스타포보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아스타포보 기차역에서 톨스토이의 마지막 날들이 펼쳐졌다. 그는 병세가 악화되자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하고 소피아에게 오지 말라고 편지를 썼다. 그러나 소피아는 남편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기차역으로 달려갔다. 딸들과 가족들도 함께였다.
톨스토이는 기차역의 역장 집에서 지내며, 그의 병세는 날로 악화되었다. 그가 있는 곳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기자들, 종교인들, 그리고 그의 팬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영화 촬영 기술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톨스토이의 마지막 순간은 필름에 기록되기도 했다.
톨스토이가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소피아는 그를 마지막으로 보게 되었다. 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지만, 소피아는 남편의 손을 잡고 울며 그의 마지막을 지켰다. 톨스토이는 결국 1910년 11월 20일(구력 11월 7일) 아스타포보 기차역에서 세상을 떠났다.
러시아와 톨스토이: 문명, 신앙, 그리고 문학
레프 톨스토이, 그는 러시아 문학의 거장으로서,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와 유럽 문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36년, 러시아 예술이 처음으로 프랑스에 소개되기 시작했고, 이는 톨스토이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유럽에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프랑스의 출판사들은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의 번역서를 대량으로 출판하며 러시아 문학의 위상을 높였다. 프랑스의 작가 로맹 롤랑도 톨스토이의 작품에 깊이 감동한 인물 중 하나였다.
톨스토이는 유년 시절, 상실과 슬픔 속에서 성장했다. 1828년 8월 28일, 넷째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가 그가 두 살도 되지 않았을 때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그가 아홉 살 때 사망했다. 다행히도 그의 곁에는 신앙심 깊은 다치아나 숙모와 알렉산드라 숙모가 있어 그에게 사랑과 신앙을 심어주었다.
톨스토이는 1844년에 카잔 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그는 법학과 동양어를 공부했지만, 학업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방황하는 시간을 보냈다. 학업에 몰두하기보다는 사교계에서의 생활과 다양한 유흥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그는 파티, 연회, 사냥, 도박 등 다양한 유흥 활동에 참여하며 시간을 보냈다.
도박은 톨스토이의 청년기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그는 도박에 빠져 많은 돈을 잃었고, 그로 인해 상당한 빚을 지게 되었다. 도박뿐만 아니라, 톨스토이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돈을 낭비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그에게 재정적인 어려움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그는 이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사회 구조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사교계에서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접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문학적 창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교계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의 삶과 행동, 인간 관계의 복잡성과 다양한 감정은 그의 작품 속에 생생하게 반영되었다. 그는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관찰하고 이를 작품 속에 녹여내며,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형성해 나갔다.
톨스토이의 방탕한 생활은 단순히 사교계와 유흥을 즐기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생활을 통해 인생의 허무함과 인간의 나약함을 경험했다. 방탕한 생활은 그에게 일종의 자기 반성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통해 그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깊은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고민은 그의 후기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철학적 사유와 깊은 인간 이해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장을 경영하며 민중과의 접촉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1851년, 그는 형 니콜라를 따라 입대하여 조용한 산골 생활을 하면서 신앙을 다시 발견했다. 이 시기, 그는 신과 악의 싸움을 통해 내적 갈등을 겪었으며, 이는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53년, 톨스토이는 터키와의 크림 전쟁에 참여하며 애국심을 발휘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전쟁의 참혹함과 무의미함을 깨닫게 했고, 이는 "세바스토폴 이야기"와 같은 작품에 반영되었다. 1855년, 톨스토이는 페테르스부르크로 돌아와 문학가들과 교류했지만, 이내 그들의 도덕적 타락에 실망하게 된다.
이후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다양한 사상가들과 교류한 그는, 파리에서 사형 집행을 목격한 뒤 선악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파리에서 여행 중에 우연히 사형 집행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그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고, 인간의 잔혹성과 생명 경시의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사형 제도가 인간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형 집행을 목격한 후, 톨스토이는 사형 제도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사형이 인간의 생명을 경시하고, 폭력과 복수심을 조장하는 잔혹한 행위라고 생각했다. 톨스토이는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생명을 앗아갈 권리가 없으며, 생명은 신성하고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톨스토이는 파리에서 사형 집행 광경을 목격한 경험을 통해 사형제도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톨스토이와 러시아 농민
러시아로 돌아온 톨스토이는 농민을 위한 일에 헌신하며 학교를 세우고 농업에 인간적인 정신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 끊임없는 내적 갈등이 존재했다. 쾌락과 금욕 사이에서 방황하던 그는 1862년 9월 23일, 17세의 소피아 베르스와 결혼하며 잠시 평온을 찾았다. 이 시기에 그는 "전쟁과 평화"를 집필하며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지만, 결혼 생활의 안락함 속에서도 불안을 느꼈다.
톨스토이의 이러한 내적 갈등은 "안나 카레니나"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사랑과 신의 법도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비극을 다룬 이 작품은 그의 심정을 잘 보여준다. 형의 죽음으로 방황하던 톨스토이는 육체 노동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았으며, "안나 카레니나"를 집필하며 자신을 재발견했다.
톨스토이는 단순한 민중의 삶 속에서 신앙을 다시 찾았다. 그는 교회에서 자신의 종교를 찾지 않고, 복음서에 의해 자신의 신앙을 세웠다. 1882년, 모스크바에서 인구 조사에 참여하며 대도시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한 그는 문명의 상처를 발견하고, 부자들, 국가, 교회, 학문과 예술 등 모두가 악의 근원임을 깨닫게 되었다.
러시아의 농민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귀족들도, 국민들도 알고 있었다. 농민들의 삶이 비참하다는 점을 톨스토이가 지속적으로 글을 통해 알리면서, 농민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자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너무나도 가난한 나머지 서로 싸우고, 도둑질하고, 악에 물들어 있었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농민들이 서로 돕고, 신을 섬기며 살기를 바랐다. 이러한 그의 이상주의적인 사회관은 농민들이 서로 사랑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삶을 추구했다.
러시아에 마르크스주의가 안착하는 데에는 톨스토이와 같은 사상가들의 영향이 컸다. 러시아 민중들은 전제주의에 익숙했고, 마르크스주의의 폭력적인 도래에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톨스토이는 서구의 이념과 슬라브주의로 분류될 수 있었지만, 그는 이념이 사람들을 사악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러시아 귀족 사회의 위선
러시아의 귀족 사회는 사교계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와 지위를 유지했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사교계의 허영과 위선을 철저히 비판했다. 그는 자신의 글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사교계에서 벌이는 일들이 얼마나 공허하고 무의미한지를 드러내며, 그들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들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한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청혼조차 하지 못하는 귀족들의 모습을 보며 절망을 느꼈다.
러시아의 사교계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19세기와 20세기 초반까지도 활발히 유지되었던 독특한 문화였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살롱 문화가 러시아로 넘어오며 귀족 사회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어졌다. 살롱의 주최자는 보통 '마담'이라고 불리며, 그녀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마담은 최신 학술 정보와 뉴스를 꿰뚫고 있었으며, 손님들 간의 대화를 주도하고 토론을 이끌었다.
살롱의 일상은 매우 정교하게 짜여 있었다. 아침부터 준비를 시작해 손님들을 맞이하고, 그날의 주제에 맞춰 토론을 진행했다. 손님들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마담은 그 모든 과정을 관리했다. 이는 단순한 사교 활동이 아니라 지성을 연마하고, 사회적 지위를 확인하며,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는 장이었다.
러시아의 살롱 문화는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분위기를 반영했다. 특히 러시아의 광활한 영토와 거대한 저택들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 이런 대규모의 모임에서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사상이 탄생했다. 살롱 문화는 귀족들뿐만 아니라 지식인, 예술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더욱 풍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특히 러시아 문학 속에서 이러한 사교 문화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문학 작품들은 당시의 사교 문화를 생생하게 묘사하며, 독자들에게 그 시대의 분위기를 전달한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그가 직접 경험한 살롱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문학 작품들은 독자들에게 러시아 사교 문화의 중요성과 그 속에서 이루어진 다양한 활동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푸시킨의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에서는 사교계의 여왕이 되기 위해 대도시로 떠나는 여성의 이야기는 귀족 사회의 허구성을 보여준다. 빚을 져가며 결혼을 하고, 사교계에서의 지위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귀족들의 허영과 위선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여성들이 사교계에서 교양 있는 척하며 활동하는 모습은, 결국 아무 의미 없는 허영심의 발현일 뿐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사교계를 떠나 시골에 정착하는 과정을 통해 이러한 귀족 사회의 허영을 비판했다. 그는 사교계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귀족 사회는 여전히 사교계의 허영과 위선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귀족들은 서로의 시를 낭독하고 평가하며, 새로운 학술 소식을 접하는 등 사교계의 생활을 지속했다.
러시아의 사교계 문화는 유럽의 사교계 문화와 달리 20세기 초까지도 지속되었다. 러시아 혁명 전까지 귀족들은 사교계에서 서로의 지위를 과시하며, 허영심을 채우는 삶을 살았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귀족 사회의 허구성을 글을 통해 비판하며, 사람들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고자 했다.
예술적 자기부정
톨스토이의 생애는 그가 겪은 갈등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작품들은 그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부인과의 갈등은 그의 사회적 활동과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재산을 포기하고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려는 등 사회적 활동을 통해 평화를 전파하려 했으나, 이러한 활동이 부인과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러시아에서 국교인 종교에 반하는 그의 활동은 그를 파문당하게 했고, 이는 부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톨스토이의 부인은 그의 글들 중 일부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남편이 종교를 비판하는 글을 쓸 때 불안해했다. 이러한 갈등은 톨스토이의 사회적 활동과 그가 지닌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그의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톨스토이는 이혼을 선택하지 않았으며, 대신 자신이 가진 기반 위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싸웠다. 이는 그가 자신의 예술성을 부정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쓰레기라고 평가하며 셰익스피어와 베토벤 등을 비판하기도 했다.
톨스토이의 이러한 태도는 그를 존경하던 이들조차도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의 친구 투르게네프는 죽기 전에 톨스토이에게 예술성을 부정하지 말고 다시 소설 문학의 세계로 돌아오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톨스토이는 투르게네프와 결투 직전까지 갈 정도로 갈등을 겪었으나, 결국 사과하며 결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내 소피아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가정사는 그의 문학 작품만큼이나 드라마틱하고 복잡했다. 특히 아내 소피아와의 관계는 톨스토이의 말년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두 사람의 관계는 초기에는 사랑과 이해로 가득 찼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갈등과 긴장이 심화되었다.
톨스토이와 소피아의 결혼 생활은 처음에는 행복했다. 소피아는 남편의 작품을 열심히 지원했고, 둘 사이에는 열세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톨스토이의 정신적, 종교적 변화는 부부 사이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켰다. 톨스토이는 점점 더 금욕적이고 영적인 삶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는 물질적 안정을 중시하는 소피아와 충돌했다.
톨스토이의 재산 포기 선언은 부부 사이의 갈등을 극대화시켰다. 소피아는 남편의 결정에 강하게 반대하며 가정의 재정적 안정을 걱정했다. 이는 단순히 물질적인 문제를 넘어 두 사람의 삶의 철학과 가치관의 충돌을 반영한 것이었다. 소피아는 가족의 안정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만, 톨스토이는 자신의 영적 신념을 고수했다.
가족 내에서도 이러한 갈등은 분열을 초래했다. 자녀들은 부모의 편을 나누어 지지했다. 특히 딸들은 아버지 편에 서서 그의 결정을 지지한 반면,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소피아의 입장을 이해하고 지지했다. 이러한 가족 내의 분열은 톨스토이의 말년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톨스토이는 결국 이러한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집을 떠나 딸에게만 전보를 보내 자신의 위치를 알렸으나, 곧 병에 걸려 쓰러지게 된다. 죽음을 앞둔 톨스토이는 소피아에게 오지 말라고 편지를 썼지만, 소피아는 남편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찾아온다. 톨스토이의 딸은 이를 알고도 아버지가 충격받을까 봐 조심스럽게 대응했다.
소피아와 톨스토이의 관계는 복잡하고 다층적이었다. 한편으로는 깊은 사랑과 이해가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철학적 차이와 갈등이 존재했다. 톨스토이의 일기에는 소피아에 대한 연민과 좌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나의 불행은 그 여자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썼다. 이는 그가 소피아를 여전히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녀와의 갈등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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