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1학기 에세이 수정] 굿의 유용성 향모 이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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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숙 작성일26-06-15 12:15 조회24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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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의 유용성
2026.6.13토 향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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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의 의미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미로의 시련』책에서 ‘문화적인 존재가 되지 않고는 인간일 수 없어요. 문화가 생존의 수단을 제공할 수 있어요’(131쪽)라고 말한다. 문화를 가진 인간은 어떠한 상황이 놓이더라도 인간 존재 이유를 이해하고 있다면 살아 갈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고대인은 험난한 자연 속에서 문화를 이야기로 만들었다. 원래 인간은 천상의 신과 지하의 신과 서로 교통했다. 그러나 인간이 욕망에 빠져 신의 권능을 침범했다. 신은 화가 나서 인간에게서 신의 능력을 빼앗아 버린다. 하지만 인간은 신과의 연결을 필요로 했다. 샤만은 신과의 소통을 하는 자이면서 신의 세계를 이동할 수 있는 인간으로 신과 인간의 매개자다.
고대인도 현대인과 똑같이 질병에 걸렸다. 현대인과 달리 고대인은 질병을 다르게 해석했다. 질병이 생기는 이유는 육체에 사는 영혼이 악한 영혼에게 유괴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동아리의 샤만은 신들이 사는 천상과 지하를 교통하여 영혼을 되찾아 왔다. 샤만이 영혼을 되찾기 위해 행하는 무의가 굿이다. 샤만이 하는 굿은 종류가 다양한데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치병굿, 정기적으로 세상 만물의 자연에게 기도하는 풍요굿 등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굿이 행해진다. 20세기 초 제주에 신당(神堂)이 많았다. 제주에는 한 동네에 아랫 신당, 중간 신당, 윗 신당이 있었다. 신당이 마을마다 마을 위치마다 있는 것은 그 만큼 이로운 효과가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인구가 증가하고, 식량이 풍부해지며 동시에 종교 개혁과 과학의 발전과 의료 발달로 인하여 굿의 위치는 점차 낮아져 이젠 소멸 위기에 처했다. 특히 한국은 국가적인 정책으로 ‘굿은 미신’이라는 관념이 깊게 새겨져 신당이 많았던 제주 사람들도 현재는 신당을 찾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치유 방식 중 ‘굿’도 있다는 것을 알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치유 방법이 많아질수록 선택의 폭이 넓어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치유될 수 있게 말이다. 이 글은 굿에 대한 잘못된 믿음으로 굿판에도 가지도 않고 설렁 갔다고 해도 믿음이 부족하여 치유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샤마니즘』과『미로의 시련』책을 통하여 굿의 의미를 다시 새롭게 익혀보자.
1. 고대 굿의 의미
1) 굿은 성스러움이 현현하는 공간이다
과거 제주 칠머리당굿은 제주시 건입동의 제주항과 사라봉 사이 바닷가 언덕 위였다고 한다. 팀 잉골드의『만들기』책에서 언덕은 만물의 자연이 그곳으로 모여 형성된 곳이었다. 이는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말한 고대인이 생각한 ‘중심축’에 대한 생각과 상통한다. 고대인은 어떤 장소에 갔더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비 체험을 하게 된다. 현실세계에 없는 다른 세계에서의 힘, 형상이 드러난 것이다. 후에 이 장소는 시간이 흘러 신들과 인간이 교통할 수 있는 세 우주역을 관통하는 ‘중심’의 의미로 바뀌었다. 이는 제주 칠머리당굿 현장도 신과 인간이 서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성스러운 장소라고도 볼 수 있다.
2) 굿판의 나무는 세계의 기둥이다
2026년 4월 1일 칠머리당 영등굿 송별제를 보러 제주에 내려갔다. 영등굿은 비가 와서 칠머리당이 아닌 칠머리당영등굿 전수관에서 했다. 전수관에 들어가자 오색의 화려한 천과 종이보다 눈에 뛰는 것이 있었는데 하얀색 한지로 만든 대형 나무다. 영등굿 무대 현장 양끝에 각각 한 그루씩 서 있었다. 나무의 높이는 배우 주지훈 키 183cm 두 사람이 서서 위로 올렸을 때 크기다. 나무의 몸통은 성인 두 사람이 옆으로 서 있을 때 넓이였다. 나무의 몸통을 기준으로 오른쪽 왼쪽 밖으로 각각 열 가지 정도 뻗어 있고, 가지에 또 잔가지가 두 세 개가 달려 있었다.
굿판에 나무는 신(神)과 샤만이 천상 우주역과 지하 우주 역을 이동하는 지상의 중심축으로 ‘우주나무’다. 칠머리당전수관 영등굿 현장에 임시로 만든 우주 나무는 제단 뒤가 아니지만 송당 본향당에 우주나무는 제단 바로 뒤 서있다. 신(神)들은 우주나무를 통하여 천상에서 내려오거나 지하에서 올라와 굿판 현장에 머문다.
북극 및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집 중앙에 기둥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기둥 아래 돌로 된 제단을 만들고 제단 위에 음식 및 물건들을 놓고 신께 기도한다. 그들이 집안에도 기둥을 세우는 이유는 신(神)들이 사는 천상과 지하를 연결하여 신들과의 연결감을 갖기 위해서다. 신의 보호 아래 살면 자신의 삶이 신으로부터 보호받는다는 생각을 하게되고 신을 믿는 마음은 나와 타인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 마음을 갖게 된다.
2. 굿판은 소우주다
1) 굿판의 샤만의 역할
샤만의 가장 큰 역할은 병을 치유하는 사람이다. 고대인에게 병은 영혼의 문제로 생각했다. 몸의 영혼이 악마에게 유괴를 당했거나 어떤 이유로 부패해서 질병으로 나타났다고 여겼다. 샤만은 접신 기술로 천상 세계로 상승하거나 지하 세계로 하강하여 유괴된 영혼을 찾아내어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부패된 영혼은 더 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부패의 원인을 찾아 몸에서 쫓아내고 회복시키는 치유를 한다.
샤만이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기술이 있는 것은 성무의례 입문을 통해 정식으로 샤만이 되어 세 우주역을 여행하며 신(神)과 영신과 교통하는 ‘탈혼망아’ 접신기술을 익혔기 때문이다.
2) 무복과 무고는 소우주다
엘리아데는 샤만이 굿을 할 때 입는 무복과 무고는 속계(俗界)와 구분되는 작은 우주적 공간이라고 말한다. 우주적 공간은 천상의 신과 지하의 신과 지상의 인간이 만난다. 이는 천상의 신과 지하의 신은 아무장소에나 나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샤만은 신을 부르기 전에 굿 판을 우주적인 모습으로 성스럽게 채워야 한다. 신이 드실 제상과 제물 그리고 신이 굿판에 내려오는(올라오는) 길도 만든다. 이는 세 우주역의 신들이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것처럼 즉 실재하는 것처럼 만든다.
신과 동아리의 영혼 매개자 샤만은 성무의례 때 입은 무복과 무고를 갖춰 입는다. 무복과 무고는 샤만의 접신기술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한다. 샤만의 성무의례때 함께한 수호영신들이 무복과 무고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수호영신들은 샤만이 살아서 죽고, 다시 죽어서 사는 순환을 하기 위한 접신기술의 필요조건이다.
고대인에게 신들은 현실에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했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통제하기는 어렵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존재가 아닌 더 큰 존재를 형성화 할 필요가 있다. 거대하고 힘이 있는 존재만이 개인을 단체를 재생 시킬 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대한 존재에 대한 믿음은 고대인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설득의 요건이 자연의 질서를 가진 신이었다. 자연의 질서는 우주의 질서다. 우주의 질서로 들어가는 영혼 여행의 매개자 샤만은 무고와 무복을 입고 굿을 함으로써 소우주 공간을 형상화 한다.
3. 굿의 의례
1) 제주 영등굿 송별제
영등굿 송별제는 올해 음력 2월 1일 제주로 들어온 바람의 신 영등신을 떠나보내는 공동체 전체의 의례굿이다. 굿의 형식은 당신을 모시는 굿의례 순서와 같으나 굿을 하는 신이 다르므로 내용은 다르다.
영등굿 송별제의 안내문에 의한 굿 제차의 순서는 천상의 신과 지하의 신에게 굿의 시작을 알리는 삼석울림을 한다. 소미들은 북, 설쒜, 대양으로 장단에 맞추어 연주한다. 이어 신방은 당신(堂神)이 살고 집에 문을 열기 전에 허락을 구하는 <궷문열림의례>를 한다. 이어 신방은 모든 신들에게 굿판으로 초청하는 <초감제의례>를 행한다.
초감제의 시작은 굿을 하는 사제자 심방에 대한 이력을 신께 고하고, 굿을 하는 날짜와 장소를 알리고, 굿을 왜 하는지 이유를 말하고, 모든 신들이 굿을 하는 장소로 내려오도록 굿장 문을 열어달라는 군문열림를 한다. 이후 굿판을 정화하는 새도림을 하고 하늘의 신들을 부르는 신청궤를 행한다. 신들이 굿판에 오면 신들이 앉을 자리 안내를 한다. 이후 초감제안에 소의례가 진행되고 굿판에서 심방의 주제에 신들과 인간은 서로 어울려 놀며 제상의 올린 음식을 나눠먹고 인간은 신께 소망을 빌고, 점도 친다. 그리고 술잔을 기울이며 이별을 한다.
점심을 먹은 후 오후는 요왕을 맞이하는 의례를 새로 시작한다. 요왕맞이 의례는 바다에서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의례다. 오전에 했던 의례 순서와 그대로 진행된다. 단지 오전에 한 천상의 신과 함께 노는 본향듦과 석살림은 하지 않는다. 대신 바다에서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방광침 의례를 한다. 요왕맞이 초감제가 끝나면 씨드림, 씨점, 상당숙임, 액막이 선왕본풀이와 영감놀이을 하고 굿판에 참가한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짚배를 바다에 뛰어 보내는 배방선을 한다. 굿판에 내려온 신들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도진을 끝으로 굿은 끝난다.
2) 신들의 재생
심방이 초감제에서 신들을 부르고 맨 처음 하는 의례가 배포도업침과 날과국섬김이다. 배포도업침은 세상 창조의 내력을 읊는다. 날과국섬김은 신께 나라의 역사와 행정 국역의 나뉨을 차례를 고하고 굿하는 장소를 고한다. 심방이 신께 고하는 의례이지만 동시에 굿판에 참석한 사람에게 인간 존재에 대한 원초적 역사를 재인식을 시킨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영등굿 의례를 보면 신들의 본풀이 즉 신의 서사다. 신의 서사는 신화다. 신화는 심방의 입을 통해 불려진다. 제주 사람들은 자신이 모시고 있는 당신의 신화를 듣고 그들이 어떻게 태어났으며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했는지 매번 듣는다. 똑같은 신화를 왜 반복하는 걸까? 신화의 반복은 간접적 방식의 인간 영혼의 정화 방식이다. 왜냐면 신화는 바로 알기 어려운 상징으로 되어 있다.
문제의 답을 주는 방식의 교육은 사람을 변화시키는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전통방식’의 교육은 스스로 미로에 들어가 빠져 나오게 한다. 굿의 체험은 미로의 체험으로 자신의 능력을 창조하는 동기가 된다. 처음엔 신화가 이상하고 가벼운 이야기처럼 들리지는 모르지만 이면에는 세상의 다양한 문제를 하나의 신화 이야기로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 그 열쇠를 쥐려면 굿판에 가야 한다.
3) 굿판의 주술
믿음이란 하나의 관념에 대한 전 인격적 몰입으로서, 관념 작용의 현상일 뿐 아니라 감정 상태이자 의지적 행위이기도 하다. 주술에 대한 이 집학적 믿음속에는 집단 전체가 공유하는 감정과 의지,즉 우리가 탐구해 온 집합적 힘이 들어 있다.’『주술론』(마르셀 모스, 박정호옮김, 파이돈,200쪽)
마르셀 모스는 주술 현상 분석을 통해 믿음은 공동체가 갖고 있는 어떤 관습이 오랫동안 작용되어 태어날 때부터 그저 믿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관습은 공동체 안에 있는 인간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을 통해 드러난다.
개인의 믿음의 보편성은 전체 사회가 만드는 법이나, 규칙, 풍습은 오랜 시간이 흘러 보편성을 뛴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은 유전적으로나 부모 국가로부터 사회적 규범을 지키도록 강요받는다. 사회가 만든 안전한 울타리가 오히려 가두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여기에 적응을 못하는 개인도 나올 수 있다. 적응이 어려운 자가 법을 어겨서 범죄자가 되거나, 또는 스스로 고립을 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외된 사람이 된다.
굿판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에게 인간의 원초적 조건을 회복시킬 수 있는 형식을 갖고 있다. 첫째 굿 의례의 과정은 세분화 하여 정성을 다해 치러지기 때문에 속도가 느리다. 개인은 굿의 진행 속도에 맞게 자신의 속도를 맞추는 데 이유는 인간 신체가 본래 의례의 진행 속도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둘째 굿 의례는 인간 존재 이유에 대한 물음을 향할 수 있도록 신의 이야기를 주술적으로 들려준다. 믿음을 가진 신자들은 신의 이야기에 귀를 열어 듣는다. 셋째 하나의 굿판에 한 사람의 소원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사람들의 소원을 빌고 있다. 또한 그들은 같은 것을 보고 있다. 굿판은 소우주의 한정된 공간으로 모두가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고대인들이 굿을 통해 영혼이 치유될 수 있었던 것은 샤만의 접신술이 이루어지는 굿판의 복합적인 퍼모먼스와 관객의 염원이 합해지는 형식으로 인해 가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3. 굿을 보러가자
1) 굿판은 성스러운 샤워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우리는 고대인의 굿판처럼 굿을 보고 왜 치유의 효과를 흠뻑 받을 수 없는 걸까? 굿판의 역량이 부족함일까? 굿판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굿에 대한 믿음 부족일까? 가만 생각해 보면 다양한 원인이 있을 수 있겠다. 그 원인 중 내가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굿에 대한 나의 이해의 양을 쌓는 일이다.
마르셀 모스가 말한 것처럼 굿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고 ‘굿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보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왜냐면 내가 영등굿을 참가할 때 마음가짐은 ‘마음의 균형이 만들어 질까? 마음이 정화될까?’라는 생각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갔다. 그래서 그런가? 굿판의 굿 전체를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방의 몸의 가벼움, 심방의 노래, 굿판의 장식등 이런 것만 보면서 기존에 내가 갖고 있는 생각 체계만 계속 돌렸다. 결과적으로 크게 효과를 보지 못했다.
2) 굿판의 역할 ‘재성화’
요가의 이원론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 삶의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 삶도, 세계도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고, 생명을 조절할 수 도 있지요. 의례적인 결합에서는......삶의 성례적인 체험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는 것, 그 발견..... ‘변화된 삶’이란, ‘성화된 실존’, 요가의 테크닉에 의해, 또는 다른 수단이나 방법에 의해서도 삶의 재성화(再聖化)하고, 자연을 재성화할 수 있음을 인식하는 문제죠. (『미로의 시련』(미르치아 엘리아데, 김종서 옮김, 북코리아,93쪽)
엘리아데는 요가 수련을 통해 ‘삶의 재성화’라는 통찰을 얻었다. 개인의 삶의 재성화는 자신 뿐만 아니라 나외에 모든 세상 만물에 대한 ‘재성화’로 확정된다고 말한다. 이는 오강남선생님께서 말씀한 아인슈타인의 ‘신비적 감정(Mystic Emotion)’ 즉 우주 만물과 교감하는 신체를 말한다.
굿판은 ‘재성화’되는 장소다. 그 장소에 한 명이 가는 것이 아리라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다. 굿판에 가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자신도 모르게 ‘재성화’된다. 물론 재성화되는 양이 작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되기는 된다고 믿고 싶다. 왜냐면 믿는 게 나한테 이익이기 때문이다.
굿판은 강요가 없다. 목적도 없다. 춤과 노래와 신화와 흥겨움이 있다. 굿판에서 신화가 심방에 의해 주술처럼 불려진다. 신화는 ‘원초전 인간’은 어떻게 살았는지? 자연스럽게 물이 아래로 흐르듯 사람들의 몸에 흘러 들어간다. 굿판을 믿는 사람들은 굿판 현장에 들어가 심방을 통해 신께 소원을 빈다. 굿판 현장을 보는 다른 제주 사람들은 굿판 현장에서 일어나는 형식을 보며 자신을 대입하여 신에게 소원을 빈다.
굿판이 의례는 오래전이 지금과 똑같다. 물론 현대에 들어와 많이 삭제되긴 했지만 말이다. 만약 굿 판 그대로 행한다면 똑같다고 할 수 있다. 매년 같은 형식의 굿판은 인간의 속세의 삶에서 굿판에 들어서서 성스러움이 현현하는 삶을 체험하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재성화’된다.
3) 제주굿을 보러가자
우리가 알고 있는 육지의 굿, 우리가 알고 있는 tv예능에서 보여주는 굿에 대한 생각을 보류하자. 미르치아 엘리아데가『샤마니즘』첫 장에서 샤마니즘에 대한 재정의를 내린 것처럼 우리도 제주굿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정립하자. 굿이 가진 우주적 의미의 믿음을 갖고 굿의 원형이 잘 보존된 제주굿을 보러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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