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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1학기 에세이 수정] 고대의 샤먼과 21세기 문명의 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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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숙 작성일26-06-15 12:18 조회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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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샤먼과 21세기 문명의 이기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는 루마니아 출신의 종교 사학자·종교 인류학자·철학자이며, 20세기 종교 연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엘리아데는 특히 종교적 인간이라는 개념, 그리고 ()과 속()’의 구분으로 유명하다. 그는 인간은 어떻게 성스러움을 경험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종교를 단순한 사회 제도나 심리의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엘리아데는 종교가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더 나아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보았다. 특히 고대 시대에는 인간 존재로 산다는 것 자체가 종교적 행위였다고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고대적 접신술인 샤머니즘은 곧 종교라고 엘리아데는 설명했다. 그렇다면 샤머니즘이라는 종교의 영적 지도자, 성스러운 영혼의 안내자인 샤먼은 무엇을 했는가?

 

<스마트폰과 AI시대 모습>

한 시대를 대표하는 여러 모습이 있다. 식당에서 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누가 봐도 외식하러 나온 한 가족의 모습이다. 주문을 끝내기가 무섭게 잠시 멀뚱하게 있다가 일제히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들은 각자의 알고리즘을 타고 들어가 각자의 취향대로 스마트폰에 집중한다. 특별히 대화가 없는 가족이라고 치부 하기에는 비슷한 장면을 자주 보게 된다. 어느 날부터 바닥에 LED 신호등이 생겼다. 장애인을 위한 편의 시설 중 하나라고 애써 우겨보고 싶지만, 스마트폰으로 인한 교통사고 증가로 인해서 생겼다고 하니 조금은 씁쓸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오늘 당장 스마트폰을 놓고 나왔다면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결제도, 길찾기도, 사소한 궁금증에 대한 답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해진다. 핸드폰이 없는 하루의 일상은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지경이다. 21세기는 스마트폰과 AI 가 주도하는 시대라는 것에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스마트폰 검색창에 단지 한번 검색했던 내용이 줄줄이 알고리즘을 타고 들어와 궁금하지도 않은 것을 나의 기억 속에 저장 시킨다. 더 나아가 이제는 검색도 필요 없이 몇 개의 키워드만으로도 AI를 통해 지체없이 해결한다. 심지어 AI는 전에 했던 질문과 연관시켜 더 심도 있는 질문을 유도하기도 한다. 감탄과 당황이 오가는 순간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마치 스며들 듯이 21세기 문명의 이기,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에게 많은 것들을 묻고 그 답에 의존한다. AI에 관해 AI에게 물었다. 그 답변의 키워드들은 주로 효율성, 편의성 신속성 등이었다. 그 답변들을 종합하면 시간을 단축하고 더 빠르고 매우 똑똑한 지원자라는 것이다.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창의적인 것도 가능하다. 한마디로 못하는 것이 없고, 이제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AI에게 도움을 자주 받는다는 상담 내용들 또한 주식이나 고민 상담을 비롯해 그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내면적인 갈등을 상담하면 긍정과 수용이 잘 뒤섞인 표현을 통해 위로받는다고 한다. 물론 편리하고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접근성도 좋다. 결국 아는 만큼 편리해지므로 우리의 눈과 귀를 정보에 고정할 수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세계의 주인은 고사하고 도구의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세계의 주인, 샤먼>

모든 것을 묻고 의존했던 대상이 인공지능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고대 시대에 존재했다. 바로 샤먼이다. AI 못지않게 만능이었던 샤먼의 주된 일은 잃어버리거나 가출한 영혼을 되찾아 환자에게 돌려놓음으로써 환자의 병을 고치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샤먼이 한 수 위다. 오래전 한 방송에서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앵커가 누군가의 부고 소식을 전하며 잠시 침묵하는 순간이 있었다. 눈물을 삼키며 멈추어 있던 그 장면은 백 마디의 절절한 말보다 큰 슬픔을 전했다. 평균치로 데이터화된 정밀하게 정리된 AI는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우리에게는 절제된 감정을 품격있게 표현할 수 있는 침묵또는 멈칫거림과 같은 인간 고유의 공감력이 있다.

지금은 자주 듣기 어려운 말 중에 교양을 쌓는다또는 정신적 풍요같은 말이 있었다. ‘고전과 신문읽기가 그 과정에 속했다. 고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와 접하며 상상력을 키우고 신문을 통해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를 확인하라는 의미였던 것 같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과정 속에서 흩어져 있는 지식들을 연결하고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내면을 단단하게 하는 것이고, 나아가 그 내면을 통해 정신적 풍요를 누릴 수 있으며 그것이 곧 삶의 품격으로 이어진다.

고대 시대의 접신술의 대가 샤먼은 자신을 해체하면서 자기 치유의 과정을 거쳐 사람들의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아 주는 기술을 습득했다. 미르체아 엘리아데는 샤마니즘이라는 책을 통해 고대 시대의 샤먼에 대해 매우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며 그가 영혼의 안내자가 되는 과정을 짚어 나갔다. 21세기 문명을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인 AI, 아는 만큼 편리함을 주는 인공지능 시대를 나쁘게 말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 언사를 펼칠 만큼 아는 것도 없고 오히려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한 AI가 신기할 때가 많다. 다만 그냥 이대로 직진해도 되는지 의문을 제기 해본다. 더 나아가 자기 해체를 통하여 스스로를 완성한 자기 치유자인 샤먼의 삶을 조금은 세세하게 살펴봄으로써, 고독과 고립 속에서 지루함과 고요함을 견뎌낸 영혼의 안내자, 샤먼의 삶을 통해 고대 시대를 관통하여 지금까지 일관성 있게 내려오는 삶의 지혜를 되짚어 보고 싶다.

 

<샤먼이라는 사람>

샤먼은 특수한 힘으로 인해 매우 두드러진 존재였으며, 그 부족민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여겨졌고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엇보다 샤먼이 샤먼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탈혼망아(脫魂忘我)체험이었다. 탈혼망아(奪魂忘我)너무 강한 감정이나 충격, 몰입 때문에 정신이 빠진 듯이 자신을 잊어버린 상태라고 한다. 이것은 엘리아데식으로 표현하면 성스러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명상의 아주 깊은 상태이거나 무아지경 같은 상황을 말한다. 샤먼이 경험하는 탈혼망아(奪魂忘我) 체험은 매우 특별한 종교적 체험으로 샤머니즘은 접신술이라는 정의가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넓은 의미로 샤머니즘은 곧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샤먼으로 인정받기>

엘리아데는 자신의 저서 샤마니즘에서 샤먼이 되기 위한 방법을 매우 자세하게 설명한다.샤먼이 되기 위해서는 세습하여 물려받는 방법과 이 천직에 대한 자발적인 응소(應召) 부름을 받고 나가는 피임(被任) 혹은 피선(被選)이 있다. 물론 피선되었다고 해도 두 가지 수련 과정, 꿈이나 망아황홀 등의 접신 과정과 접신 기술, 부족의 신화와 족보, 샤먼의 은어 등을 습득해야 하는 등, 전승 교육과정을 거쳐야 샤먼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는 바로 입문 의례에 해당한다. 영신들이나 나이 많은 스승 샤먼에 의한 교육은 때로는 공개적으로 치러지기도 하는데 그 자체가 하나의 자율적 의례로 구성된다. 그런데 때로 입문 과정은 입문 당사자의 꿈속에서 지나갈 수도 있고 접신 체험과 함께 지나갈 수도 있다. 특히 샤먼의 꿈은 무질서한 환상이거나 사적으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그 장면이 입문의 환각과 전통적인 규범을 모두 따르고 있으며 매우 정교하고 일관성이 있다. 미래의 샤먼은 특정한 입문 과정의 시련을 거치고 고도의 복잡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후보자인 샤먼을 보통의 신경증 환자에서 특정 사회가 용인하는 샤먼으로 인정받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의 입문 의례, 접신 체험과 교육을 통한 입문 과정이다. 21세기 AI 시대는 어떤가? 과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우리는 몇 번의 손가락의 동작만으로 답답함을 해결할 수 있기에 효율적이고 신속함에 빠르게 적응하고, AI에게 쉽게 마음을 연다. 궁금한 것을 즉답으로 해결하고, 잠시의 기다림도 지루함으로 느껴지는 순간들,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체계화된 정보로 평균치의 답을 갖고 있어서 개인화된 답은 있으나 개별화는 어렵다.

<접신 체험, 샤먼의 고통>

엘리아데의 설명에 따르면 병리학적 질병이나 접신몽 그리고 접신 체험은 샤먼 상태에 이르는 매우 흔한 수단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상 체험은 위로부터 택함을 입었음을 나타내는 것이거나, 샤먼 후보자에게 새로운 계기가 있을 것임을 알리는 징표이기도 하다. 즉 신병 등이 택함을 입기이전의 속된 인간을 성스러운 영혼의 안내자로 바꾸는 것이다.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접신 형식의 체험에는 항상 스승 샤먼에 의한 이론적, 실천적 교육이 뒤따른다. 또한 이것은 택함을 입은인간의 종교적 신분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샤먼 후보자의 모든 접신 체험에는 고뇌, 죽음, 그리고 부활 같은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신병과 무업 활동은 모두 통과의례의 역할을 하는데, 이 과정에서 받는 고통은, ‘택함을 받은 자의 심적 고독, 격리로 인한 고립감, 의례적 독거(獨居)와 맞물린다. 신병에 걸린 샤먼 후보자가 느끼는 죽음에 대한 절박감은 모든 통과의례에 나타나는 상징적 죽음을 재현한다. 최초의 접신 체험은 인체의 내부 기관과 장기의 재생이 뒤따르는 육신의 해체, 천상계로 상승하거나 지하계로 하강하여 이루어지는 영신들 및 이미 세상을 떠난 샤먼들과의 대화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종교적인 동시에 샤먼으로서 직업적인 비의(祕意)인 갖가지 계시를 받는다.

샤먼이 샤먼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그것은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죽음을 넘나드는 과정이다.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절박감, 깊은 고뇌의 경험이다. 삶에는 한단계, 한단계 오르는 계단이 필요하고 그 속에서 잠시의 멈춤도 필요하다. 샤먼은 그것을 해낸 사람이다. 그리하여 샤먼이 하는 삶의 통찰은 누적된 데이터는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스승의 신비한 능력>

여기서 잠시 엘리아데가 매우 세세하게 밝혀 놓은 에스키모 샤먼의 입문의례를 살펴보자. 에스키모의 경우 늙은 샤먼이 직접 나이 어린 아이들 중에서 후보자를 선택한다. 늙은 샤먼은 여섯 살에서 여덟 살쯤 되는 아이들 중에서 다음 세대를 위해서 현존하는 최고의 권능을 보존하는데 가장 적합한 재능을 가진 아이를 골라 입문 의례의 은혜를 베푼다. 예를 들면 특별한 천부적 재능이 있는 아이, 몽상적인 아이, 기질적으로 신경증적이어서 환상을 자주 대하는 아이와 같은 성향의 아이들이 후보자로 택함을 입는다. 주목할 것은 후보자의 기질이 지극히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몽상적이거나 신경증적인 기질을 결함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러한 아이들이 종교적 의례를 통해 스스로를 치유함으로써 치유자로서의 자격을 갖출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늙은 샤먼은 샤먼 재목을 찾아내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 같은 곳에서 비밀리에 이 아이를 교육 시킨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늙은 샤먼은 아이에게 한적한 곳(깊은 산속, 호숫가)에서 독거(獨居)하는 법을 가르친다. 이곳에서 돌 두 개를 문지르며 아주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게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호수나 내륙 빙하에 사는 곰이 나타나 네 살을 먹고 너를 형해(形骸)로 만든다. 그러면 너는 죽는다. 그러나 네 살은 다시 차오를 것이고 너는 다시 살아난다. 네가 입었던 옷도 네 몸으로 돌아온다.” 후보자 아이가 한동안 의식을 잃은 채로 있어야 하는, 이 제의적 죽음과 재생의 체험이 바로 접신적인 체험이다. 늙은 샤먼의 제자인 아이가 형해화 되었다가 다시 살을 받는 이러한 사례는 에스키모 입문 의례의 특징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어느 특정한 한곳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무속적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자 샤먼의 체험>

엘리아데는 제사 샤먼의 체험도 매우 자세하게 사례를 제시한다. 스승이 제자를 위해 달 영신으로부터 얻어내는 신비한 능력은 제자가 사자의 영신들 혹은 카리보우(순록)의 모신, 곰의 영신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얻어낼 수도 있다. 물론 이때는 제자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샤먼 후보자는 혹독한 입문의 시련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을 형해로 관조하는 능력을 얻기 위해 극심한 육체적 시련과 정신적인 명상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샤먼은 초자연적인 자기 두뇌의 힘으로, 마치 저절로 되는 것처럼, 자기 몸에서 살과 피를 분리하고 오로지 뼈만 남긴다. 그리고 그는 자기 뼈마디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자기 뼈를 부른다. 이때 그는 스승으로부터 배운 특수하고 신성한 샤먼의 언어로만 이 뼈마디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뼈에 대한 관점이다. 고대인들에게 뼈는 인간과 짐승의 생명의 원천이었다. 인간이 죽으면 살과 피는 썩어서 없어지지만 뼈는 남아 있기 때문이다. 뼈는 생명이 다시 시작되는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고 인식되었다. 이러한 형해 상태가 된다는 것은 세속적인 인간 조건의 초월, 해탈의 경지에 드는 것으로 즉 갱생, 신비적인 재생의 완성이다.

엘리아데는 이러한 고대인의 최초의 의식적 깨달음의 본질이 여러 곳에서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설명한다. 기독교 신비주의, 불교 혹은 탄트라(밀교)적인 명상 체계 안에서도 볼 수 있다. 즉 시간의 덧없음이나 모든 행위가 무상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 실체의 관조를 통하여 생명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이렇게 세상 즉 속()의 경계를 넘어 인간 조건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욕망은 세계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혼의 안내자, 샤먼>

샤먼은 영혼에 대한 의례에서 항상 존재한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거나, 악마나 요술사의 먹이가 되기 쉬운 불안정한 상태일 때 샤먼은 환자를 진찰하고 육체에서 도망친 영혼을 찾아 나서며, 반드시 그 영혼을 잡아 그 몸으로 되돌아오게 함으로써 환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 샤먼은 사자의 영혼을 저승세계인 지하계로 안내하는 일도 하는데, 바로 그가 휼륭한 영혼의 안내자이기 때문이다. 샤먼이 치료사일 수도 있고 영혼의 안내자일 수도 있는 것은 그가 접신술을 체득하고 있어서다. 샤먼은 자기의 영혼이 육신을 떠나 아주 먼 곳을 방황하게 할 수도 있고, 지하계로 내려가게 할 수도 있으며, 하늘로 오르게 할 수도 있다. 자신의 접신 체험을 통해서 샤먼은 이 땅이 아닌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 샤먼이 천상계와 지하계를 모두 오갈 수 있는 것은 일찍이 이 두 세계에 있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금단의 지역에서 길을 잃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샤먼은 성무 의례를 통하여 성별 된 몸이고 수호 영신들의 보호까지 받기 때문에, 그는 위험에 도전하고 신비스러운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샤먼은 주술사, 주의(呪醫)이며 영혼의 안내자, 신비가, 시인이다. 주의(呪醫)는 주술로 병을 고치는 사람인데 샤먼은 물리적인 병뿐만이 아니라 영혼도 함께 돌본다. 병을 몸의 문제로만 보지 않고 환자의 영혼이 그 균형을 잃었다고 진단하여 환자를 신과 연결 해주는 중재자,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내과, 신경정신과, 외과까지 모두 포함한 그 이상의 능력자, 멀티플레이어다.

 

<잠시 멈춤의 시간>

샤먼으로 택함을 받고 샤먼이 되는 과정, 샤먼의 능력을 살펴보았다. 샤먼이 겪어 내는 과정들, 탈혼망아 체험을 위한 명상의 시간, 영혼의 안내자가 되기 위한 고독한 시간은 모두 인내와 멈춤이 필요하다.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이 우리에게 주는 효율성과 신속함이 우리의 삶을 깊이 파고드는 이 시점에 잠시 멈춤의 시간을 가져보자. 샤먼이 획득한 것들, 극심한 고통과 고독감 속에서 지난한 과정을 견디며 스스로 체화한 그의 능력과 지혜는 어디서 온 것일까? 바로 기다림의 결과였고 자신을 해체하면서까지 스스로를 갱신하여 얻은 것이다.

예전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 잠시의 여유 시간을 메우는 것이 주로 책이거나 신문이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대체로 그 여유의 시간을 스마트폰과 함께한다. 지하철을 타면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보는 장면은 매우 익숙하며, 졸고 있는 사람조차 드물다. 한 치의 여유나 지루할 틈이 없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모든 질문에 즉답으로 응수한다. 스마트폰의 길찾기는 타인에게 묻는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혹시 생길 수 있는 관계와 소통을 제한 시킨다. 길을 잃어 본다는 것은 새로운 길의 시작일텐데 그것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는 과정이 축소되거나 생략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책은 즉답을 주지는 못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거나 내가 몰랐던 내용을 통해 사유하는 시간 속에서 고민하고 탐구하는 여유 공간을 갖게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책들을 뒤적이며 고민하고 머리를 쥐어짜는 시간을 통해 생각과 마주하고,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을 방황하다 보면 생각의 근육은 좀 더 탄탄해지고 상상력의 지평도 넓어진다. 지루함을 편리한 도구로 채우는 대신에 고요함 속에 머물러 있다 보면 사고의 촘촘함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원래 즉각적인 대화법에 익숙하지 않았다. 고학력의 총명한 이들이 개발한 것들을 지혜롭게 삶의 도구로 활용하며 인간이 품격있게 살 수 있는 방법, 품위를 지키며 관계를 유지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샤먼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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