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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3)] 칸트의 인간, 주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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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oolyule 작성일26-06-18 08:50 조회4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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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 김유리 2026.6.17

 

칸트적 인간, 주체, 사람

 

 

“동물은 어떤 권리에도, 어떤 의무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목적의 왕국에 낯선 자로 남겨지지요.”(196쪽)

 

내 생각을 쓸 때 주어의 자리에 ‘나’를 둔다. 내용을 일반화할 때는 ‘우리’라고 쓰고, 동의어로 ‘인간’과 ‘사람들’을 놓기도 한다. 주어가 되는 나, 우리, 인간, 사람 등의 일련의 말들이 매끄럽게 상호 대체될 수 있는 유의어들일지 의문이 생긴다. 데리다의 책을 읽다보니 앞에 말한 일련의 단어에 개념들이 담겨 있기에 그냥 쓰기에는 걸린다. 책 183페이지부터 칸트가 인간, 주체, 인격이라고 쓸 때 그 말들이 어떤 의미일 수 있는지 데리다가 살피는 부분에서 생각거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인간 주체

데카르트 다음 세기 철학자인 칸트는 『실용적 관점에서 본 인간학』에서 인간 정의를 ‘나’로부터 시작한다. 인간만 ‘나’라고 할 수 있냐고 묻는 데리다가 보기에, 칸트의 정의는 근본적으로 인간 중심주의적이고 ‘자아론적’이고 ‘동어반복적’이며 ‘자서전적’이다. 그것은 선언이지 공리일 수 없다고 데리다가 말하는 것 같다. 칸트는 이 정의에서 결국 ‘인간이란 나, 나는 인간’이라고 말한다. 칸트가 정의하기를 인간은 “자신의 표상에서 ‘나’를 가질 수 있는 자”이다.

자기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어떤 관념이나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고, 그와 같이 생각할 수 있고 재현할 수 있는 자를 인간이라고 정의하겠다고 칸트는 말한다. 특이한 것은 할 수 있음, 즉 ‘능력’ 개념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데리다는 능력을 가진다는 것은 그렇지 않은 다른 자들 위로 고양되고 상승되어 높은 자리에 서는 일이라고 말한다.

능력 덕분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서, 인간은 ‘나’라는 정체성의 소유주, 즉 주체가 된다. 정체성이란 것은 이 ‘나’가 “모든 변양 아래서도 동일하게 유지되는” 통일된 의식을 의미한다고 한다. 정체성이란 말도 일상에서 참 흔하게 쓰이는데, 그 뜻에 고정성과 단일성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정체성이 흔들린다’고 말할 때, 나는 흔들리거나 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한 것이었구나 싶다. 그리고 정체성이란 다름 아닌 ‘의식’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몸도, 삶도, 무의식적인 것도 여기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고 할 것을 정체성이라는 의식에서 찾는 것은 마르셀 모스가 서양 엘리트들의 예외성으로 지적한 바, 의식-환원적이고 부분적인 인간의 상태라고 했던 것이기도 하다.

 

사람과 사물

칸트의 인간 정의의 골격은 “나는 생각한다”이다. 나라고 생각하는 것(의식)으로 인간을 환원하면서, 그것을 자기 동일적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인격”이라고 할 때 ‘인격’이란 말은 ‘퍼슨’(184), 즉 사람을 말한다. 나는 평소에 사람이란 말을 인간(‘휴먼’, ‘호모’)의 우리말 표현이라고 두루뭉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인격’이라는 근대적 의미가 추가되었나 보다. 서양 전통에서 인격은 단지 인간인 생물체를 뜻하는 말이 아니었다.

사람(인격)은 사물과 맞서는 개념어다. 데리다는 고대 로마법에서 사물의 권리와 인격의 권리를 구별한 것을 상기하라고 말한다. 사람은 사물과 ‘등급’ 및 ‘존엄’ 면에서 전적으로 다른 존재다. 이성 없는 동물인 동물 일반은 사물의 범주에 들어간다. 사람은 사물에 대해 ‘지배’와 ‘처분’의 권리를 가진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라는 말을 쓰기만 해도 사물로부터 자율, 자기 관계 능력 등을 박탈하고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칸트는 사물을 지배하고 처분할 ‘자유로운 권위’를 가지는 것이 어떤 속성이나 결과값이 아니라 인간 본질이라고 선언한다. 본질이라는 말의 무게가 상당하다. 사물에 대한 지배와 처분을 포기하면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라는 말일 테니 말이다. 여기서 카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동물 지배와 처분을 제대로 못해서 짐승처럼 도망다니다가 제대로 하라는 제2의 기회를 부여받은 그 사람 말이다. 창세기부터 인간에게 ‘권위를 생명체에 표시하라’는 목적을 부여한 것은 신의 명령이었다.

 

주체성과 존엄성

이 지점에서 데리다는 목적론을 언급한다. 주체로 선다는 것은 나를 목적에 부합하는 자로 세운다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법 앞에서 주체가 된 나는 목적에 부응하고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합목적적으로 행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면 사물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동물은 사람과 구별되는 존재인 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된다.

데리다는 모든 생명체는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자신을 느끼고 자기와 관계하며 자가-목적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칸트에 따르면 동물은 ‘주체성’과 함께 ‘존엄성’을 결여하고 있다. 칸트에게 존엄이란 ‘내적이고 값이 없는 가치’로서 ‘자체 목적의 가치’다. 존엄은 비교할 수 없는, 협상할 수 없는, 시장 가격 너머의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존엄을 인권 개념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재산을 사고 팔 권리로부터 유래한 값의 개념이 들어 있어서 놀랐다. 자가목적성을 데리다를 따라서 생명체 일반의 특성으로 간주할 것이냐 칸트를 좇아서 인간의 특권이자 침해할 수 없는 절대적 ‘이권’으로 볼 것이냐에 많은 것이 걸려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과 동물의 배타적 구분에 문제를 제기하는 데리다의 맥락을 따라오던 중에 주체, 정체성, 인격 등의 개념어에 다다랐다. 그리고 인간과 다른 자들, 즉 타자가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되고 지배와 처분의 대상이 된 광경이 드러났다. 데리다는 이에 대해 동물이 어떤 ‘권리’나 ‘의무’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목적의 왕국에 낯선 자’로 남겨진다고 표현한다. 수단은 목적 앞에서 항상 ‘희생’된다. 주체라는 말, 사람이라는 말이 희생을 ‘명령’하고 있다. 이어서 데리다는 칸트의 생각들을, 전쟁 범죄를 다루듯이 아우슈비츠 이후의 아도르노의 의심 앞에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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