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1) 발제] 응시하는 동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유현지 작성일26-06-03 13:56 조회19회 댓글0건첨부파일
-
260604 종교 인류학유현지.hwp
(170.5K)
0회 다운로드
DATE : 2026-06-03 13:56:32
본문
[종교 인류학] 2학기/『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 1주차 발제문
응시하는 동물
유현지
자크 데리다는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한다. 데카르트는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명확하게 세우고, 동물을 자극에 단순 반응하는 ‘동물-기계’(58p)로만 바라봤다. 해당 시각이 잘 드러나는 사례가 바로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한 장면이다. 앨리스는 고양이들을 만나는데, 고양이들은 가르릉거리기만 할 뿐 “예”인지 “아니”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즉, 앨리스에게 고양이는 ‘반응’만 할뿐 ‘응답’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자크 데리다는 반문한다.
어쨌든, 앨리스의 이 손쉬운 믿음은 오히려 믿기 힘들지 않나요? 그녀는, 적어도 이 순간에는, 동물의 경우와 달리 사람에게서는 예와 아니오 사이를 판가름하고 결정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아요.(『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 34p)
게다가 크로케 경기장에서 앨리스가 붙잡고 있던 플라밍고는 몸을 비틀어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지 않나? 동물이 ‘응시’할 수 있으면, ‘응답’도 할 수 있으리라.
동물에 대한 2가지 이론적, 철학적 논의
첫째, 유구한 옛날부터 지속되어왔던 관점으로, 동물은 인간을 바라보고 말을 거는 존재가 아니다. 대표적으로 데카르트, 칸트, 하이데거, 라캉, 레비나스 등이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에게 응시될 수 없으며, 오로지 인간이 동물을 응시할 수 있을 뿐이다.
둘째, 시인이나 예언자들은 동물은 그들에게 말을 건네는 존재이다. 첫째 관점처럼 자격 있는 대표자는 없지만, 자크 데리다는 거기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고 고백한다.
신화에 드러난 동물과 인간의 구별됨
성경의 창세기(베레쉬트Bereshit)를 면밀히 보면,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2개가 나온다. 첫 번째 이야기는 우리가 흔히 아는 ‘7일 창조’에 관한 내용인데, 자크 데리다에 따르면 신은 자신의 모습대로 남성과 여성 한 쌍을 단번에 세상에 데리고 왔다. 이는 “‘그들’이 (중략) 권위를 갖게 하리라!(47p)”라는 말에서 드러난다. 반면 두 번째 이야기에서 여자(이샤Ischa)에 앞서 홀로인 남자(이시Isch)는 신이 명령한 대로 동물을 복종시키기 위해 이시보다 먼저 태어난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이시가 이름을 지을 때, 즉 이시가 동물을 응시할 때, 동시에 신 역시 이시를 응시하고 감시하며 관찰한다. 신은 자신의 형태와 비슷한 이시가 살아있는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능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 이시를 창조했다. 이때 의미심장한 것은 “동물의 이름 부르기는 인간의 여성 부분인 이샤의 창조 이전에, 그리고 동시에, 그들이 발가벗었다고 느끼기 이전에 이루어(48p)”진다는 것이다.
이시가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동물과 자연은 스스로 이름 부를 능력을 상실했고, 자신의 언어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자연은 언어를 박탈 당해 슬픈 게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무언과 무능력 때문이 아니며, 오히려 그 전에, 이름을 부여받는다는 것 자체가 자연의 슬픔이다(55p)
아브라함의 신화, 이시에게만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의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완벽하게 무장한 동물들과 달리 발가벗은 인간을 구하려는 마음으로 불을 훔쳤다. 인간은 동물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동물과 자연의 지배자인 주체가 되었다. 즉, 아브라함의 신화에서 인간은 동물보다 뛰어나 동물과 구별되고 동물을 지배하며, 그리스의 신화에서 인간은 동물보다 부족해 동물과 구별되며 동물을 지배한다. 그러니 인간과 동물이 구별된다는 것은 양쪽으로 “난공불락의 논리법칙(56p)”인 것이다.
고양이 앞에서 발가벗어 창피하기
자크 데리다는 관념적인 고양이가 아니라 하나의 실존으로서 고양이가 있다. 어느날 그는 고양이 앞에서 발가벗음을 창피해했다. 동물들 앞에서 발가벗었다고 창피해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동물이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 응시하는 존재일 때 인간은 비로소 동물의 응시에 창피해한다.
동물이라는 말
자크 데리다는 키메라가 한 동물인지, 하나의 형태를 갖춘 한 동물 이상의 것인지에 대해 묻다다가, 이렇게 말한다. “동물이라니, 이 무슨 말이죠!(61p)” 우리 인간은 멋대로 다른 생명체를 제도화한 호칭을 붙였다. 즉, 비인간존재를 하나의 ‘동물’이라고 뭉뚱그려 부름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에게 권위를 준 것이다. “인간의 특정한 존재와 소위 인간적 웰빙에 봉사하게끔 모든 종류의 다른 목적으로 동물을 환원하는 것(65p)”이 지난 2세기에 비해 전혀 다른 규모로 자행되고 있다. 동물학, 생태학, 생물학, 유전학 등의 지식이 동물을 다루는 방식과 결합하며 ‘종족 말살’에 버금가는 악행으로 커졌다.
인간중심주의 학자들은 로고스(이성)를 중시해 동물이 로고스를 가진 동물인지, 무언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보았다. 하지만 철학자 벤담은 “그들은 고통을 겪을 수 있는가? Can they suffer?(68p)”라는 질문이 결정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재밌게도 동물이 고통을 겪을 수 있다(They ‘can’ suffer)고 말하면, ‘할 수 있다(can)’의 말이 흔들리며 이는 ‘자기-모순(69p)’과 연결된다. 왜냐하면 교통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은 ‘능력’이 아니며, “할 수 있음이 없는 가능성,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69p)”이기 때문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