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몫]끝없는 헤픔, 헤픔의 낭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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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임 작성일25-11-11 17:54 조회47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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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25-11-11 17:5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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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헤픔, 헤픔의 낭비
조르주 바타유의 『저주 받은 몫』은 경제의 문제를 통해 인간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방법을 탐구한 책이다. 이 책의 1부 이론적 입문을 중심으로 개념들을 살펴보자.
성장의 한계
부의 원천인 태양은 아무런 보상 없이 에너지-부(富)-를 우리에게 준다. 태양의 그러한 끝없는 헤픔은 지구 표면에 에너지의 과다라는 효과를 초래한다. 생명체는 가용한 한계 안에서 에너지를 축적하고 성장에 사용한다. 오직 성장을 지속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때에만 낭비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과잉은 일단 개체나 집단의 성장이 그 한계에 다다랐을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성장의 한계에 다다르면 끓어오름의 상태로 돌입한다. 극단의 넘침은 폭발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폭발의 극한으로 수렴하는 운동으로 흘러나오게 된다. 이때 불가피하게 에너지를 소멸시켜야 한다. 바타유는 성장은 없고 오직 에너지의 사치스러운/과잉적인 낭비만이 모든 형태로 있을 뿐이며 지상에서 생명의 역사는 원칙적으로 어떤 광적인 넘침의 효과라고 본다.
자연의 세가지 사치/과잉: 먹는 행위, 죽음, 유성생식
하나의 종이 다른 종을 먹는 행위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사치/과잉이다. 식물보다 동물의 성장에 값이 더 많이 들기 때문에, 맹수의 지속적인 포식 행위는 에너지의 엄청난 낭비를 드러낸다.
상상 가능한 모든 사치/과잉들 중에서 죽음이 가장 값비싼 희생을 치르는 것이다. 죽음 속에서 동물의 육체가 지닌 취약성과 장애성은 사치/과잉의 정점에 달한다. 죽음은 시간 속에서 세대 사이의 이행을 재배치하는 것으로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이들의 등장에 필요한 자리를 내주는 것이며, 그 없이는 우리도 없었을 이러한 죽음을 저주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동물에게 생식이란 한순간에 그 가능성의 극단에 도달한 에너지 자원을 급작스럽고도 격정적으로 낭비하는 계기이다. 인간에게 이런 낭비는 모든 가능한 형태의 파멸에 수반되는 것인데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비합리적 사치와 과잉으로 합류하게 된다.
노동과 기술에 의한 확장, 그리고 인간의 사치/과잉-성장의 문제
인간은 가용한 에너지의 일부를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기술적인 에너지의 부를 증대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기술로 성장의 기본적인 운동을 확장하지만 발전이 지속적이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다.
인구 성장은 산업의 비약적 도약과 함께 왔지만 인구 성장의 감소는 발전의 회복에 이중적 효과를 보인다. 처음 단계는 발전의 회복이 과잉 에너지의 중요한 부분을 사용하지만, 두 번째 단계에서는 그 자신이 점점 더 커지는 과잉을 생산하게 된다. 이를 과잉적으로 소비하지 않았을 때 양차대전이 그것을 수행했다.
‘일반적’ 관점과 ‘개별적’ 관점의 대립
우리를 활성화하고 우리 그 자체이기도 한 이러한 낭비의 운동을 개별적 존재는 두려워하고 외면한다. 그 불안은 생명 전체의 넘침에 기초하는 일반적인 관점과는 근본적으로 반대된다. 개별적 존재는 언제나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사멸할 수 있는 위험에 놓여있고, 일반적 존재가 지닌 자원은 항상 과잉의 상태에 있으며 그러한 존재에게 죽음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바타유는 이익과 계산과 유용성의 세계에 짓눌린 인류에게 사치스럽게 소진/소모하고 탕진하기를 종용한다. 태양의 끝없는 헤픔을 본받아 끝없는 낭비의 즐거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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