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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몫] 인신공희와 포틀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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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oolyule 작성일25-11-18 18:04 조회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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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저주받은 몫』 20251118 김유리

 

 

인신공희와 포틀래치

 

 

 

 

조르주 바타유는 경제란 생산성만이 아니라 비생산성을 포괄하는 운동이라고 한다. 현대의 대척점에 놓여있는 아즈텍과 북서아메리카의 낭비적 경제를 통해 생산 중심의 기획 사회와 다른 “소진/소모의 사회”를 살펴 볼 수 있다. 잉여는 경제 발전과 성장을 위해 재투자될 수 있지만 한계가 있다. 성장의 한계 지점에서 잉여를 무용하게 소진/소모하는 행위가 경제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고 한다. 생산에 종속되지 않는 소비인 소모와 탕진이 “근본적 비생산의 영역”으로서 보다 포괄적인 일반적 경제 운동을 구성한다.

 

 

희생

아즈텍인들은 “도덕적으로 우리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 아즈텍인들의 세계관은, 현재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세계관과 비교했을 때, “독특한 방식으로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생산”이 우리의 사유에서 차지하는 위치만큼 아즈텍인들의 사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소진/소모”이다. 우리가 “노동”에 주의를 기울이는 만큼 그들은 “희생”에 주의를 기울였다.

아즈텍인의 신화에 따르면 인간이 창조된 이유는 태양을 먹일 심장과 피를 지닌 이들을 있게 하기 위함이다. 동식물이 인간을 먹이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태양의 먹이로 창조되었다는 신화다. 이러한 믿음은 생산보다는 소진/소모에 부여된 “극단적 가치”를 의미한다.

아즈텍 사회를 활성화했던 폭력의 운동은 외부와 내부를 모두 향한 것이다. 포로들의 제의적 희생은 그 포로들을 잡기 위해 전장에 나가는 전사들의 희생 또한 명령한다. 아즈텍의 주기적 인신공희의 제물이 된 포로와 그 포로를 잡아온 아즈텍 전사 모두 제단과 전장에서 태양과 대지의 식탁에 오른다. 아즈텍 전사들을 위한 기도에서 신은 전사들이 전투 중 죽을 것을 바라며 그들이 세상에 보내진 이유는 그들의 피와 살로 “태양과 대지를 먹이고자 하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피와 살을 먹고 마셔 충족된 태양은 희생 제물들에게 영광을 내린다고 하며, 전사들은 “죽음에서 매혹과 즐거움을 해”달라고 기도한다.

기묘한 신화들과 잔혹한 제의 속에서 아즈텍인들이 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바타유는 희생제의가 “사물”을 내재적 질서 속으로 돌려보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내재적 질서에서 유용성을 목적으로 한 세계로 뜯겨 나오는 일인 “사물화”를 인류는 타락으로 보았다. 바타유는 모든 시대의 인간이 벗어나려고 노력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타락이라고 하면서, 아즈텍인 역시 잃어버린 내재성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고 한다.

종교란 “잃어버린 내재성을 찾으려는 오랜 노력이자 불안에 찬 탐색”이다. 인간은 내재성을 상실하고 빈곤해진 상태로부터 진정한 부를 되찾기를 바란다. 희생제의는, 동물과 식물이 오직 인간만을 위해서만 가치가 있고 그 스스로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듯이 ‘노예적으로 사용’되던 상태에서 동식물을 내재적 세계의 질서로 되돌린다. 희생을 바치는 인간도 이러한 희생제의를 통해서 성스러운 소통을 이루고 내적 자유로 돌아간다고 한다. 심오한 자유란 파괴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희생제의를 통해 제물과 함께 내재성에 참여한다고 해도 살해된 자와 살해자가 같을 수는 없다. 바타유는 파괴란 반드시 죽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사물인 한에서의 파괴”를 말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물성 파괴는 인간과 동식물 사이의 “유용성의 관계를 부정”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면서 말이다. 이때 파괴의 본질은 “유용한 작업의 속박에 묶인 것을 아무런 이득 없이 그저 소비”하는 것을 말한다.

노예적 사용의 파괴로 발생하는 효과는 노예와 주인의 분리의 종료이다. “내재적 참여”란 분리 불가능의 상태를 뜻한다. “모든 인간들은, 내재적으로, 그저 단 하나일 뿐이다(97쪽 원주).”라는 말처럼 내재성의 세계에서 인간은 그가 노예적으로 사용해온 동식물과 하나의 일반 경제를 구성한다. 하지만 인간이 사물 상태에서 벗어나 동식물과 경계를 상실한다는 것은 광기가 아닐까? 내재성의 회복은 광란의 모습으로 표출된다. 그러한 광란, 도취, 무절제에 대해 “타락”이라고 할 것 같은데, 바타유의 일반 경제의 관점에서는 유용성의 세계에만 속해 있는 것을 “타락”이라고 말하며 이성이 유용성에 종속된 상태를 지적하니 혼란스럽다.

희생제의는 노예적 사용이 속되게 만들어 타락시킨 것을 다시 성스러운 세계로 돌려놓는다. 노예는 주인과 가장 깊은 심부에서는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고 내재적 참여 관계에 있다가 하나의 사물로 “타락”했던 것이다. 희생제의 이후 포로는 희생되고 전사는 살아있는데 어째서 전사가 포로와 함께 참여했다고 할 수 있을까? 바타유는 노예적 사용을 진정으로 벗어나는 것은 제물뿐이며, 희생을 바치는 자는 여전히 사물화하는 세계 속에 머무른다고 한다.

희생시키는 자는 축제 동안에만 신성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에게 미래는 여전히 남겨져 있다. 미래는 그를 짓누르는 사물의 무게이다. “주체”는 미래를 염려할 때 곧바로 “대상에 종속”된다. 주체가 미래를 더 이상 염려하지 않을 때 그가 ‘저지르는’ 무용한 소진/소모는 주체를 즐겁게 한다. 무절제한 소진과 소모는 내재적 주체를 표출하는데 이것으로 인해 분리된 존재들이 서로 소통하는 길이 열린다. 희생제의, 축제, 과시적 낭비는 “강렬한 소진/소모의 주체들이 서로 소통”하는 것이며, 마치 화덕 속에 들어가듯 열기를 뿜어내며 끓어오르는 에너지 속에서 일어난다.

인간을 사물로 전락시키는 사회적 삶의 측면은 노예제가 사라진 현재에도 여전히 있다. 현재는 노동이 인간의 내재성을 “대체”한다고 한다. 노동은 결과만이 중요하게 여기는 “합리적 속박”으로 “인간 욕망의 깊이와 자유로운 분출”을 대체한다. 바타유의 역사론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노동은 “사물들의 세계”의 기초가 되었다. 이어서 고대인들은 타락한 속된 세계를 구축했다. 그리고 다시 인간은 잃어버린 내재성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아즈텍에서는 신화에서 희생을 높이 평가하고, 신들에 의한 소진과 소모를 전사의 영예로 찬양하며, 신성에 소진과 소모의 의미를 부여했다. 노동으로부터 내재성을 회복하는 현대적 양식으로서의 불안에 찬, 즐거운 탕진의 사례들에 의구심을 느끼면서도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증여

증여를 통한 교환은 현재의 상업적 활동과 정반대의 대척점에 놓여 있다. 교환은 획득의 양식이다. 그러나 그 기원에서 교환은 획득의 열망 때문이 아니라, 소멸과 낭비의 요구에 부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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