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몫 - 파괴를 통한 순환, 증여를 통한 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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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헤미안 작성일25-11-19 14:46 조회57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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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9/ 종교인류학, 조르주 바타유, 저주받은 몫/ 박서영
파괴를 통한 순환, 증여를 통한 교환
바타유가 말하는 저주받은 몫이란 성장에 필요한 양을 넘어선 ‘소진(소모)’시켜야 할 과잉된 자원을 말한다. 축적과 대비하여 ‘소진’이라는 개념을 ‘일반경제 이론’에서 핵심개념으로 가져오면서 소진을 잘 보여주는 예로 아즈텍 문명에서 행해진 희생제의와 북서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포틀래치를 대비시켜 설명하였다. 희생제의와 포틀래치 모두 축적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양자 간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
희생제의는 희생물을 태양에게 돌려주는 행위를 통해 희생제의 순간 참여자 모두가 신성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희생자의 심장은 태양에 바치고 인육은 참여자 모두가 나누어 먹음으로써 참여자들은 신성화된 희생자와 자신이 동질화되는 경험을 하였다. 전쟁포로들 속에서 선택하는 희생자는 사물화된 인간이기에 파괴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파괴하는 순간 희생시키는 자는 내재적 영속성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타유는 이를 ‘소통’이라 하였다(p91 “‘공동체’는 .... 유한한 불연속적 개체들이 공동으로 순간 속에서 무한의 영속성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불가능성의 집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이러한 무한의 연속성의 경험, 곧 속俗의 세계 안에서 성스러움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의 의미에 가닿는다.”) 종교는 소통을 통해 내적인 ‘자유’를 가능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고 인간은 파괴 속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이 때 자유는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접어두고 현재에만 관계할 수 있는 광기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었다. 라스코에서 보았던 ‘주권’의 개념과 통하는 부분이었다. 희생제물만이 실제적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존재였으며 희생시키는 자는 부를 포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였다. 따라서 희생제의에서 파괴란 사물세계의 파괴인 동시에 사물세계의 세속적 순환을 뜻하는 것이었다.
포틀래치는 증여를 통한 교환 속에서 자신의 부와 능력을 표현하는 행위였다. 증여할 수 있는 이는 권력을 가진 이가 되는데 권력을 획득하는 순간 주체를 초월하게 되지만, 그 권력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었다. 증여받은 이 또한 다시 더 많은 증여를 해야 했기에 권력을 계속 순환되었다. 교환이 곧 부에 대한 경멸을 표현하는 것이었기에 교환은 의미를 가졌으며, 그러한 경멸을 통해 포틀래치를 행하는 자는 다른 의미로 더 부유해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포틀래치는 실질적인 파괴가 아니라 ‘과시적으로 소진’시키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포틀래치에서 교환되는 사물들이 필수품이 아닌 사치품이었다는 점과 연결된다(인디언들도 실질적인 필수품들에 대해서는 희생제의와 다른 형태의 파괴를 하였다). 포틀래치를 수행하는 자들이 비록 겉으로만 잃는 행위자였을지라도 그들은 포틀래치를 통해 현재의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바타유는 “그 어느 누구도 파괴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식할 수 없고, 그 어느 누구도 부富를 소진/소모하면서 동시에 그 부를 성장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p123)라고 하였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일반경제와 인간성에 대한 고찰을 한마디로 정리해주는 말인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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