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종교인류학_1주차_미로의 시련_엘리아데는 왜 신석기인을 ‘인간 본디의 꼴'이라 말했을까_강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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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북촌 작성일26-03-04 17:20 조회48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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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는 왜 신석기인을 ‘인간 본디의 꼴(원형, 原形)’이라 말했을까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아마 가을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도 해가 질 때까지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놀다가 집으로 들어왔는데 마침 아무도 없었고, 정적만이 온 방을 감싸고 있었다. 노을빛이 창문을 뚫고 길게 방안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나는 환하게 비추던 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갑자기 시간은 멎었고, 주위가 온통 노을빛으로 변했다. 세상엔 노을 빛과 나 밖에 없었으며, 주변의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마치 우주공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의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분명 누군가의 육성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혼자 내뱉은 말도 아니었다. 매질을 통해 전달되는 파동이 아니라 찰나의 울림으로 전달되는 그 무엇이었다. 어린 시절 뿌려진 씨앗이 사춘기를 지나며 내면으로 파고들어갔던 ‘울림’에 대한 갈증은 지금까지 이어져, 영성을 주제로 한 산발적 독서와 그 끝에 잠시 찾아오는 깨달음에 대한 어설픈 희망을 반복하게 만들었다.
종교인류학을 만나게 된 것이 울림사건(?)과 무관치 않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하던 중 만나게 된 엘리아데의 유아기 시절 신비체험. 그가 들려주는 포도알처럼 투명하게 금빛 초록색으로 빛나던 비밀의 방의 이야기는 소년 시절의 노을 빛을 소환했다. 엘리아데는 자신의 경험을 비종교적이라 언급하며 ‘유년기의 체험이 내 인생을 어느 정도로 결정했는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고, ‘완전히 다른 공간에서 완전히 다른 것을 체험했다’ (『미로의 시련』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북코리아, 27쪽)는 것은 분명하다. 일상을 벗어난 개인적 신비체험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는 올해 수업을 마칠 때까지 유보하기로 하며, 우선 엘리아데의 ‘보편적 인간’ 탐구의 여정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고대의 종교적 체험 단계를 알지 못하고서는 인간의 운명과 세계 안에서의 인간의 특정한 존재양태를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한 뿌리들을 내 자신의 종교 전통, 오늘날의 특정한 교회의 현실 안에서는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어요… 나는 나 자신의 전통 안에서만 기독교의 진정한 의미와 메시지를 발견해 낸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좀 더 깊게 파 보려고 한 것이에요. 먼저 구약성서,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지중해 지방, 인도까지 파 내려간 것입니다… 다만 내가 참으로 찾아내고 이해해야 할 어떤 본질적인 것을 내 자신의 전통만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찾아보아야 한다고 느낀 것입니다. 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해를 위해서······. (같은 책, 40쪽~41쪽)
엘리아데는 유럽문화를 ‘바깥’에서 바라보고자 불과 스무 살에 아는 이 하나 없는 인도로 학문적 여행을 감행한다. 인도에 머무는 4년여 시간 동안 인도의 철학과 요가, 탄트라즘 등을 연구하는 데 특히, 요가를 이론이 아닌 몸으로 직접 익히는 수행을 행하는 등 인도문화의 정수를 이론과 실전으로 깊이 천착해 들어가던 중 ‘인도의 토착문화와 발칸 문화, 서유럽 농경문화까지의 기층을 형성하고 하나가 되게 하는 깊은 동일성을 깨’ (같은 책, 99쪽)닫게 된다. 그가 ‘신석기인의 발견’이라 언급하는 이 통찰은 인간이 식물의 생명과 신비한 연대성을 획득하며 생명순환의 관념을 갖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즉, 농경의 발명으로 인해 인간은 태어나 살다 죽지만 재생하는 우주적 순환주기에 생명을 스스로 통합시킴으로써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는 ‘우주적 종교성’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통찰의 핵심을 이룬다. 고대근동, 인도, 지중해 세계의 고대 종교를 평생동안 연구한 그가 학문적으로 도달한 그 무엇을 ‘본보기적 인간’이라 할 때, 어떤 이유로 ‘우주적 종교성’을 갖게 된 신석기인만이 인간 본디의 꼴(원형, 原型)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다른 생명의 희생으로 인해 나의 생명연장이 가능해지는 사냥 활동 또한 생명의 순환고리의 일부분임이 틀림없는데, 왜 구석기인들은 우주적 종교성을 획득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자연에서 동떨어져 도시문명에서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우리 동시대인들은 ‘본보기적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걸까? 역으로 자연과 생명의 순환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존재성을 깨닫는다면 누구나 우주적 종교성을 회복하여 보편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에 이르는 길은 ‘종교성’만이 유일한 방법인 걸까? 그의 우주적 종교성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초보적인 이런 저런 질문들이 떠올랐지만, 얕은 지력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생각의 부족함이 주는 이 부끄러움은 오롯이 나의 것일 터. 설상가상으로 질문만 추가하며 이 글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오히려 그는 루마니아와 그리스 농부들이 그들의 영감을 퍼 올렸던 근원지로 되돌아가는 길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돌이 살아 있고, 바위가 살아 있고, 말하자면 모든 것들이 ‘성스러움이 나타나는’(hierophanique)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사람들의 비일상적인 시선을 발견한 것이예요. 그는 고대인의 가치 세계를 그 내면으로부터 재발견한 것입니다. 인도는 내가 브란쿠시의 창작에서 중요성과 토착성, 동시에 그 보편성을 파악하도록 도와줬어요. 만약 누군가 아주 깊이, 신석기까지 뻗쳐 있는 뿌리를 따라 내려가 보면, 그 사람은 바로 루마니아인, 또는 프랑스인이며 동시에 보편적 인간입니다. (『미로의 시련』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북코리아, 100쪽)
여기 글의 말미에 궁금증을 하나 더 보탠다. 신석기시대 샤먼의 ‘종교적 체험’과 엘리아데가 언급한 ‘종교적 체험’은 어떻게 다른 걸까? 그가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한 ‘모든 것들이 성스러움이 나타나는방식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사람들’은 문맥상 샤먼을 지칭한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루마니아와 그리스 또는 인도에 살았던 고대의 농부들로 판단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엘리아데가 말하는 종교적 체험은 신석기 시대의 샤먼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이라 할 수 있겠다. 반면, 샤먼의 종교적 체험은 신(神)적 존재의 메시지를 인간세상에 매개하는 중간자의 역할로 인해 겪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보면 같은 종교적 체험이지만 둘의 성격은 사뭇 다르다. 하지만, 엘리아데가 언급한 ‘우주적 종교성’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으므로 이 둘 사이에 공통성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샤먼의 종교적 체험이 우주적 종교성으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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