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종교사상사2] 각 종교별 구원론 정리, 엣세이 주제 및 질문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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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헤미안 작성일25-09-16 18:22 조회41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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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류학 과제정리/ 2025.9.16/ 박서영
< 각 종교의 구원론 정리 >
고통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해방)을 구원이라고 했을 때 고통이 무엇에서(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에 따라 구원의 의미와 방법이 달라진다.
중국
- 중국의 성인들은 존재가 가지는 공허함에서 벗어나는 것, 삶과 죽음이라는 우주적인 리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존재가 그 순환의 고리 밖에 머물러야 했는데, 지성을 통하여 자기를 초월시키는 것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인간조건의 한계를 초월하여 존재론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으로써의 구원론이다.
인도
- 브라만, 힌두교(상키야-요가학파 중심으로)
인도 사상의 핵심은 최고의 실재인 브라흐만이 마야(무지, 환상, 꿈)에 의해 가려짐으로써 개별적으로 존재하게 된 아트만을 다시 브라흐만과 일치시킬 수 있게 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원초적 실재인 프라크르티에서 나온 붓디(지성)는 현상과 인식적 관계만 유지하는 심리-정신적 작용일 뿐 정신 자체는 아니다. 자유로운 정신으로 실재하는 초월적 실재와는 어떤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고통의 원인은 바로 이러한 심리-정신적 작용과 정신을 혼동하는데 있다. 요가에서 자기 몰입상태(삼마디)에 이르면 ‘인식’에서 ‘상태’로, 즉 인식에서 존재로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힌두교에서 구원은 중국인의 구원론과 방향은 같지만 지성에 대한 관점에 있어 차이가 있다.
* 용어정리(『우파니샤트Ⅰ』, 이재숙 옮김, 한길사, p34)
- 브라흐만 : ‘넓게 퍼져 어디든지 존재하는 것’, 우주의 ‘나’
- 아트만 : ‘항상 일정하게 움직여 퍼지다’, 개체로서의 ‘나’
- 뿌루샤 : ‘육신안에 들어앉은 주인’, 우주라는 육신 안에 들어앉은 브라흐만
- 불교
불성에 의해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불교에서 구원론은 어느 종교보다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교의라 할 수 있다. 엘리아데는 자기안의 불성을 깨닫는 것을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동일성을 인식하는 힌두교와 연결하고 있다.
유럽의 구원론
- 에트루리아인
이트루리아인들은 희생제의 후 영혼들이 신들로 변형된다고 여겼다. 이것은 영혼이 신성화되어 신과 합일에 이르는 것으로 보는 에트루리아인들의 종말론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들에게 구원이란 곧 육체를 벗어난 죽음이라 할 수 있다.
- 드루이드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다른 몸으로 옮겨 가므로 영혼 자체는 불멸하다고 봄으로써 드루이드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러한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믿음이 그들에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였던 것 같다.
- 북유럽의 로키 신
로키가 신들의 적대자로 등장함으로써 선악의 구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엘리아데는 세계의 파멸을 이야기하는 이러한 종말론적 신화가 인도-유럽인들이 퍼져 나가기 전부터 간직하고 있던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힌두교, 마하바라따,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 사이의 대전쟁)
- 오르페우스교
오르페우스교도들은 오르기아(열광)의 와중에 신과 인간의 합일이 되는 경험을 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구원은 입문의례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입문의례 자체를 하나의 계시로 여겼다.
유대교
유대인들은 열방의 멸망, 이스라엘의 해방, 포로들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낙원으로 변모한 국토, 메시아 통치의 확립, 열방의 최종적인 개종이라는 종말론적 시나리오를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믿었던 종말이 지연되면서 율법주의와 의례주의가 강화되어 지혜가 인격화되어 율법과 회당이 강화되었다. 이후 성전이 파괴된 다음에는 기도와 종교적인 가르침만 갖게 되었다. 묵시문학이 등장하면서 ‘심판’ 개념이 나오게 되었다. 심판을 하려면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하기에 이 시기에 악에 대한 개념 역시 구체화되었다. 악이란 인간의 불복종이나 타락한 천사의 반란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었으며, 사탄이 이러한 악의 원리를 구현하여 하느님의 적대자로 존재하게 되었다.
기독교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세상의 변형이 임박했다) 복음을 선포했으며, 5,000명이 함께 먹었던 공동의 식사는 종말에 대한 예견을 의미했다. 유대교의 민족주의적인 메시아 신앙과 차이를 두기 위해 예수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차츰 이스라엘의 민족 종교였던 유대교에서 보편종교로의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세례는 신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보증해 주면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 변환하게 해주었으며, 성찬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교회와 결합하도록 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지기에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을 성취할 수 없고 오직 믿음과 성사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재림의 지체로 혼란스러워진 기독교인들에게 세 가지 대답이 주어졌다. 하나는 재림의 임박성을 재확인시키는 것, 또 하나는 재림이 보다 먼 미래로 연기되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재림이 이미 일어났다는 것이다.
< 엣세이 주제 >
얼마 전에 TV에서 53년 동안 지리산 지게꾼 생활을 하고 있는 분을 보았다. 전문 산악인들도 오르기 힘든 천왕봉을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 세 차례나 등반하는 삶이 우리에겐 너무나 힘들어 보였지만 그분은 그저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른 직업도 가져보았지만 몸을 편할지언정 남의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고, 짐을 지는 것이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고통이 무엇에서,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예전에 지역에 있는 공부모임에서 한 선생님이 비트겐슈타인의 ‘자기인식’ 개념을 설명해준 적이 있다. 자기인식이 불명확한 사람의 인생은 항상 유동하며 불안정하다고 했다. 지리산 지게꾼은 분명한 자기인식을 가진 분이었기에 등반하는 동안 가뿐 숨을 내쉬며 육체적으로는 피로할지언정 자기 삶에 대한 불만족감은 볼 수 없었다. 물론 이것은 삶의 태도에 대한 부분이다. 궁극적 차원에서 인간존재가 갖는 고통과는 결을 달리한다. 하지만 범속한 우리가 갖는 고통의 대부분이 어쩌면 실존적 차원에서 비롯하기보다 삶의 태도에서 비롯한 부분이 더 많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존적 차원에서의 고통에 대한 구원은 절박함에서 비롯한 것이라기보다 호기심의 확장은 아닐는지. 시간이 허락될지 모르지만 나의 고통의 원인에 대해 할 수 있는 만큼 탐구해 보고 싶다.
< 질문거리 >
- 고통이 인식에 관한 질문에서 비롯한 것이라면(동양적 사고) 구원은 악을 규정함으로써 악과 더불어 발생한 개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서양적 이원론), 이 부분에 대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 학기가 끝나가니 그동안 튜터께서 말씀하셨던 엘리아데의 관점이 같은 신화학자인 켐벨과 어떻게 다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3권 중 중간 2권만 읽어서인지 엘리아데가 펼쳐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핵심적인 부분들을 축약하여 정리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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