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종교사상사2]에세이-해탈을 위한 제1의 관문, 요가와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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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켜니 작성일25-09-23 15:42 조회51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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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르치아 엘리아데, 『세계종교사상사2』 에세이/25.9.23/오켜니
해탈을 위한 제1의 관문, 요가와 명상
1.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한 고행의 길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다. 우리 집 개의 이름은 만두이다. 말티즈 종으로 온몸이 희어서 지어준 이름이다. 만두는 어느 날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고 주인의 불합리한 대우를 참아가며 의식주를 해결하는 일이 비겁하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자신에게 ‘조건 지어진’육체적 본능, 사회문화적 관계(나-신, 나-주인, 동료들과의 관계)의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결심하였다. 그렇다면 먼저 만두는 수천 년간 인간에게 ‘충성’함으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던 단단한 진화의 고리를 먼저 끊어야 할 것이다. 충성의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먹는 양을 최소한으로 하면서 주인과 거리를 두고, 어느 시점에서는 출가하여 야생에서 먹이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출가는 모든 사회적 관계와의 단절이다. 야생의 먹이활동은 굶주림과 죽음까지 각오한 것이다.
BC 6세기가 시작될 무렵 인도의 갠지스강에는 떠돌이 고행자들로 가득 차게 된다. 이들은 브라만교의 전통에 충실한 수행자들과 신비가들, 요가 수행자들, 주술사들, 소피스트들, 유물론자와 허무주의자 등등 여러 종교와 각양각색의 수행방법을 가진 자들이다. 인도 선주민들의 유랑하는 수행자(슈라마나), 즉 사문 전통이 인도-아리아인들에게도 퍼진 것이다. 이 슈라마나들은 브라만교의 제사 중심 교의에 염증을 느끼고 업과 윤회라는 메카니즘을 이해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의 모습은 불교나 자이나교의 오래된 문헌에 남아 있다. 자신을 얽어맨 신체적·사회문화적 조건에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해 이들은 금욕을 실천하고 사회적 관계를 단절하고 신에게 바치는 희생제의까지 의심하였다.
해탈하기 전 고타마의 행적을 통해서도 이때의 고행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고타마는 브라만교의 스승 아라다 칼라마로부터 상키아 학파의 사상을 배우고 우드라카 스승으로부터 요가의 기법을 배운다. 이렇게 1년을 보낸 후 가야 근처의 조용한 장소를 선택하여 6년에 걸친 거의 죽음에 이르는 엄격한 고행을 실천했다. 그 결과 하루에 곡물 한 톨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상태에 도달했다. 고타마의 고행은 다른 고행자들의 고행보다 더 높은 수준이었는지 이러한 고행 이후 고타마는 인도 전역에서 커다란 명예를 얻게 되었다고 엘리아데는 말한다.
인간으로서, 공동체 구성원으로, 신의 피조물로 ‘조건 지어진’ 상태를 벗어나 이들이 향한 곳은 어디였을까?
2. 일상적인 인간 조건의 일시적인 정지
올해 2월부터 수요일 오전에 인문세의 명상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고요하게’ ‘깨어 있어야’ 하는 명상은 쉽지 않아서 고요해지면 졸리고, 각성하고 있으면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느라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 어렵다. 다만 다행인 것은 명상을 배우고 있어서 엘리아데가 설명하는 명상에 관련된 내용이 조금 더 이해가 된다는 점이다. 상키아 학파, 요가 학파, 불교에서는 모두 요가와 명상이 해탈을 위한 제1의 관문이다.
명상은 일단 눈을 감아서 시각을 차단한다. 물론 숙련자라면 눈을 뜨고 해도 된다. 그리고 코끝의 호흡에 집중하거나 또는 배꼽 아래 배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호흡이 길면 긴 것을 알아차리고, 호흡이 짧으면 짧은 것을 알아차리고,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남을 알아차리고, 계속 호흡에 집중하는 것이다. 감각, 감정, 생각으로 향하는 주의를 거두어들이고 코끝의 호흡을 계속해서 관찰한다. 이러한 행동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정신적 작용의 흐름과 방향을 제어하는 일이다.
우리는 시시각각 오감을 통해 세상의 정보를 받아들이며 그에 따라 호불호의 감정이 생기고 시시비비의 생각이 일어나면서 지금의 시간과 공간을 살고 있고 이것은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의식’을 만들어가는 생명 활동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적들(포식자, 질병, 자연재해 등)에 대한 방어체계이다.
하지만 명상과 요가 수행의 목적은 인간이 자연적인 성향들에 따르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적 조건을 초월 또는 폐기하는 것이다. 에카그라타(하나의 점에 집중하는 상태)가 의식 상태의 동요와 흩어짐을 종식하는 것이라면, 아사나(안정되고 편안한 요가 자세)는 무수히 가능한 몸의 자세를 단 하나의 움직이지 않는 성스러운 자세로 만들어 육체의 운동성과 유동성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에카그라타와 아사나는 인간 존재의 고유한 실존 양상을 소멸시키고자 하는 첫걸음이다.
그런데 인간 존재의 고유한 실존 양상을 소멸시키는 것을 ‘통합과 전체화를 향한 경향’(『세계종교사상사2』p89)이라고 엘리아데는 말한다. 인간 실존의 고유한 양상들을 초월하고 폐기하는 것이 무엇을 무엇에 통합하고 전체화한다는 것일까?
3. 통합과 전체화를 향하여
수행자는 수행이 지속되는 동안에 움직이지도 않고, 호흡에 리듬을 부여하고, 시선과 주의를 한 점에 고정하여 요가 수행자는 ‘집중’할 수 있으며 ‘통합’을 획득할 수 있다. 프라티야하라는 ‘감각의 후퇴’, ‘방심 상태’로 번역되는데 감각적 활동을 외적 대상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감각이 스스로의 내부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다.프라티야하라는 심리-생리적 고행에서의 최고 단계이다. 요가 수행자는 외부 세계의 자극과 자신의 잠재의식에 지배를 받지 않게 되고 ‘사고를 한 점에 고정하게’ 된다. 디야나(선정禪定)는 ‘통합된사고의 흐름’이다. 인식하는 자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인식의 대상 사이에 실질적인 일치가 존재한다.(같은 책, p95) 인식에서 상태로의 이행이며 인식에서 존재로 지평의 단절이 일어난다라고도 표현한다. 명상하는 수행자가 집중하고 있는 자신의 내부가 사라지고 수행자와 수행자의 내부와 외부가 모두 하나가 되는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아무리 읽어도 도통 알 수가 없어서 유투브 동영상을 찾아보았다. 머리로 아는 무아와 무상이 아닌 몸으로 체험하는 무아와 무상의 상태라고 할까? 삼매를 닦으면 나와 너라는 분별의 눈이 아닌 지혜의 눈이 생겨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고 한다.
이런 수행을 계속하면 ‘기적의 힘’을 획득할 수 있는데 전생을 볼 수 있고 눈과 귀가 밝아지며(천안통, 천이통) 하늘을 날거나 은신술을 발휘할 수 있는 초능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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