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종교사상사2] 3학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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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헤미안 작성일25-09-24 00:04 조회65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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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서 자유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 Vs 고통과 직면하는 길
그동안 공부해왔던 불교에서는 태어나고 죽는 일련의 과정 모두를 고(苦)로 보았다. 고통의 원인은 욕망에 있고 욕망의 근원은 내가 있다고 착각하는 환상 때문이기에 무아를 깨닫는 것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혜를 통한 통찰과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 중요했다.
나는 얼마 전 TV에서 우연히 53년 동안 지리산 지게꾼 생활을 해온 분을 보았다. 짐을 진 몸으로 잠시 쉬기 위해서는 한 쪽 무릎을 땅바닥에 꿇어야 했기에 그의 무릎에는 굳은살이 두텁게 박혀 있었다. 전문 산악인들조차 오르기 힘든 천왕봉을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에 세 차례씩 등반하는게 얼마나 힘들까 싶은 나의 우려와는 달리 놀랍게도 그분의 표정은 너무나 평온했다. 나는 한편으로는 묵묵히 자기 일을 수행하는 그의 모습에서 감동 받았고, 한편으로는 다른 편한 직업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왜 그는 고통스런 직업을 고수하는지, 왜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한 학기동안 공부하고 있는 『세계종교사상사2』(미르치아 엘리아데, 이학사)를 관통하는 주제가 떠올랐다. 저자가 2권 전체를 통해 나타내고 있는 주제는 종교사에서 ‘구원’이 갖는 의미에 대한 것이었다. 구원 개념은 인간이 자기 존재의 한계를 인식하는데서 비롯되므로 그것은 삶에서 고통을 느끼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지리산 지게꾼의 삶을 보면서 적극적으로 고통과 직면해온 고행자들에게 고통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다. 여기에서는 인도 상키야 학파와 요가학파에서 고통을 극복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그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고통이란
일반적인 의미에서 고통을 크게 정신적⦁심리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으로 나눌 수 있다. 정신적 고통은 욕망의 좌절, 상실에 대한 슬픔과 우울 등으로 마음의 흐름이 우주의 리듬에서 벗어났을 때 겪게 되는 괴로움이다. 따라서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통찰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감에 따라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에 반해 육체적 고통은 물리적 통증을 유발한다. 갑작스러운 재난이나 사고로 인한 신체의 훼손 또는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아픈 곳을 치료하여 원상태에 가깝게 신체를 회복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기꺼이 육체적 고통을 감수하는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에게 있어 육체적 고통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인도 사회가 근본적인 위기에 직면했을 때 인도대륙이 힌두교화 되었고 힌두화 된 인도에서 종교는 인간이 지니는 보편적 고통을 다루는 한에서 가치가 있었다. 인도사상에서 고통이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지는 “모든 것은 고통이다”라고 정의되는 우파니샤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인간의 경험은 반드시 고통을 만들어 내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의 계시가 해방의 조건이 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시간 속에 존재하는 점에서는 인간과 신, 동물이 공통적이지만, 인간만이 고통의 상태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방법을 안다면 고통 자체가 끝이 아닌 것이다.
고통에 대한 태도
인도의 모든 철학과 명상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는 바로 이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것은 다른 말로 구원, 인간적 조건의 폐기, 초월, 자유, 해탈 등으로 표현되었다. 인도 사상의 핵심은 최고의 실재인 브라흐만이 마야(무지, 환상, 꿈)에 의해 가려짐으로써 개별적으로 존재하게 된 아트만을 다시 브라흐만과 일치시킬 수 있게 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었다. 원초적 실재인 프라크르티에서 나온 붓디(지성)는 현상과 인식적 관계만 유지하는 심리-정신적 작용일 뿐 정신 자체는 아니었다. 자유로운 정신으로 실재하는 초월적 실재(푸루샤)와는 어떤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고통의 원인은 바로 이러한 심리-정신적 작용과 정신을 혼동하는데 있었다. 바로 푸루샤와 심리-정신적 생명의 흐름을 혼동하는 무지에서 비롯하였다.
상키야 학파에서 구원(해탈)은 정신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었고, 정신을 잘 인식하여 받아들일 때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었다. 인식은 “계시”에 의해 얻어질 수 있었다. 물질은 푸루샤의 해방을 목적으로 삼았으며, 프라크리티의 가장 수준 높은 표현 방식인 지성은 계시의 전 단계로 작용하였다. 자기 계시가 실현되자마자 지성은 정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실체 중에 재흡수 되는데 그것이 바로 ‘생명 속에서 해탈한 상태’였다(같은 책 p83). 해탈한 상태지만 아직 카르마의 찌꺼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삶을 지속하였고, 정신이 완전히 해탈하는 순간은 죽음을 맞이하여 육체를 떠날 때라고 여겨졌다.
고전 요가학파에서 해탈 또는 자유는 고행과 명상에 의해 가능했다. 정신을 분리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상키야 학파와 달리 요가학파에서 요가의 목표는 의식의 정지를 체험하는 것이었다. 요가 명상의 출발점은 단일한 대상(에카그라타)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으로, 에카그라타 훈련은 심리적 흐름을 만들어내는 감각적인 활동과 잠재의식의 활동 모두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요가의 기법에는 야마(yama :억제), 니야마(niyama :훈련), 아사나(asana :요가 자세)가 있다. 야마는 범속보다 정화된 상태를 획득하는 것으로 아힘사(불살생), 사티야(거짓말 않기), 아스테야(도둑질 않기), 브라흐마차리아(성적 욕망의 억제), 아파리그라하(탐욕 없애기) 등이 포함되었다. 니야마는 일련의 육체적⦁정신적 훈련이었고, 아사나에서 참된 의미의 요가가 시작되었다. 아사나에서는 아무런 노력없이 몸의 자세를 단 하나의 움직이지 않는 성스러운 자세로 환원시켜 육체의 운동성과 유동성을 멈추게 했다. 바로 의식의 상태를 억제하는 요가 수행의 목표에 도달함으로써 인간적 조건을 초월하게 하였다( 『요가수트라』의 저자 파탄잘리는 ‘의식의 상태를 억제하는 것이 요가의 목표’라고 했다). 그 외에 요가 기법에는 프라나야마(pranayama :호흡조절), 프라티야하라(pratyahara :감각활동에서 해방), 다라냐(dharana :집중), 디야나(dyhana :명상) 등이 있었다.
요가에서 고행자의 모든 노력과 정신적 훈련의 최종적인 결과인 삼마디(samadhi :자기 몰입상태, 내부로의 흡수, 집중)에 이르면 ‘인식’에서 ‘상태’로 존재론적 변화가 일어났다. 따라서 파괴되어야 할 것을 경험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요가의 기법이자 실천, 즉 고행이라 할 수 있었다. 요가학파에서는 심리-정신적 작용의 흐름을 구성하는 무지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의식의 상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없다고 보았기에 잠재의식과 의식의 순환을 단절시키는 것이 필요했었다. 삼마디에 도달했을 때 프라크리티의 지배로부터 푸루샤의 해방이 실현될 수 있었다. 지성은 사명을 마치고 물러나 푸루샤로부터 이탈해 프라크리티 속으로 재통합 되었고, 수행자는 해탈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지반무크타(살아있는 상태에서 해탈한 자)였으며 더 이상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으며, 정지해 있는 현재 속에서 살아간다(같은 책 p99). 이러한 정신의 존재양식은 의식에 있어서 대상의 완전한 결여, 완전한 공이 된 자기 몰입 상태를 의미했기에 엘리아데는 이를 “경험”이 아닌 “계시”라고 불렀다.
자유로 가는 길
지리산 지게꾼의 일상에서 감동을 받은 것이 어쩌면 그의 삶 자체가 나에게 고행의 의미로 다가왔기 때문일 수 있다.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우주와 신체가 변환하는 모습을 엿본 것은 아닐런지. 마치 고대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이 정지된 자세 하나에 몰입하듯 묵묵히 산길을 오르내리는 그는 걸음걸음 하나에만 몰입하고 있었을 수 있다. 삶에서 고통이 주는 의미, 고통이 고행이 될 수 있는 변환점이 각자의 일상에서 스쳐가고 있을지 모른다. 편리함과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함으로 통하는 현대인들에게 일상에서 겪어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성찰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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