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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종교사상사2]발제, 제17장 브라만교와 힌두교: 최초의 철학과 구제의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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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켜니 작성일25-07-15 17:39 조회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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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종교사상사217장 발제/25.7.15/오켜니

 

17장 브라만교와 힌두교: 최초의 철학과 구제의 기법

 

발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놀라운 내용을 포함한 17장이었다. 삼마디의 실현은 절대적 존재(브라만)’를 세상에 탄생시키는 것이라든지, 집중과 명상의 끝에 얻어지는 기적의 힘에 관한 내용, 인간의 구원은 인간에게 불가결한 고통에서 시작한다는 것 등이 놀라웠다. 삼마디가 비이원성의 시원의 상태라는 것은 중국 도교가 지향하는 태아 상태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신에 의한 구원이 아닌, 나의 내부로 들어가 개체로 분화되기 이전의 정신 상태로 회귀하는 모험을 감행하는 수행자들에게 감동했다. 정신(푸루샤)이 고립되어 있고 무관심하며 방관자라는 것이 제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의식의 상태, 심리적·정신적 상태를 정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참나와 자기 등으로 표현되는 정신(푸루샤)은 평범한 인간인 우리가 감각하지 못한 무엇인가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다.

 

135. ‘모든 것이 고통이다

우파니샤드와 붓다 시대 이후 인도 대륙 종교사상의 중심 명제와 원동력은 모든 것은 고통이며, 모든 것은 무상하다!’였다. 인간의 경험은 고통을 만들어내고 쾌락 이후에는 고통이 따라온다. 인간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하는 교의나 방법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지만 보편적 고통의 발견이 염세주의로 귀착되지는 않았다. 고통은 오히려 해방을 위한 필요 불가결한 조건으로 이해되었다. 인도의 종교가 공통으로 가지는 확신은 해방을 얻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도 대륙의 아리아화 브라만교의 확산 힌두교의 확산

(인도 사회의 근본적인 위기의 시대)

 

136. 최상의 깨달음을 얻는 방법

인도의 철학과 명상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인간의 구원과 해방은 인간적 조건을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도둑에게 자기의 존재를 도둑맞은 결과 육체의 포로가 되었다(찬도기야의 설화에 대한 샹카라의 해석). 스스로 만든 환상의 포로가 되어 있던 인간은 현세적 사건의 예속으로부터 해방되며, 존재의 참된 모습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이 길을 헤매는 방랑자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무지의 눈가리개를 벗은 인간은 마침내 기쁨과 평안함으로 자신의 아트만을 발견하게 된다. 무지는 참된 자기(아트만, 푸르샤)를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지식은 눈뜸과 동일하다.

구원은 인간적 조건을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안에 내재하는 영원함을 알아가는 일이다.

 

137. 사상의 역사와 문헌의 연대

브라만교에서 유래하는 세 개의 다르샤나(학파)-베단타, 상키야, 요가-는 불교와 함께 공통된 범주적 기반을 공유했다. 이것은 아비드야(무지, 무명)-카르마()-삼사라(윤회)의 연속성, 존재와 고통의 동일시, 무지를 수면··만취·속박으로 해석하는 관점이다.

 

138. 체계화되기 이전의 베단타학파

베단타의 가장 오래된 문헌은 바다라야나가 쓴 브라흐마 수트라이다. 여기서 바다라야나는 수많은 문헌을 검토하여 브라흐만과 개별적 아트만의 관계를 세 가지 이론으로 언급하고 있다. 첫 번째 이론은 아트만과 브라흐만을 동일시한다. 두 번째 이론은 해탈하기 전까지는 아트만과 브라흐만이 완전히 별개로 분리되어 있다고 한다. 세 번째, 베단타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트만이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지만 브라흐만과 동일시될 수 없다.

브라흐마 수트라는 지극히 간결하고 수수께끼 같은 경전인데 스승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비망록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800년 무렵 샹카라는 이 책에 대한 천재적인 주석을 달았다. 샹카라는 우파니샤드의 유산(브라흐만과 아트만의 동일성)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시대의 요청에 맞게 개조하고자 노력했다. 샹카라 이후에도 여러 세기에 걸쳐 많은 사상가가 우파니샤드의 사상 체계를 가다듬었다(상키야학파, 요가학파와 다른 점). 상키야학파와 요가학파에 대한 주석은 주로 4-8세기에 만들어졌는데, 베단타학파는 샹카라 이후에 개화기를 맞이하였다.

 

139. 상키야-요가학파에서의 정신

상키아학파와 요가학파에서 세계는 실재이다(베단타에서 그러하듯 환상이 아니다). 세계가 존속하고 지속되는 이유는 정신의 무지때문이다. 우주의 다양한 형태, 그것의 현현과 발전 과정이 지속되는 이유는 정신, 즉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고, 그 무지에 의해 고통을 받고 또 그 무지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자기가 해탈을 발견하는 바로 그 순간, 창조물 전체는 원초적 실체(프라크리티) 속으로 다시 흡수될 것이다.

우파니샤드의 아트만과 마찬가지로 푸루샤(정신)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의 속성은 부정적이다. 자기Soi보는 자이며, 고립되어 있고, 무관심하며, 단순한 방관자에 불과하다. 푸루샤(정신)지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유는 욕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정신은 영원히 자유롭다. 의식의 상태’, 즉 심리-정신적인 생명의 흐름(우리가 생각하는 정신인 것 같다)은 정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푸루샤를 이렇게 파악하면 곧바로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만일 정신이 영원히 순수하고 무감각하며 자율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것이라면, 어째서 정신은 스스로가 심리-정신적인 경험 속에서 혼란에 빠지는 것을 용인하는 것일까? 또 왜 그러한 관계가 가능한 것일까?

인간은 지성(븟디)로 사물을 파악하고 이해한다. 자연의 소산(프라크리티의 소산)일 뿐인 븟디는 자기를 알 수 없고 다른 현상과 인식적 관계만을 유지할 수 있다. 지성은 초월적 실재와 어떠한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에 물질과 전혀 관계를 가지지 않는 순수한 인식을 통해서만 자기와 생명(즉 물질)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된 관계의 기원이나 원인을 이해할 수 있다.

상키야-요가학파는 고통의 원인이 무지’, 즉 심리-정신적인 작용과 정신을 혼동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원초적 실체(프라크리티)의 소산인 지성은 다른 현상과 인식적 관계만을 유지할 수 있다. 초월적이지 않다.

순수한 인식(정신)은 물질과 전혀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순수한 인식을 통해서만 자기와 생명(즉 물질)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된 관계의 기원이나 원인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순수한 인식은 인간의 현재적 조건하에서는 얻을 수 없다.

 

140. 창조의 의미 : 정신의 해탈을 돕기

원초적 실체(프라크리티)는 푸루샤와 달리 역동적이며 창조적이다. 원초적 실체는 구나(구성 원인)이라고 불리는 세 가지 존재 양상을 취한다. (1) 사트바(순질) : 광휘와 지성의 양상 (2) 라자스(*) : 기동력과 정신 활동의 양상 (3) 타마스(암질) : 정적인 타성과 심리-정신의 불명료한 양산이다. 구나는 이중적 성질을 가지는데 그것은 외계의 현상을 구성하기 때문에 객관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심리-정신적 생명을 유지하고 양육하고 조건 짓기 때문에 주관적이다.

세계의 창조는 준심리적인행위이다. 객관적인 현상과 심리-생리적(주관적) 현상은 공통의 모체(프라크리티)를 가지고 있으며, 그 둘을 구별하는 유일한 차이점은 구나의 형식일 뿐이다. 사트바는 심리-정신적 현상을 지배하고, 라자스는 심리-생리적 현상(열정, 감각적 행위등)을 지배한다. 하지만 물질세계의 여러 현상들은 점차로 밀도가 높아져 생기를 상실한 타마스(원자, 동식물체 등)의 산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상키야-요가학파는 심적 경험과 윤리 문제를 물질적 과정으로 본다. 선량함이란 정신의 성질이 아니라 의식에 의해 표현되는 정밀한 물질순수화라는 것이다. 인간과 우주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다.

비록 자기(푸루샤)는 우주의 창조로 인해 발생하는 환상과 혼란에 의해 가려져 있지만, 프라크리티는 오로지 푸루샤의 해탈만을 지향하는 목적론적 본능에 따라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브라만에서부터 마지막 풀잎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정신이 지고의 인식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창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라크리티 마하트(‘위대한 덩어리라고 불리는 에너지의 덩어리로서 자기 모습)의 상태 아항카라(아집, 자아 존재의 모호한 의식을 가진, 지각력 있는 단일한 덩어리)의 상태 자아의 전신(前身)이 나타남, 이중의 발전 과정을 거쳐 아항카라는 내적 우주와 외적 우주라는 두 종류의 세계를 창조한다.

 

141. 해탈의 의미

정신은 영겁의 과거에서부터 심리-정신적 경험, 즉 생명과 물질의 관계라는 환상의 포로가 되어왔다. 그것은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아드비야(무지)가 계속되는 한 카르마()에 근거한 존재가 있고 거기에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무지는 부동하며 영원한 푸루샤와 심리-정신적 생명의 흐름을 혼동하는 것에서 생긴다.

구원을 향한 인식에 도달하는 최초의 단계는 정신이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고통은 우리와 어떠한 관련도 가지지 않는, 객관적 사실로서, 나아가 정신의 바깥에 머무르기 때문에 의미와 가치를 결여한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의미와 가치는 지성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자기와 동일시되는 인간의 개성에 경험이 관계할 때에 발생한다. 그러나 이 관계는 환상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쉽게 제거할 수 있다. 자기가 자유롭고, 영원하고, 행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 얽혀 있는 고통, 감정, 의지, 사고 등은 모두 우리와 무관한 것이 되어버린다. 정신은 하나의 관객에 불과하며, ‘해탈은 영원한 자유에 대한 자각일 뿐이다.

 

142. 요가 : 단일한 대상에 대한 집중

요가는 고행의 기법과 명상의 방법을 나타내는 말로 아주 오래전부터 브라만교, 불교, 자이나교 문헌에서 발견되었다. 어느 시대 인물인지 알려지지 않은 파탄잘리(BC 2세기? AD 3~5세기?)는 요가학파의 이론적, 기술적 전통을 수집하여 요가수트라를 썼다. 상키야학파가 끝나는 지점에서 고전 요가학파가 시작된다.

파탄잘리는 요가를 의식의 상태를 억제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요가의 목표는 착오와 환상, 일상적 심리 체험의 전체를 버리고, 초감각적이며 초이성적인 의식의 정지를 체험하는 것이다.

요가학파는 칫타브리티(의식의 소용돌이)의 여러 무리, 종류 그리고 다양성을 하나하나 파괴해가는 작업에 온 힘을 쏟는다. 현재의 의식 소용돌이를 파괴한다 하더라도, 잠재의식 안에 감추어져 있는 거대한 바사나(잠재적인 것)’에서 솟아나는 또 다른 소용돌이가 곧바로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바사나는 요가학파의 심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끊임없이 영양분을 섭취하는 심리-정신적 작용의 흐름, 곧 무한히 연속되는 칫타브리티인 바사나가 있고 잠재적 양상으로 인해 통제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어려운 바사나가 있다. 칫타브리티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잠재의식과 의식의 순환을 단절시키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요가 명상의 출발점은 단일한 대상(에카그라타)에 의식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에카그라타의 훈련은 심리적 흐름을 만들어내는 두 개의 원인, 즉 감각적인 활동과 잠재의식의 활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단일한 대상에 의식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훈련과 기법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된다. 요가수트라는 고전적인 요가 기법의 8단계를 제시한다. (1) 억제(야마) (2) 훈련(니야마) (3) 자세(아스나) (4) 호흡 조절(프라나야마) (5) 외적 대상에 사로잡힌 감각 활동을 해방시키기(프라티야하라) (6) 집중(다라냐) (7) 명상(디야나) (8) 의식의 정지 상태(사마디,삼매)이다.

 

143. 요가의 기법

요가 수행의 처음 단계인 야마는 계율(불살생, 거짓말과 도둑질하지 않기, 성적 욕망의 억제, 탐욕 없애기)을 지킴으로 범속보다는 우월한 정화된상태를 획득하는 것이다. 야마와 함께 요가 수행자는 니야마, 즉 일련의 육체적·정신적 훈련을 쌓아야 한다.

참된 요가의 시작은 아사나의 실천에서부터이다. 아사나는 안정되고 편안한것이라고 정의되는 요가 자세를 가리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동일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인데, 그때에만 아사나가 집중을 용이하게 한다. 에카그라타가 의식 상태의 동요와 흩어짐을 종식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사나는 무수히 가능한 몸의 자세를 단 하나의 움직이지 않는 성스러운 자세로 환원시킴으로써 육체의 운동성과 유동성에 종지부를 찍는다. 나가아 통합전체화를 향한 경향은 모든 요가 수행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아사나가 움직임의 거부를 의미한다면, 호흡 훈련인 프리나야마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이고 리듬감 없는 숨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호흡과 심리적 상태 사이에는 항상 관련이 있다. 호흡의 리듬과 의식의 상태를 결합하는 관계는 요가 수행자들에 의해 경험적으로 증명되어왔다. 아마 그 관계는 의식을 통합하는도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호흡에 리듬을 부여하고 또 그 속도를 점진적으로 늦추는 훈련에 의해 요가 수행자는깨어 있는 상태에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어떤 의식 상태, 즉 잠을 자는 것과 매우 유사한 어떤 의식 상태로 뚫고 들어갈수 있다.프라나야마를 통해 수면의 리듬을 획득함으로써 요가 수행자는 명석함을 잃지 않은 채 잠자는 사람에게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의식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

수행자는 자기가 획득한 집중의 수준을 프라티야하라의 정도를 통해 평가할 수 있다. 프라티야하라(감각의 후퇴, 방심 상태)감각적 활동을 외적인 대상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는 능력이다. 감각은 대상을 향하는 대신에 스스로의 내부에 머무른다’. 프라티야하라는 심리-생리적 고행에서의 최고 단계이다.

요가 수행자는 외부 세계로부터의 자극과 잠재의식의 역동적 힘에 대해 자율성을 얻게 됨으로써 집중(다라냐)와 명상(디야나)를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요가의 명상은 통합된 사고의 흐름’(파탄잘리), ‘명상하는 대상을 동화시키려는 정신적 노력의 지속이며, 동시에 다른 대상을 동화시키고자 하는 모든 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비야사).

 

144. 신의 역할

상키야학파와 달리 요가학파에서는 신, 즉 이슈바라의 존재를 인정한다. 고행자의 의지와 자력에만 의존하는 주술적 요가 전통과는 별개로, 요가 수행의 최종 단계에서 신에 대한 헌신을 통해 해탈을 더욱 손쉽게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신비적요가 전통이 존재했다. 이슈바라는 전능함이나 신비함을 가진 신이라기보다 요가 수행자의 원형, 즉 위대한 요가 수행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요가 교단의 수호신이거나 아득한 옛날의 성인들의 스승이었을 것이다.

 

145. 삼마디와 기적의 힘

샤머니즘에서 망아의 체험인 엑스터시에 대립하는 요가 특유의 체험을 가리키기 위해 엘리아데가 만든 용어는 엔스타시스enstasis’(삼마디)이다. 삼마디는 고행자의 모든 노력과 정신적 훈련의 최종적인 결과이며 또한 그것의 완성이다. 삼마디는 인식적 범주나 상상력의 도움 없이 사유가 대상의 형식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명상의 상태이며, 그러한 상태에서 대상은 그 자체로서 그것의 본질 그대로를, 그리고 마치 그 자체가 공인것처럼 드러낸다. 거기에는 대상에 대한 인식과 인신의 대상 사이에 실질적인 일치가 존재한다. 삼마디는 인식이라고 하기보다는 하나의 상태’, 즉 요가에 특유한 자기 몰입적 양상을 가리킨다.

삼프라즈냐타 삼마디(유상 삼매)

아삼프라즈냐타 삼마디(무상 삼매)

공간의 한 점이나 관념에 생각을 고정시킴

관계를 떠난 삼마디, 단순히 존재에 대한 완전한 이해일 경우

진리를 이해하게 하고 고통을 종결시키는 한에 있어서 해탈의 수단이 된다

선행하는 심적인 모든 기능의 인상을 파괴하고, 카르마의 힘을 저지시킨다

삼마디의 완성에 이르는 몇 가지 단계를 포함한다

수행자가 인위적으로 유도하지 않고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에 환희를 준다

인식에서 상태로의 이행

인식에서 존재로의 전환

지평의 단절이 발생한다

 

요가 수행자는 이 단계에 도달하면 기적의 힘을 획득하게 된다. 어떤 단일한 대상 혹은 어떤 일군의 대상 전체에 대한 집중명상을 통해 삼마디를 실현함으로써 요가 수행자는 경험된 대상에 관한 신비한 을 얻는 것이다. 자기의 전생을 이해하거나 하늘을 날거나 은신술을 발휘하는 등 초능력을 획득하는 것도 가능하다.

명상된모든 것은 동화되고 소유될 수 있다. 체념과 고행 덕분에 인간, 악마 혹은 신은 강력한 힘을 얻게 되고, 그 순간 우주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

 

146. 최종적 해탈

요가 수행자가 삼마디의 최종 단계에 도달했을 때에 저절로 획득하게 되는 빛(프라냐, 지혜)에 의해 절대적 고립’, 다시 말해 프라크리티의 지배로부터 푸루샤의 해방이 실현된다. 니로다(모든 심리-정신적 경험의 최종적인 정지)는 완전한 공이 된 자기 몰입이며, 그것은 더 이상 경험이라고 불리지 않고(의식과 세계 사이에는 이미 어떠한 관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계시라고 불러야 할 무한정한 상태를 가리킨다. 지성은 자신의 사명을 마치고 나면 물러난다. 그것은 스스로 푸루샤로부터 이탈하여 프라크리티 속으로 재통합된다. 요가 수행자는 해탈에 도달한다.

삼마디에 의한 최초의 비이원성의 회복은 실재가 주체와 객체로 분화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상황에 새로운 요소, 즉 통일과 지복에 대한 인식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시원으로의 회귀라고 말할 수 있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해탈한 자는 자유와 초의식의 차원에 의해 풍성해진 시원적 상태를 회복한다. 이 새로운 존재가 확립된 다음에 원초적 존재의 완전성이 재통합된다. 이 자유의 의식은 우주의 어느 곳에도, 생명의 차원에도, 신화적 신성의 차원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절대적인 존재(브라만)에게서만 존재한다.

 

** 브라만교에서 유래하는 세 개의 학파(베단타, 상키야, 요가) **

 

베단타 학파

상키야학파

요가학파

신의 여부

 

무신론

최고신 이슈바라

해탈에 이르는 도구

 

형이상학적 인식

명상

고전 시대의 대표 문헌

바다라야,

브라흐마 수트라

최고(最古)의 체계적 문헌

이슈바라 크리슈나, 상키야 카리카

파탄잘리,

요가수트라

유명 해설자

샹카라(788?~820)

 

비야사(p94)

주요 이론

브라만과 아트만의 동일성

참된 자기는 이 세상과 어떠한 관계도 가지지 않는다(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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