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3)] 이 동물말을 보라!_강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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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북촌 작성일26-06-17 17:05 조회30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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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3] 이 동물말을 보라_강창원_061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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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26-06-17 17: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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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물말을 보라(Ecce animot)!
자크 데라다의 자서전적 동물 선언
강창원
‘동물말(animot)’은 자크 데리다가‘동물들(animaux)’과‘말(mot)’을 합성하여 만든 조어(造語)이다.이 단어는1997년 스리지에서 진행된 “자서전적 동물”이라는 제목의 대중강연을 통해 제안되었으며,그가 연구해왔던 ‘동물’에 관한 철학적 입장과 관점을 정식화한 개념이다.이번 에세이는 데리다가 스리지 강연에서 ‘동물말’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되짚어 보며 그 의미를 나름대로 정리해 본 글이다.
데리다는 지난2세기 동안 인간에 의한 전대미문의 동물 예속화가 진행되어 왔음을 언급한다.동물학,생태학,생물학,유전학등의 지식을 활용하여 동물에 대한 대규모 사육과 조련,유전학적 실험,인공수정과 동물고기 생산의 산업화,게놈 조작 등‘동물 종족 말살’이라 할 만큼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해 왔음을 고발한다.동물이지만 동물이기를 거부해왔던 인류는 오랜 시간 스스로 동물에 대한‘지배와 처분의 권리’를 가졌음을 주장해왔다.이 권리의 연원은 성서의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인간은 신(神)에 의해 동물보다 늦게 창조되었지만,신(神)으로부터 지상의 모든 동물들의 이름을 짓고,부를 수 있는 권리를 독점적으로 부여 받았다.인간은 신이 제공한 배타적 동물 호명권과 함께 사고능력,언어능력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으로 동물과 구분되어 왔다.동물을 이성이 없는 하나의‘사물’로 규정하는 인간–중심적 관점은‘시간이래로’인류의 의식 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았던 것이다.
이 동물말을 보라(Ecce animot)!
이 선언을 통해 데리다는 인간–중심적 사고에 기반을 두고 있는 ‘단수로서의 동물’의 폭력성에 거부감을 표현하며 동물 대신 ‘동물말’을 사용해 줄 것을 청중에게 요청한다. ‘이 동물말을 보라’는 익히 아는 바 니체의 서명(書名)을 패러디한 것이다.강연 도중 데리다는‘토리노 말’사건–이탈리아 토리노의 광장에서 마부에게 심하게 매질 당하는 말을 본 니체는 이성을 잃고 마차에 뛰어들어 오열하며 말의 목을 껴안고 쓰러졌다고 알려진 에피소드–을 통해 니체가 보여준 건 진정한 동정이었을 것이라는 언급을 살짝 남긴다.아마 니체처럼 동물에 대한 진정한 동정을 표현하기 위한 고민이 이 선언을 만든 배경이 되었던 건 아닐까 나름대로 추측해 본다.
인간으로서 동물에 표하는 진정한 동정심과 함께 이‘동물말’에는 동물에 대한 그의 철학적 고민이 겹겹이 쌓여 있다.강연에서는 ‘동물말’이라는 단어에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 성격이 다른 세 부분들이 융합된 단어임을 피력한다.의미적 측면에서 본다면‘동물말’그 자체가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기에‘키메라적’이라 할 수 있겠다.
데리다는 동물들이라는 복수적 의미가‘동물말’속에서도 작동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이 말을 창안해냈다.그는 인간에게는 모든 생명체를 동물이라는‘하나의 장소’와‘하나의 의미’속에 가둘 수 있는 권리는 없다고 주장한다.단수로서의 동물이 가지는 의미적 획일성을 극복하면서 생명체의 다수성을 품을 수 있는 말로 이‘동물말’이 쓰였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이다.그는‘동물말’이 동물 분류 시 언급되는 종(種)이나 유(類)가 아니며,또한 개체도 아니라고 부연설명 한다. ‘동물말’속에 포함되어 있는 다수성은 이미 존재하는 말인‘동물들’로는 전달할 수 없는 미세한 뉘앙스를 풍부하게 포함하고 있다.동물에서 단지 복수로서의 의미가 더해진‘동물들’에는 여전히 하나의 동질적인 범주라는 개념이 스며 들어 있기 때문이다.
‘동물말’은 인간과 동물을 확정적으로 나누는 단 하나의,불변의 경계선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데리다는 그렇다고 인간과 동물이 연속선상에 놓여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언급한다.이 지점에서 이른바‘접경성’의 문제가 떠오른다.데리다는 이 문제를 열흘 간 펼쳐지는 강연동안 중점적 다룰 주제로 소개하며‘접경성’의 문제를 깊이 있게 파고 든다.
데리다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그간 철학자들이 논의해왔던‘심연’이 놓여있음에 동의한다.하지만,이 심연에도 경계가 있고 그 경계의 가장자리들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데리다는 경계의 가장자리의 성격을 규정하며 세가지 철학적 명제를 부여한다.①인간과 동물 일반이라는 두 모서리의 단선적이며 불가분한 선을 그리지 않는다.즉,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확고부동한 경계선이 없다.②경계의 가장자리는 다수적이고 이질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그것은 자체의 역사를 지닌다.즉, 동물과 다른 존재로서 인간의 자기인식과 그 인식에 따라 살아왔던 인류의 모습들이 새겨져 있다.③인간의 경계너머 동물의 영역으로 가기 전,그 영토에는 완전히 대상화 될 수 없는‘다수의 조직’-이질적 다수성–들이 존재한다.즉,인간과 동물 사이에 놓인 심연의 경계 가장자리에는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 사이의 관계들,유기물과 무기물 사이의 관계가 만드는 조직체가 있다.이러한 관계들은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유동하므로‘명사’로 규정할 수 없다.고로,우리는 유기적인 것vs비유기적인 것,삶vs죽음의 이분법으로 경계의 가장자리를 논할 수 없다.다소 복잡하게 진행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데리다가‘동물말’로 포괄하고자 한 첫번째 의미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다수성이라 할 수 있겠다.
데리다가‘동물말’에 담고자 했던 또 하나의 의미는‘존재하는 그대로의 것에 대한 지시’이다.동물이라는 단어는 생생하게 살아있는/생명력 넘치는/생명활동을 하고 있는 어감을 가지기 어렵다.동물만으로는 구체적 상(image)이 떠오르기 어렵고,모호하며 추상적인 느낌마저 든다.동물은 고정된 시간과 공간을 살지 않는다.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며 자신의 신체와 외부 환경에 적응한다.생명현상은 한순간도 쉬지 않는 것이다.모든 생명체는 각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연의 일부를 자신 안으로 받아들여 흡수하고,나머지는 바깥으로 내놓는다.또한 종 보존을 위한 개체적 수준에서 생명 활동도 부단히 계속된다.데리다는 이처럼‘동물말’을 매순간 이어지는 생명활동을 하고 있는 존재로서의 동물을 지시하고자 했다.
‘동물말’을 통해 데리다가 표현하고자 의도했던 세번째 의미는‘말’을 사용하지 않는–데리다는 동물이 인간에 의해 말을 박탈당했다고 언급한다–동물에 대한 새로운 사유이다.동물에게 말은 부재하지만,자신의 있음/존재를 끊임없이 표현하고 있다.모든 생명체는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를 조직하며 스스로 자신을 촉발하며 자신을 나타내고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인간의 말로 환원할 순 없지만 이는 분명 자신을 서술하는 능력이다.동물은 이러한 자가운동성을 통해 자기 자신으로 표현하며 존재할 수 있다.다시 말해,생명은 그 어떤 종류이든 자서전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짧게 나마‘동물말’에 담긴 데리다의 생각을 살펴 보았다.우리 주변에는 인간에 의해‘동물’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억류되어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 동물들이 여전히 있다.그들은‘동물말’로서 지구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로,지금도 쉬지 않고 자서전적 활동을 하고 있다.다만,인간의 언어로 그 활동을 번역하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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