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의 형이상학](1)_인간, 포식자로서 인격적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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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수정 작성일26-06-24 15:59 조회34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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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의 형이상학』, 에드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가스뜨루
인간, 포식자로서 인격적 존재
2026.6.24. 최수정
1) 서구 근대성의 경우 인식하는 것은 ‘객관화하기’, ‘탈주체화하기’다. 이것은 주체와 대상을 ‘구별’하는 일이다.
2) 아메리카 원주민이 인식한다는 것은 ‘인격화하기’다. 이는 인식되어야 하는 ‘누군가’의 시점을 취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타자’의 형식은 곧 인격이다.(『식인의 형이상학』, 에드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 지음, 박이대승, 박수경 옮김, 후마니타스, 49p)
안티 나르시스
자크 데리다는 인간 언어가 그 자신과의 자기 목적적 관계에 매료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나르시즘’에(『동물, 그러니까 나인 동물』. 자크 데리다, 144p) 기반한다고 비판했다. 인간이 자신들의 언어로 동물과의 우월한 차이를 만들어내며 나르시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언어적 사유의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벤담의 ‘동물도 고통을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귀를 기울인다. 생명의 공통 특성인 ‘고통의 문제’를 통해 언어가 만들어낸 인간과 동물이라는 경계의 모서리에서 접경성을 사유했다. 그리고 고통에 대한 공감의 유대로 인간 언어에 사로잡힌 나르시즘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리고 에드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가스뜨루도 『식인의 형이상학』에서 실제로 무엇이 타자와 ‘우리’를 다르게 만드는지 자문하는 것은 이미 하나의 대답(21)이라며 ‘타자의 인간성을 손상시켜 자기 자신의 인간성을 우위에 둔다는 사실은 그렇게 하찮게 여겨지던 타자와의 근본적인 유사성을 드러내는(32) 대답이라고 역설한다. ‘거대 구분’, ‘배제 행동’이라는 형식은 인간종을 인류학적 서구의 생물학적 유사성으로 만들고, 서구와 다른 종 및 인간집단을 모두 결핍으로 나타내는 공통적 타자성 속에서 뒤섞어 버린다. 그리고 서구 유럽인이 다른 인종을 구분, 배제하고, 결핍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인간이 동물을 억압하던 기제와 너무도 비슷하다.
에드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까스뜨루에 의하면 인간과 동물에게 부여된 공통 조건은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성이다.(61p) ‘인간성’을 공통조건으로 갖고 있는 인간과 비인간 모두는 ‘수행적’이라 말할 수 있는 하나의 동일한 통각(aperception)방식을 갖고 있다.(42) 이것이 곧 ‘인격’의 조건이고, ‘보편적인 통각 형식’이 곧 인간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통각(痛覺)’이란 통증을 느끼는 감각적 원인이다. 그리고 이것은 ‘수행적’인 것으로 사회적 관계에 의해 구성되고, 집단적인 것이라는 양태 아래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유사한 영혼성을 의미한다.
인격의 사회적 행위자성
『식인의 형이상학』 저자에 의하면 ‘인격’이란 ‘하나의 생물사회적 다양체’다.(45p) 또한 ‘내재적 잠재력 차이에 의해 구성되는 지향성의 중심’이다.(46) 저자는 ‘인격’이란 ‘사회적 관계의 현실화’(51), 즉 공통감의 지향적 태도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사회는 ‘생물사회’를 말하는데, 여기서 모든 신체적 관계는 사회적이고, 모든 차이는 정치적인 ‘다우주multivers’의 세계(54)관계의 표현이다.
이런 ‘사회적 관계의 현실화’에 동의하지 않는 사물들의 상태 혹은 개별체는 샤머니즘적 세계에서는 무의미하다. 그런 것은 인식의 잔여물, 정확한 인식에 저항하는 ‘비인격적 요인’이다. ‘인격’으로 존재하는 인간과 비인간은 서로 행위자의 ‘이웃’으로 규정되어야 한다.(52) 언제나 대상이 주체와 입증된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는 비인간 행위자들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동 방식을 인간적 문화의 형식 아래서 지각한다는 관념이 전제된다. 이때의 ‘인간적 문화 형식’은 ‘생물적 다양체’로서의 ‘인격’을 가진 인간의 문화다. 이것은 인간과 비인간의 통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이들을 말하고 있다.
먹고 먹히는 관계
『식인의 형이상학』에서 흥미로운 점은 자신을 ‘인격’으로 보는 존재가 거하는 ‘사회적 관계’가 ‘포식의 관계’라는 것이다. 포식동물들은 자신을 인간으로 자각하고 자기들이 먹는 존재를 먹잇감으로 본다. 실제로 저자는 관점주의적 전도(顚倒)의 기본적인 차원 가운데 하나는 포식자와 먹잇감의 상대적이고 관계적인 지위에 관련되어 있다(43p)고 강조한다. 여기서 ‘인격성’과 ‘관점성’(하나의 시점을 차지할 수 있는 능력)은 ‘정도’, ‘맥락’, ‘위치’의 문제다.
따라서 ‘인간성’이란 ‘포식자나 먹잇감이라는 기초적 위치들에 따라 파생되는 것이다.’ 포식의 상대적 위치에 따라 우주의 모든 동물과 다른 구성 성분들은 ‘강도적으로 인격’이며 잠재적으로 인격이다.(44) 이것은 데리다에 의하면 타인의 흔적을 쫓아가는 사냥꾼의 능력이다. 먹잇감의 관점을 수용하고 그것을 수행하며 자기 삶을 구성하는 자서전적 능력이다. 포식자의 이런 위치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집단들, 다른 인격적 다양체들을 관점적 타자성이라는 상황 속으로 밀어넣는다.(46)
‘모든 생물은 포식자일 때 인간이 된다’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 인간은 ‘보편적 통각 형식’을 갖고 있는 포식자다. 그렇다면 이때 ‘인간’이란 어떻게 먹잇감의 고통을 덜어주며 먹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인격성과 관점성을 향상시키는 인간의 잠재능력(44)이 된다.
신화
이 우주에서 존재자들의 신체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이 아직 서로에게 모습을 감추지 않았던 ‘카오스모스’(56p) 세계가 있었다. 이 세계는 ‘무한한 차이’에 의해 가로질러진다. 이것은 유한하고 외적인 차이가 아니라, 각 인물 행위자에 ‘내적’이고 질적인 다양체의 체계다. 다른 사물이 될 수 있다는 ‘내속적 역량’이다.(58) 이런 의미에서 각 인물은 자기자신과 무한히 달라지는데, 신화적 담론은 오로지 그 인물을 대체하기 위해, 즉 변형하기 위해 그를 단숨에 ‘위치’시킨다. 이러한 “자기” 차이auto-différence는 “정신”이라는 일반개념의 속성이다. 이런 이유에서 모든 신화적 존재자는 정신으로(그리고 샤먼으로) 이해된다.
요컨대 신화는 유동하는 강도적 차이가 지휘하는 존재론적 체제를 제안한다. 신화적 주체는 순수한 잠재성이면서, “이전에 이미” “앞으로 될” 어떤 것이고, 그래서 현재로서는 규정된 바가 없다. 신화적 거대 분할이 보여주는 것은 자연과 구별되어 가는 문화라기보다, 문화에서 멀어지는 자연이다. 즉, 신화들은 인간을 통해 계승되고 보존된 특성들을 동물이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들려준다. 인간이 과거에 비인간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이 과거에는 인간이었다는 것이다.(61)
신화란 관점주의의 보편적 도주점으로서, 어떤 존재 상태에 관해 말한다. 그 상태에서는 신체와 이름, 영혼과 행위, 나 자신과 타자가 전주관적이거나 전객관적인 하나의 동일한 환경에 잠긴 채로 상호 침투한다.
관점주의
에드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가스뜨루는 ‘관점주의’는 우리에게 ‘사유에 대한 다른 이미지를 투사하는’ ‘개념’, 즉 ‘개념에 대한 개념이다.’(75p)라고 정의한다. 이것으로 우리는 개념에 대한 인류학적 개념에 도달할 수 있다. 모든 창조적 사유가 명제 외부에 있음을 받아들이고, 범주, 재현, 믿음이라는 전통적 일반개념들과 전혀 다른 방향이다.
관점주의는 사유를 영속적으로 탈식민화하는 상태에 진입하는 개념이다. 관점주의의 모티브는 각 종의 가시적 형상은 인간적인 내적 형상을 감추는 단순한 포장(거죽)이라는 것이다. 같은 종의 눈이나 샤먼 같은 몇몇 관점 전환자의 눈만이 ‘내적 형상’(키메라적 포식자?)에 접근할 수 있다.’(58p)
관점주의는 신화 안에서 시점들의 차이가 무효화되는 동시에 격화되어 가는 자취를 인식한다.(60) 관점주의는 인간, 비인간의 차이를 각 존재자의 내부로 가져오는 정도적 차이를 긍정한다. 모든 존재자가 그들 자신에게는 인간이라는 양식으로 존재한다면, 다른 존재자에게는 그 어떤 존재자도 인간이 아니다. 인간성은 각자에게 반성적인 것이지만, 상호적인 것일 수는 없다. 최종적으로 이런 것이 “영혼”의 의미다. 만일 모두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그 누구도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다. 만일 모두가 인간일 수 있다면, 명백하고 분명한 방식으로 인간인 것은 없다.
어느 인간이 콘도르가 하듯 사체에 꾄 구더기를 구운 생선처럼 보기 시작한다면, 그의 영혼은 콘도르에게 도둑맞은 것이다. 그는 콘도르로 변형되고, 샤먼이 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관점은 재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점이란 신체에 있는 반면, 재현은 정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존재자들의 신체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이 아직 서로에게 모습을 감추지 않았던 ‘투명한 시대’가 있었다. 어떤 시점에 자리 잡을 능력이 있음은 아마도 ‘영혼’의 역량일 것이고, 비인간들은 ‘정신’을 가지는 한에서 주체다. 그러나 시점 간 ‘차이’는(또한 하나의 시점은 /하나의 차이와 전혀 다르지 않다)영혼에 있지 않다. 영혼은 모든 종에서 형식적으로 동일하고, 어디에서나 같은 것만을 지각한다. 즉 언제나 포식자로서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차이’는 신체의 종적 특수성에 의해 주어져야만 한다.(67)
그런데 여기서 ‘신체’란 정서들에 관한 이야기다. 정서가 신체적으로 구별되는 각각의 종에 또한 그들의 역량과 허약함에 독특성을 부여한다. 신체적 외형은 차이들의 강렬한 기호다. ‘신체’란 ‘자기 차이화’하는 ‘정신’이다.(58)
‘신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특별한 생리학이나 특정한 해부학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아비투스(집단의 행위 양식), 에토스(사회 집단을 특징짓는 기풍이나 관습), 에소그램(동물의 행태를 그림으로)을 구성하는 존재 양식과 방법의 집합이다. 영혼들의 형식적 주관성과 기관들의 실질적 물질성 사이에 신체로서의 중앙면이 있다. 이 중앙면은 정서와 능력이 묶여 있는 다발로서의 신체이며, 관점들의 기원에 놓여 있다. 관점주의는 신체적 매너리즘이다.(신체적 한계다)(68)
애매함
원주민의 관점주의는 ‘애매함’에 관한 학설이다. 다시 말해 동음이의적 개념 간에 성립하는 참조적 타자성에 관한 학설이다.(91) 여기서 애매함은 상이한 관점적 위치 사이의 대표적 소통 방식처럼 나타나고, 그리하여 인류학적 계획의 가능 조건과 한계로서 나타난다.(91)
‘애매함’은 고유하게 초월론적 범주, 즉 인류학에 고유한 문화적 번역의 기획을 구성하는 차원이다. 이것은 인류학 담론의 가능 조건, 즉 인류학 담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번역하기는 애매함의 공간에 자리 잡고 거주하는 것이다.
이는 서로 접촉하는 ‘언어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했던 공간, 즉 애매함이 숨겨 둔 바로 그 공간을 열어서 넓히기 위함이다. 애매함은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수립하고 추동하는 것이다. 즉 관점의 차이다.(95)
‘관점주의적 번역’의 목적은 우리의 언어와 다른 종들의 언어를 연결-분리하는 기만적인 ‘동음이의어’의 내부에 숨겨진 차이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 것이다.(70p) 살아 있는 종들이 가진 담론 사이의 반反자연적 동음이의 관계를 긍정한다. 모든 종류의 치명적 ‘애매함’의 기원에 그런 동음이의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애매함을 번역하는 일은 인간의 문자 언어 이전을 사유하는 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애매함’이 자크 데리다의 접경성과 함께 키메라적 신화적 공간인 것처럼도 느껴진다.
번역하기는 애매함이 지금까지 항상 존재했고, 앞으로도 항상 존재할 것이라고 추정하는 일이다. 이는 존재하던 것과 우리가 ‘말하는 중이었던’ 것 사이에 어떤 기원적 유일의미성과 궁극적 의미 중복(어떤 본질적 유사성)이 있을 거라 추정하면서 ‘타자’를 침묵 속에 가두는 대신, 차이에 의해 소통하는 일이다.(95)
‘애매성’이란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의 관계 내에 관찰자를 함축하는 비교’가 전제된다.(90)이때 ‘함축’이 ‘번역’이라 불린다. 번역, 배신, 변형이 이루어진 과정을 ‘신화’라 불린다.(91) 애매함은 해석의 과잉이고, 관계의 기초 그 자체인데, 이 관계는 언제나 외부성과의 관계이고, 자신의 기초 자체를[자기 내에] 함축한다.
애매함은 상이한 언어 놀이들 사이의 간격에서 발생한다. 작동 중인 전제들의 이질성을 가정할 뿐만 아니라, 그 전제들을 이질적인 것으로 제기하고, 그 전제들을 전제들로서 미리 가정한다. 애매함은 전체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를 정의한다. 결론적으로, 애매함의 종합은 분리접속적이고 무한하다. 즉 애매함을 대상으로 고려하는 것은 그 전 단계의 또 다른 애매함을 규정하게 되고, 이렇게 계속 전 단계로 이어진다.
애매함은 나르시즘이 아니라 안티 나르시즘을 위한 객관화의 장치다. 애매함은 계속해서 비동일자로 남아있다. 이것이 차이의 관계적 설정성의 형식 자체라면 유일하고 초월적인 의미가 존재할 것이라는 갈망으로서의 ‘일의적인 것’이다. 예매함의 공간에서 포식 관계의 내재성의 평면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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