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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의 형이상학] 인류학의 도주선(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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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oolyule 작성일26-07-01 18:01 조회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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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식인의 형이상학』 2부 발제 김유리 20260630

 

인류학의 도주선

 

 

〇지난 시간 세미나에서

이 책은 서구의 우주론을 바꾸겠다고 한다. 현대인은 어려운 문제들로 질식할 지경인데, 서구적 사유만으로는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관점주의와 다자연주의를 공부하자.

 

〇이번 시간 범위에서

2부에서 비베이루스 지 까스뚜르는 분열 철학과 사회 인류학 사이의 대화 가능성을 두 방향에서 탐구하려고 한다. 그 내용은 들뢰즈 개념이 인류학 분석에 사용될 때 일어나는 일, 그리고 사회 인류학(친족 이론)이 들뢰즈 개념 발명에 미친 영향이다.

 

<5장>

〇“흥미로운 교차”: 인류학의 시점에서 들뢰즈 철학을 본다는 것

까스뚜르는 68혁명과 인류학 사이의 연결을 시도한다. 까스뚜르에 의하면, 1960년대 말 서구에서 “사유의 방향 전환”이 있었다고 한다. 독창적이고 지적으로 급진적인 사유였다. “잠깐 동안 표면에 솟아올랐던 욕망의 흐름과 우리 자신을 계속 연결할 수 있는 경우에만” 한 몸이 된 시장과 국가의 지배에 맞설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개념의 정치”라는 측면에서 볼 때 들뢰즈와 과타리는 잠재력을 실현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 하면서, 까스뚜르는 인류학의 시점에서 본 들뢰즈와 과타리의 작업을 2부에 적는다.

까스뚜르는 지금까지 특히 프랑스 인류학에서 고전 인류학과 들뢰즈의 개념을 접합하려는 시도가 없었다고 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구조 인류학을 기초로 삼았는데도 말이다. 그는 인류학과 철학 사이의 연결은 암시적이고 아직 잠재적으로 남아있다고 말한다. 인류학이 들뢰즈 철학으로 레비-스트로스를 읽을 때 그의 실천성, 실용주의, 다원주의, 경험주의가 드러난 사례를 들었다.(내용 생략)

〇탈구조주의

까스뚜르는 『자본주의와 분열증 1: 안티-오이디푸스』(1972)가 탈구조주의를 결정화했다고 설명한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구조주의의 보수적 양상을 거부하면서 구조주의의 혁명적 양상을 급진화하는 사유 스타일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까스뚜르는 인간 과학 내에서 “언어학의 전환”이 나타났다고 상술한다. 그것은 “환유, 지표성, 문자성(기호학적 의미로)”으로의 이동이라고 한다. “환유”로의 이동은 은유와 재현을 거부하는 것이다. “지표성”으로의 이동이란 의미론이 아니라 화용론을 특권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문자성”으로의 이동이란 종속관계보다 등위관계를 유리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까스뚜르는 다시 말해 기호가 언어에서 멀어진다고 말한다. 이 멀어짐으로 인해서 언어를 사용하는 입장에서는, 기호와 지시 대상, 언어와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불연속성이 있다는 느낌이 생긴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 세계의 측면에서는 형식의 입자성보다 파동성이 강조되고, 기하학적 불연속성(도넛≠머그컵)보다 위상학적 연속성(도넛=머그컵) 강조된다.

탈구조주의는 “평평한 존재론” 도달하는 사유이다. 사물과 사건이 실재적인 것으로서 나타날 때, 그것은 부분 요소들이 문법 규칙에 따라 조합되어 구현된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 변이상태에 있는 내재적인 역동적 다양체”로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평평한 존재론의 장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것들이 변증법적으로 결합하거나 위계적으로 전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평평한 장에서 존재들은 미세하게 분화되어 가는 것들의 관계로서, 분리된 채로 접속사로 종합된 관계로서 불쑥 나타난다.

까스뚜르는 탈구조주의 이론에서 인식론(언어)과 존재론(세계)의 구별이 붕괴되는 지점을 목격한다고 말한다. “실천적” 존재론이 출현한다. 존재자들에게 인식이란 언어로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고 세계 안에서 재현하지 못할 것과 상호작용 하는 일이 된다. 인식하기는 응시, 반성, 소통이 아니라 창조하기의 한 방식으로 가능해진다. “잡다”를 재현 아래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채우는 행위자의 수를 증가시키는 것”이 인식에 주어진 임무가 된다.

 

<6장>

〇다양체 개념

들뢰즈와 과타리의 『자본주의와 분열증 1: 안티 오이디푸스』(1972)는 “욕망하는 기계들”에 대한 이론이다. 이 책은 욕망이 순수하고 실정적인 것으로 생산된다고 하여, 욕망을 결핍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라고 하는 정신분석학을 부숴버렸다. 이 개념에 따르면, 욕망의 흐름은 “사회체”라는 “사회적 생산 기계”에 의해 코드화되는 것이었다. 까스뚜르는 이 책을 “다르게 사유하기 위한 경이로운 노력”이라고 말한다. 저자들은 “집단화”하는 사유가 아니라, “차이화”하는 사유를 발명하려고 노력했다.

『자본주의와 분열증 2: 천 개의 고원』(1980)은 다양체들에 대한 이론이다. 까스뜨루는 다양체 개념이 인류학적 실천이 몰두했던 현상들을 가장 잘 서술한다고 말한다. 다양체 개념은 인류학을 이원론에서 해방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까스뜨루는 인류학이 “18, 19세기 암흑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자연과 문화”, “개인과 사회”라는 두 이원론에 갇혀있었다고 말한다. 다양체 개념은 인류학을 가둬둔 인식론의 감옥을 지나가는 도주의 선이다. 이제 변증법적 “지양”도 “양자택일”도 두고 가도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더 이상 위계질서를 쌓아올리거나 초월하는 기준을 설정하지 않아도 된다.

“개념을 발명”한다는 것은 “철학정치”이다. 개념 정치의 목적은 “개념과 권력의 연관을 끊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개념을 가지고 사유한다. 고전 형이상학의 일반개념에는 “본질”이나 “유형” 등이 있다. 이 일반개념을 도구로 사유하면, 이것은 본질인가 형상인가를 식별하려고 하고, 이 유형은 어느 범주에 속하는가를 분류하려고 한다. “식별, 분류, 판단”하는 사유는 실체와 허상, 주체와 타자로 식별 가능한 “개별체”들을 다룬다. 그런데 “다양체”는 개별체 유형들을 넘어서는 “메타 개념”이다. 다양체 개념으로 볼 때, 유형들은 차이가 미분적으로 무한히 발생하므로 “계통분류학”적으로 범주화되지 못하고, “식별이 불가능”하다. 이런 다양체라는 개념이 발명되면서 고전 형이상학의 일반개념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들뢰즈가 거듭 말했다고 한다. 개념화라는 것은 철학에서 일반개념으로 정식화되는 과정을 말한다. 다양체 ‘개념’은 리좀 ‘이미지’와 관계있다. 리좀이라는 이미지는 어디에나 있다. 식빵에 피는 곰팡이든, 물에 번지는 잉크액 방울이든, 땅속으로 퍼져가는 나무 뿌리 곰팡이균의 균사망이든. 그 이미지를 보고 리좀이라는 생각(아이디어)을 떠올리게 되면 그것은 ‘관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관념을 일반화하면 ‘개념’이 된다. 개념을 새로 발명해내지 않으면 주어진 일반개념으로만 세상을 인식한다. 리좀적인 것으로서의 다양체라는 일반관념을 가지면 개별체를 “강도적 독특성”으로 사유할 힘과 권리를 갖게 된다.

 

〇되기

다양체로 존재하는 양식은 “되기”이다. 다양체에는 단독으로 갖는 동일성인 “정체성”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 되기라는 말은 이미 된 것만도 아니고 앞으로 될 것만도 아니며, 그렇다고 안 된 것만도 아니고 안 될 리도 없어서 뜻이 애매하다. 다양체는 지금까지의 관계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질적이라고 느껴지는 것과의 사이에서 발생하는 “강도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다양체는 “얽힘”이 발생하는 장소와 순간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다양체는 “중심 없는 격자”를 형성한다.

까스뚜르는 라투르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 들뢰즈의 리좀 개념에 빚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까스뚜르의 설명에 따르면 1)모든 사물은 하나의 네트워크처럼 서술될 수 있다. 2)하나의 네트워크는 하나의 관점이면서, 기입하고 서술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3)하나의 사물이자 네트워크는 다른 많은 요소들과 연관되어 가는 기록된 운동이다. 4)이때 관점은 내적이거나 내재적인 것이다. 5)그런데 다양한 연관들이 그 관점을 점차 관점 자신과 차이 나게 만든다. 6)사물 자신이 자신을 “여럿임”으로 지각하도록 만들어진다. 까스뚜르는 모든 사물들을 보는, 외부의 초월적 시선은 없고, 사물들 자신이 시점이라고 한다. 개별체를 사유하게 하는 것이 “정체성” 개념이라면, 다양체를 사유하게 하는 개념은 “관점주의”이다.

다양체는 나보다 덜한 것 되기이다. 다양체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이는 단일함보다 크거나 많거나 우월한 것은 아니다. 다양체는 “나보다 덜한 것”이고 “빼기에 의해 얻어진다.” 다양체는 1이 아닌 복수이지만, 다수가 아니라 소수(마이너)이다. 다양체의 소수적 조직은 미세하게 자꾸만 나뉨에도 위계가 안 생기고 “프랙털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 설정된다. 아무리 작아도 다양체는 “항상 온전하게 함축”된 관계성을 가지므로, 그 결과 부분과 전체, 개별과 사회를 구별할 필요가 없어진다.

 

☆다양체의 공식. 다양체는 관계성이기 때문에 한 개가 아니라 n개이다. n개를 하나로 통일하는 단일 원리는 없기 때문에 n-1이다. n을 초월하는 하나를 뺐기 때문에 n은 평평하다.

 

○관계의 철학, 차이의 철학

다양체는 관계의 양식이다. 이 관계에서는 분리된 것들이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다. 접속사 or(~냐 ~냐)로 연결되는, “분리접속적”으로 종합되는 관계이다. 관계된 두 항은 서로 다르다. 그렇다고 대립하지도 않는다. 너무 달라서 양자택일할 것도 아니다. 양자를 조정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서로에게 이질적인 독특성을 보유한다. 그런데도 둘 사이가 종합되어 있다. 분리접속적으로 맺어진 둘 사이에서 “상호 비대칭적”으로 서로를 “함축, 전염, 소통”하는 관계가 형성된다.

인류학의 비교 분석은 둘 사이의 유사성이 아니고 차이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까스뚜르는 말한다. 그는 시점 사이의 차이를 좁히지 않으면서도 두 방향에서 비교 분석하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그는 “경로는 두 방향에서 동일하지 않다”고 말한다. 비교를 한 쪽에서 가 아니라 두 방향에서 하면 양자의 차이들이 강도적으로 변한다. 변하는 차이, 차이나는 차이들이 발생한다. 다양체 비교에서 분석은 분열되고 시점은 교환된다. 인류학의 이원항인 개인과 사회, 인격과 사물도 두 방향에서 비교 분석할 때 구별이 부적절한 다양체 비교가 된다. 개인은 사회를 프랙털로 함축한다. 사물들은 강도적으로 차이나는 인격들이 된다.

 

〇즐거운 텍스트

“들뢰즈의 텍스트는 두 가지 원리의 접합(dyade)을 늘려가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135) 까스뜨루는 두 가지 원리의 들뢰즈적 접합이 언제나 다른 곳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이원론을 “도구, 교량, 이동수단”으로 다룬다. 들뢰즈는 이원론을 이용해서 이원론을 부수면서 중단 없는 흐름으로 모든 이원론을 거쳐 간다고 말했다. 들뢰즈는 “이것은 또다른 이원론이나 새로운 이원론이 아니라, 쓰기의 문제다.”라고 말한다.

이원론은 이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면서 흐름들을 견고하게 코드화하는 초월자다. 들뢰즈에 의하면 계산된 방식으로, “항상 접선을 따라” 도주선을 내면서 이원론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모든 이원적 구별은 “외연적, 현실적 극”과 “강도적, 잠재적 극”을 수립한다. 외연적 극에서 볼 때, 서구와 타자의 구별은 전형적으로 대립적이다. 잠재적 극에서 볼 때 대립은 없다. 강도, 리좀, 분자, 유연한 것, 매끄러운 것의 차원에서 볼 때 서구 안에 잠재된 모든 비서구와 비서구 안에 접혀 있는 모든 서구들이 이원론의 접하는 도주선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기서 서구라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함축한 다양체의 한 버전이나 변형으로 서술된다.

이원론의 양쪽 극을 이루는 개념 쌍은 “상호 전제” 관계에 있다. 양 극은 서로에게 “맥락과 기초”를 제공한다. 양 방향에서 현실화와 “역실행” 운동이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한편으로 표준 모델의 모사물은 점점 변질된다. 다른 한편으로 대안적인 것들은 늘 안정화 된다. 혁명의 지도가 표준화되거나 자본화된다면 그것은 중단 없이 다시금 쓰여지고 그려져야 한다. 모델(나무)과 도주 과정(리좀)은 양 방향에서 경로를 만드는데, 이 과정은 동시적이나 비대칭적이다. 한쪽은 “되기라는 욕망의 과정”에 반대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반면, 다른 쪽 작업은 “되기”에 호의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평평한 존재론”에서 잠재적인 것은 현실화되며, 현실화된 것에는 항상 도망치는 부분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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