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3) 쾌감에 젖은 사이보그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coolyule 작성일26-09-02 18:02 조회6회 댓글0건첨부파일
-
종교 인류학 [영장류]3 씨앗문장 김유리 0902.hwp
(156.5K)
0회 다운로드
DATE : 2026-09-02 18:02:58
본문
종교 인류학 『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씨앗문장 김유리 20260902
쾌감에 젖은 사이보그들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동물 및 기계와의 융합을 통해서 서구 로고스의 체현인 (남성)인간이 되지 않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의 사회관계를 통해 불가피해진 것, 강력하고 금기시되는 융합에서 체험하는 쾌감에 주목하면 페미니즘 과학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른다.”(314)
“‘탄탄한 정치적 인식론을 정초하는 명쾌한 비판’ 대 ‘조작된 허위의식’이라는 범주로 의식을 분류하는 대신 막강한 잠재력을 지닌 쾌감, 경험, 역량의 출현을 섬세하게 이해함으로써 게임의 규칙을 바꾸기를 요구한다.”(312-323)
단결 불가 시대의 선언문
도나 J. 해러웨이의 유명한 논문 「사이보그 선언문」을 읽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에 기여하기를 바라면서 쓰였다는 이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고 얻을 것은 전 세계라면서 만국의 노동자들에게 단결하라고 외친 선언문 말이다. 그런데 해러웨이는 온 세상의 여성들에게 단결하라고 외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라고 말한다. 그 어떤 시기보다 연대가 필요함은 분명하나 여성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에서 ‘단결’도 ‘분열’도 양가감정을 일으킨다고 해러웨이는 설명한다. 혁명 주체를 세울 수 없다면 무엇을 하자고 외치겠다는 것일까? 해러웨이는 새로운 결합을 이룰 방법을 배우겠다는 희망으로 사이보그 이미지를 불러낸다.
미국의 세계적인 과학기술 역사가 해러웨이(1944년생)는 레이건 정부 시절에 이 선언문을 썼다. 이때는 2차 대전 이후의 냉전 시기였다. 소련이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한 데 대한 자극을 받은 미국은 예산을 쏟아 부어 과학자들을 양산했다. 그 흐름 속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해러웨이는 뼛속까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자기 같은 사람이 군비 경쟁과 자본 투입의 물결 속에서 과학자가 될 수 있었다는 모순적인 상황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괴물 같은 존재들이 나온다는 점에 흥미를 느낀다.
무너진 경계들
해러웨이는 이 논문 부제에 20세기 후반이라는 시기를 특정했다. 그는 이 시기의 특징으로 세 가지 경계 와해 현상을 설명한다. 이와 함께 그 경계들이 받치고 있던 모든 이분법적 질서들이 돌이킬 수 없게 무너졌기에 이것을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파괴되었다. 지금까지 인간만의 것으로 여겼던 모든 기준이 과학계에서 모두 반박되었다. 자연과 문화를 가르는 선은 희미한 자취가 되어버렸다. 이로써 여성의 역할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본 페미니즘의 숙적 이론은 단지 하나의 입장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둘째, 동물-인간이라고 할 유기체와 기계 사이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자연성, 정신성, 자율성을 발달시킨 20세기 후반의 기계들에서 유기체와의 차이들이 혼융되었다. 이전 시대에 기계는 활기 없는 무기물이었다. 그것이 유기체처럼 보이면 사람들은 섬뜩해 하면서 귀신이 들렸다고 놀라곤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만든 기계들은 불편할 만큼 생생한데, 정작 우리는 섬뜩할 만큼 생기가 없다.”(277)
셋째,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가 매우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물질은 불투명하고 이동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현대 기계의 정수는 분자 단위의 초소형 전자공학 장치여서 눈에 보이지 않으며 어디에도 갈 수 있다. 현대의 기계장치들은 모두 “신호, 전자기파, 스펙트럼의 한 구획들”이다. 가볍고 깨끗하고 휴대와 이동이 간편에 어디에나 들어간다. 기계장치가 “의식(consciousness)” 또는 의식의 시뮬레이션과 같아진다. “20세기 후반의 과학, 기술, 사회주의페미니즘”(부제)에서 여성-인간의 자리는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사이보그 정치 신화
경계가 무너진 한복판에서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신화를 쓴다. 사이보그는 인공두뇌 유기체를 말한다. 기계와 유기체의 결합이 낳은 잡종이다. 사이보그는 픽션의 캐릭터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 현실 속 존재다. 해러웨이에 의하면 과학 소설과 사회 현실을 나누는 경계는 ‘눈속임’이다. 해러웨이는 사회 현실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관계이면서 중요한 정치적 구성물이라고 말한다. 정치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정치적 파급력이 큰 픽션이라는 말이다.
해러웨이는 해방이란 억압에 대해 상상적으로 파악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이 바로 의식을 구축하고 획득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사회주의페미니즘은 그때까지 사회 현실을 가부장주의적 자본주의의 억압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이제 사회 현실은 지배의 정보과학으로 다시 쓰여져야 한다고 해러웨이는 말한다. 지배의 정보과학은 남성 노동자를 실업 조건에 감금하고 노동을 가사화한다. 아시아의 십대 여성이 노동 현장에서 선호되고 사적 경제와 가정은 테크노폴리스를 구성할 뿐 아니라 소비 노동의 착취 현장이 된다. 해러웨이가 사이보그라는 정치 신화를 쓰려고 하는 이유는 사회와 신체의 현실적인 지도를 그리는 픽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대는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을수록 살아갈 협력 관계를 이루는 데 실패하게 되는 불안정한 상태로 이행하고 있다. 우리를 갈라놓는 경계에 모호하게 위치한 사이보그 의식을 획득하는 것은 우리가 생산적으로 결합할 가능성을 탐구할 상상의 자원을 갖는 것이라고 해러웨이는 주장한다.
사생아 무리의 양가감정
경계가 무너져내리고 조화로운 질서가 흔들리고 자기와 남이 누구인지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지도 알 수 없게 되면서 느끼는 복합 감정 가운데 해러웨이는 쾌감이라는 긍정적인 정서를 환기한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연결되는 쾌감을 말하면서 그는 심지어 ‘수간’(bestiality)라는 ‘거북하고 짜릿할 만큼 단단한 결합’에 대해 말한다. 도구와의 연결 감각 증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컴퓨터 사용자들 상당수가 트랜스 상태를 경험한다고 한다. 도구와의 연결에 무아지경으로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해러웨이는 금기의 위반와 정체성 상실이 상상에서든 실천에서든 불쾌한 것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 같다.
하나의 가계가 무너질 때, 집안 구성원들은 비참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사생아의 입장에서는 양가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자기를 배제함으로써 유지되어 온 혈통을 경계선상에서 바라보아 온 자가 사생아이다. 사이보그는 ‘인간’이 되기 위해 분리되어 나온 본원적 모체에 대한 향수가 없다. 그것은 서구 휴머니즘의 기원 설화에 나오는 어머니는 ‘개인’의 발달과 ‘역사’의 발전을 위해 분리되어 나와야 하는 상상의 기원이다. 부계 쪽으로 사이보그는 자기를 제작한 프랑켄슈타인 박사 같은 아버지의 구원을 바라지도 않는다. 사이보그는 국가, 군사주의,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의 사생아이다. 근본 없는 사생아에게 아버지는 있으나 마나 별반 차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페미니스트가 ‘새롭고 무서운 네트워크’로의 이행에 반발하여 구식의 편안한 위계적 지배의 복원을 원할 수 있을까? 역사적 유물론자가 과학, 글쓰기, 권력과 접촉하기 이전의 ‘본원적 문맹’ 상태를 그리워할 수 있을까?
정치 신화를 쓰는 기계
해러웨이에게 사이보그는 20세기 후반에 ‘기계로 체현된 우리’를 말한다. 반도체에 미세한 회로를 새기는 일을 포함한 쓰기는 기계를 다루는 일이다. 기계와의 결합에서 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배정된 자리를 위반하는 데서 온다. 해러웨이가 말한 SF 소설 속 여주인공 말린체는 정복자의 언어에 능통해진다. 그는 자기 몸에 낙인을 찍는 도구를 칼날을 잡듯이 움켜쥐는 괴물이다. 말린체는 사생아를 낳고 경계에서 사는 기술을 가르칠 수 있다. 경계에서 살아가는 능력은 자기를 바꾸는 힘이고 세계를 읽고 자기를 새로 쓰는 쾌감을 동반한다. 해러웨이는 지배의 정보과학 집적회로 속에 엮어 들어간 채로 무서운 이야기들을 회로에 써넣으며 쾌감에 젖는 사이보그들이 되자고 한다.
해러웨이는 과학 시대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무너진 경계에서 정체성을 온전하게 유지하려고 과학기술을 악마화하는 이원론의 미로에 영원히 갇힐 수도 있고, 해를 입은 부위마다 기계와 동물의 부분을 붙여가면서 재생하는 사이보그로 계속 살아갈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이보그적 생존 기술이 단지 혼자 생존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다함께 세상을 바꾼다는 것일까? 다시 ‘단결’의 문제로 돌아온다. 적어도 해러웨이의 혁명 주체들은 공통 언어로 외치지 않고 이종 언어를 쏟아낸다는 것은 알겠다. 각자의 삶을 어떻게든 잘 살아 내고 그와 동시에 몸과 사회의 새로운 신화를 창작하는 놀이에 날마다 진지하게 임하는 것은 지배를 파악하고 결합을 배우는 방법이 된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