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비교 글쓰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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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동엽 작성일25-08-09 08:53 조회36회 댓글0건본문
수성/ 비교 글쓰기/ 2025.8.13./ 이동엽
소포클레스와 셰익스피어 비교
비교 기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시학』에 의하면 비극의 목적은 관객에게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일으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정화라는 뜻으로 비극 고유의 즐거움을 말한다. 이때 즐거움은 기본적으로 비극이 고귀한 인간의 행동 모방(mimesis)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인간은 아이들의 소꿉놀이에서 알 수 있듯이 모방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그림 감상에서 알 수 있듯이 모방 된 것을 보고 즐거워한다. 이것은 무엇을 그린 것이구나 깨달으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카타르시스는 결국 배움의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
비극에서 이러한 즐거움은 6가지 구성요소인 플롯, 성격, 사상, 조사, 볼거리, 노래의 조화로운 협업으로 발생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중에서 플롯, 즉 사건의 짜임새가 비극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하였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그의 “행동의 결과로 나뉘는 것이지 그의 성격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뛰어난 성격묘사, 아름다운 조사와 고차원의 사상을 대사에 담더라도 사건의 짜임새를 갖추지 못한다면 비극의 진정한 효과를 산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플롯이 좋은 플롯인가? 우선 사건의 배열에 질서가 있어야 하고 통일성이 있어야 한다. 주인공의 완결된 하나의 행위를 대상으로 하고 이와 관련 없는 에피소드들을 뒤죽박죽 집어넣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사건의 진행에 있어서 개연성과 필연성이 있어야 한다. “앞의 사건 때문에 뒤의 사건이 일어나야지 앞의 사건에 이어서 뒤의 사건이 벌어지면 안 된다.” 두 번째 조건은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합적이라는 말은 주인공의 운명이 급반전이나 발견을 통해 바뀌는 것을 말한다. 급반전은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듯이 사태가 반대 방향으로 바뀌는 것을 말하고 발견은 무지의 상태에서 앎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말한다. 급반전과 발견은 연민과 공포의 감정을 일으키는 핵심 요소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준에 따라서 소포클레스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플롯
소포클레스의 작품 중에서 플롯 구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은 오이디푸스 왕이이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마치 거대한 기관 속에서 톱니바퀴가 맞아 돌아가듯이 착착 진행된다. 설정된 구조 속에서 한번 돌아가기 시작한 극의 진행은 누구도 멈출 수 없다. 거대한 구조는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가 받은 두 개의 신탁이고 이 톱니바퀴를 돌리는 동력은 무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오이디푸스의 강력한 의지이다.
지혜롭고 정의로운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역병을 물리치고자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찾아야만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눈먼 현자는 범인이 오이디푸스 당신이라고 말한다. 분노한 오이디푸스는 그가 크레온과 짜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이오카스테는 당연히 동생과 남편의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자초지종을 들은 이오카스테는 남편을 안심시키기 위해 비밀을 털어놓는다. 라이오스와 자신이 신탁을 피하려고 아들을 버렸고, 그리고 그 후에 라이오스는 삼거리에서 도적들에게 피살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삼거리라는 말을 들은 오이디푸스는 뭔가를 직감한 듯 두려움에 떨며 이오카스테에게 그 사건에 관해 몇 가지를 순차적으로 물어보고 자신이 저지른 우발적 살인사건과 맞춰본다. 그렇게 하나씩 퍼즐이 맞춰지면서 결국 범인이 자신이고 아내가 자신의 어머니였음이 밝혀지게 된다. 여기서 만약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이 선행 사건으로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크레온과의 말싸움이 없었다면 과연 오이디푸스가 어디에서 왕비가 자기 아들을 죽였다는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까? 아마 이오카스테는 이 슬프고 부끄러운 이야기를 최대한 숨기지 않았을까? 그리고 만약 오이디푸스가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자신을 코린토스의 사자에게 넘겨준 결정적 증인인 늙은 목자를 테이레시아스 이전에 제일 처음에 불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는 두려움에 라이오스가 도적들에게 죽었다는 처음의 진술을 고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오카스테의 고백과 그로 인해 알게 된 정확한 사정, 코린토스 사자(使者)의 방문과 그로 인해 밝혀진 오이디푸스가 폴뤼보스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사자와 늙은 목자의 대질 신문이라는 선행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늙은 목자는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오이디푸스의 작품에서는 선행 사건과 후행 사건이 필연적으로 이어진다.
『오셀로』의 플롯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다. 『오이디푸스 왕』처럼 무지에서 앎으로의 이행이라는 플롯을 가진 『오셀로』와 비교해 보자.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외부의 구조에 의해서 등장인물들이 하나의 부품처럼 행동하면서 진행된다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는 등장인물 내면의 심리상태와 감정에 의해서 극이 전개된다. 이아고는 카시오에 대한 질투심과 오셀로에 대한 불만으로 너무나도 위험천만하고 한편으론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오셀로 질투 유발계획을 진행한다. 극의 줄거리가 전적으로 이아고의 간계에 의해 진행된다. 심지어 로데리고, 카시오, 에밀리아, 오셀로 등 모든 주요 인물이 그의 꼭두각시처럼 움직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카시오의 주취 폭행, 파면과 복귀 탄원, 데스데모나와 카시오가 단둘이 있는 탄원 장면 목격, 손수건 분실과 오셀로의 오해 등 다양한 사건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 사건들의 원인은 이이고 한 사람의 모략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급반전과 발견이 없는 단순한 플롯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보니 중간중간 많은 모순점이 발생한다. 첫 번째는 카시오라는 인물이다. 정직하고 유능한 인물인 카시오가 이아고의 꾐에 넘어가 과음하고 더 나아가 키프로스의 귀족인 몬타노를 폭행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나중에 본국으로부터 오셀로 대신 총독으로 지명되기까지 하는 명망 있는 인물이 한낱 부관 자리를 청탁하기 위해 이아고와 데스데모나에게 매달린다. 그리고 정직하다는 인물이 매춘부인 비앙카에게 사랑을 속삭이다가 한순간에 돌변하여 오셀로가 멀리서 지켜보는 장면에서는 이아고와 함께 그녀를 희희낙락 조롱하고 모욕한다. 두 번째는 이아고의 부인 에밀리아다. 그녀는 데스데모나를 죽음으로 모는 결정적 증거인 손수건을 훔쳐서 이아고에게 가져다준다. 그런데 극의 후반부에는 그런 그녀가 돌변하여 정의의 투사처럼 데스데모나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모든 진실을 밝힌다. 세 번째는 이 모든 사건의 주범 이아고 본인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는데 철저한 이성적 인물이 정작 본인과 관련해서는 모략의 목적인 부관 자리를 얻었음에도, 이 계획을 멈추지 못하는 비이성적 태도를 보여준다. 오셀로가 자신의 부인과 동침했다는 의심이 하나의 동기로 제시되지만, 아무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약하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키프로스의 총독이 선량하고 아름다운 아내의 부정을 의심해 살해하고 본인은 자살한다는 이 큰 사건이 단 한 사람의 계획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개연성과 필연성이 떨어진다.
플롯 대 성격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준에 의하면 오이디푸스 왕이 오셀로보다 좋은 작품이다. 개연성과 필연성뿐만 아니라 급반전과 발견이 있는 복합적 작품이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는 셰익스피어처럼 에밀리아라는 한 인물의 진술에 의존해 단순하게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 진실이 극 자체에 의해서 스스로 말하게 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어떤 등장인물들도 전체 퍼즐을 다 가지고 있지 않다. 각자가 가진 부분적 퍼즐들을 고구려 유리왕의 부절처럼 서로 맞춰보아야지만 진실이 밝혀진다. 그 과정에서 관객들은 안심했다가 불안에 떨기를 반복하면서 점점 긴장감이 고조되고 극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오카스테가 신탁은 믿을게 못 된다며 오이디푸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만만하게 처음 이야기를 시작하는 장면, 코린토스에서 온 사자가 들려준 양아버지 폴뤼보스가 자연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탁이 틀렸다며 안도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같이 희망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은 신탁이 맞다는 증거로 변하는 역설이 발생하면서 관객들은 전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긴장감이 고조되다가 마지막에 늙은 목자의 인정으로 급반전과 발견이 동시에 일어나고 관객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오이디푸스와 함께 절규한다. “아아,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나야말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태어나,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과 결혼하여,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였구나!”(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천병희 역, 숲, 76p)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열등하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며 우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등장인물의 내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읽으면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운명, 안티고네의 안타까운 사연이 기억나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나면 햄릿의 고뇌, 오셀로의 질투심, 맥베스의 야망이 기억에 남는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는 개성 있는 인물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소포클레스와는 달리 셰익스피어는 비극에 독백과 방백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여 인물의 내면 심리를 섬세하고 정확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구성요소 중에서 플롯이 첫 번째요 성격은 두 번째라고 했지만, 셰익스피어는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아마도 인물의 성격이 첫 번째로 중요하고 플롯은 그다음이라고 항변하지 않았을까? 재밌게도 『햄릿』에는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입을 빌려 자신의 연극론을 피력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무슨 일이든 과도하면 연극의 목적에서 멀어지는 법인데, 그 목표는 처음이나 지금이나 과거에나 현재에나, 말하자면 본성에 거울을 비춰주는 격이야. 미덕은 그 특징을, 경멸은 그 꼴을…. 내가 어떤 배우들의 연극을 본 적이 있는데…. 그들은 인간의 걸음걸이조차 보여주지 못하면서 어찌나 활개 치고 고함을 지르는지 조물주의 조수 몇 명이 사람을 빚다가 잘못 빚었다고 생각했어. 그들은 인간을 너무나 혐오스럽게 모방했어.”(『햄릿』, 최종철 옮김, 민음사, 10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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