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비교 글쓰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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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적 작성일25-08-09 15:58 조회58회 댓글0건본문
소포클레스 비극과 셰익스피어 비극의 윤리적 양상
에토스(ethos), 균형의 미덕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관객이 비극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연민과 공포라고 말했다. 연민은 부당하게 불행을 겪는 사람을 향한 것이고, 공포는 우리와 비슷한 사람의 불행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따라서 연민과 공포의 감정은 윤리적으로 타당한 행동을 한 주인공의 에토스(ethos)에 의해 생겨난다. 에토스는 등장인물의 성격과 도덕적 기질을 말하며, 인물의 선택과 행위에서 드러나는 가치 지향이다. 비극 속 주인공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선량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나고 이상적인 인물이라도 완전무결하게 선량해서는 안 되며, 치명적 결함 또는 과오라고 말할 수 있는 ‘하마르티아(hamartia)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 하마르티아로 인해 비극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극은 온전히 운명적이거나 악행의 인과로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인물의 성격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적 미덕을 "두 개의 악덕(vice), 즉 과도함이라는 악덕과 부족함이라는 악덕 사이에 놓인 중간 상태"로 규정했다. 심지어 복수의 여신들인 네메시스의 벌을 받아 몰락하게 되어 있는 오만의 죄, ‘히브리스(hybris)’ 역시 지나침을 근거로 그 죄를 물었다. (로라 젭슨, 『고전에서 셰익스피어로』, 동인, 2017, 21쪽) 네메시스는 여신의 이름이자, 그 사전적 의미는 ‘신의 응징’, 또는 ‘균형 회복의 힘’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인들에게 도덕은 극단을 피하고 균형을 맞추는 것이 그만큼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소포클레스는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최고의 비극 작가로 당시는 신, 운명, 질서가 강조되었던 시대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16~17세기 영국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당시는 중세적 신(神) 관념과 르네상스적 인간 중심 사상이 공존하던 때다. 이처럼 다른 시대를 대표하는 두 비극 작가의 작품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에토스 개념 아래 주인공의 성격을 중심으로 비교해 보고자 한다.
정적(靜的)인 에토스, 동적(動的)인 에토스
소포클레스와 셰익스피어 작품 속 주인공의 가장 큰 차이는 초지일관 하나의 성격을 유지하는가, 아니면 상황이나 주변 인물에 따라 변화하는가에 있다.
소포클레스 비극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 인물이 가진 고결함이다. 그 고결함은 어떤 상황에서도 훼손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지나친’ 고결함이 비극을 초래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 정도로 현명하며 정의롭고, 진실을 추구하는 집념이 강하다. 더욱이 그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나라와 백성들을 고통에서 구하기 위함이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나 이오카스테가 더 이상 라이오스의 살인자를 찾지 말라고 만류하지만,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그 살인자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 속에서도 진실을 찾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살인자라고 밝혀졌을 때 자신이 공언한 대로 스스로 눈을 찌르고 테바이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오랜 추방자의 생활 속에서도 오이디푸스는 친부 살해와 근친상간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그 행위가 의도적인 악덕이 아닌 무지에서 온 과오임을 항변한다. 안티고네 역시 눈먼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해 고생을 자처하며, 국법을 거스르면서까지 죽은 오라비 플뤼네이케스의 장례를 치른다. 그 결과로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말이다. 그 과정에서 안티고네는 단 한 번의 흔들림이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이 선택한 일의 정당성을 당당하게 주장한다. 이처럼 소포클레스 비극 속 주인공의 에토스는 단순하지만 강렬하다.
반면 셰익스피어 비극 속 주인공은 본래 가지고 있던 선량함이나 고결함이 계략이나 예언으로 흔들리고 변화한다. 오셀로는 어떤 격한 감정에도 동하지 않으며, 오직 군인의 직무에 충실한 고결한 무어인으로 그의 진면목을 알아본 데스데모나의 사랑을 받는 인물로 처음 등장한다. 둘의 사랑은 완전무결해 보인다. 그러나 이아고의 계략에 그는 너무 쉽게 넘어가 그의 아내를 의심한다.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확신은 분노로 변하며 자신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이 깨진 만큼 감정의 격류에 휩쓸린다. 멕베스는 그라미스 영주 시절엔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장군이었다. 그러나 반란군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길에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의 예언을 듣는 순간 그의 야심은 부당한 권력욕으로 바뀌고 더욱이 아내의 부추김에 결국 덩컨 왕을 암살하고 만다. 햄릿은 국민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존재였다. 오필리어의 대사를 빌어 말하면 그는 “귀족의 눈, 학자의 혀, 군인의 칼”을 지녔고, “나라의 희망이요, 예절의 거울이요, 행동의 근본이요,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암살당한 선왕과 어머니와 숙부의 결혼으로 인해 그는 우울하고 의심하고 회의하며, 인간을 혐오하는 냉소적인 성격으로 변한다. 이처럼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들은 작품의 시작, 중간, 결말까지 그 에토스가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마르티아, 비극의 씨앗
하마르티아는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으로, 『시학』에서는 본래 악인이 아니지만 판단 착오, 무지, 성격상의 결함 때문에 비극적인 결과를 맞게 되는 핵심 원인을 가리킨다. 소포클레스 비극에서 주인공의 하마르티아는 에토스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친부를 살해하고, 친모와 동침하리라는 아폴론의 예언을 듣고 그 예언이 실현되는 것을 피하고자 코린토스를 떠난다. 그리고 그것이 아폴론의 예언이 실현되는 시작점이 된다. 신의 예언을 피하겠다는, 피할 수 있다는 생각, 어쩌면 그것이 오이디푸스의 가장 큰 하마르티아일 것이다. 이것은 곧 인간의 한계와 신의 질서를 망각한 과도한 오만(히브리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타고난 우월함과 고결함이 그런 오만을 낳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오만함이 결국 저주스러운 예언을 실현했고, 가장 비극적인 방법으로 폭로되게 했으며, 그 결과로 처절하게 몰락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안티고네』에서는 안티고네와 크레온이 신법(神法)과 국법(國法)을 대변하며 대립한다. 안티고네는 그의 도덕적 확신이 극단으로 흘러 신법과 국법 사이에서 타협을 거부한 것이 하마르티아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크레온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명령을 국가의 질서와 권위의 상징으로 여기며, 신법과 충돌하더라도 굽히지 않는 오만으로 흘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안티고네의 하마르티아가 불러온 비극과 크레온의 하마르티아가 불러온 비극은 그 정도가 다르다. 안티고네는 그가 이미 예상했던 대로 자기 죽음을 비극의 결과로 안게 되지만, 크레온은 아들과 아내를 잃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몰락하고 만다. 이렇게 볼 때 소포클레스 시대에는 국법보다는 신법이 우위에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셰익스피어 비극 속 주인공들의 하마르티아는 어떻게 표출될까? 햄릿의 하마르티아는 그의 우유부단함에서 찾을 수 있다. 아버지의 복수를 결심하고 난 뒤에도 그는 선왕의 혼령이 한 말을 의심하며, 극중극으로 등장하는 「쥐덫(곤살로 왕의 살해)」의 공연에서 숙부 클로디어스의 반응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확신한다. 그 이후에도 그는 '확실한 복수'란 이름 아래 계속 복수의 시기를 미루다, 그 사이 복수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기 어려운 광인 행세를 하며 사랑하는 여인 오필리아의 죽음을 초래하고, 그 외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게 된다. 이미 발생한 비극을 자신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한 행동 지연으로 더 심화하고 확대한 셈이다.
오셀로의 하마르티아는 자신의 출신 성분과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무어인인 오셀로는 이방인이다. 그는 일곱 살 때부터 거의 전쟁터에서 살아온 인물로, 용병 실력으로 베네치아 인들에게 인정받은 인물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종적 편견과 경계를 느끼는 현실이다. 이는 그를 집에도 초대하며 가까이 지냈던 브라반쇼가 딸 데스데모나가 오셀로와 결혼하자 극렬히 반대하다 의절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명예와 긍지가 중요하다. 데스데모나의 사랑 역시 그에게는 명예이자 긍지다. 그래서 오셀로에게 아내의 불륜은 그의 명예와 긍지가 실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히 질투심이나 사랑의 배신에서 오는 분노를 넘어 자신의 출신과 인종적 한계를 절감하게 하는 절망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쉽게 이아고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고 이성을 잃고 비극을 향해 달려간 것일지도 모르겠다. 맥베스는 어찌 보면 비극의 주인공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선인(善人)보다는 악인(惡人)에 가깝다. 극초반에 그는 마녀의 예언을 듣자마자 곧 다른 마음을 품는다. 그의 욕망이 그의 성격을 변질시킨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의 하마르티아는 과도한 욕망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소포클레스 비극에서 주인공의 하마르티아는 에토스의 이면으로 드러나지만, 셰익스피어 비극에서는 말 그대로 성격적 결함이자 과도함의 악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신의 구원과 개인적 깨달음
그렇다면 이 비극의 과정을 거치면서 주인공들은 어떤 배움에 다다르게 되는 것일까?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콜로노스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인생을 통해 죽음과 구원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오이디푸스 왕』의 끝머리에서 자신이 살인자임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가 자신을 바로 추방하라고 요구하자 크레온은 신에게 묻고 난 뒤에 하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인다. “그래야만 이제 그대도 신을 믿게 될 테니까요.”(1,445행) 그리고 자기 딸들을 데려가지 말라는 오이디푸스 부탁에는 또 이렇게 대답한다. “만사에 지배자가 되겠다는 생각일랑 버리십시오.”(1,524행) 라고. 이 대목에서도 우리는 신에 대한 오이디푸스의 생각과 그의 히브리스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추방자로서 치욕의 삶을 살아온 오이디푸스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첫 시작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고통을 통해서 인내를 배웠고, 그리고 나를 성장시킨 것이 세월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최후의 것,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배웠다. 진실로 고귀함을 통해.”(6~8행) 여기에서 말하는 진실로 고귀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신의 질서와 정의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품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그의 고난이 단순히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성숙과 깨달음의 기회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의 예언에 저항해 자신의 운명을 비껴가려고 했던 오이디푸스는 비로소 자신의 운명이 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수용함으로써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다. 신비스럽게 펼쳐지는 그의 죽음 장면은 그가 구원받고 정화되었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오이디푸스가 테바이에서 누렸던 영광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불멸의 영광이자, 성스러운 영광이다. 삶에 내재된 불가해한 고통. 그것을 수용함으로써 신의 질서와 정의 안으로 포섭되는 것. 어쩌면 소포클레스는 우주 속에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도덕적 기준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맥베스는 결코 도덕적 인물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비극의 주인공으로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설사 그가 악인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비극적인 삶과 죽음은 인과응보의 당연함이 아닌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맥베스』에서 느껴지는 비극적 공감은 비록 두 손으로는 끊임없이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양심은 쉼 없이 악에 저항하는 인간의 고통을 목격하는 데에 있다.
맥베스 역시 오이디푸스와 마찬가지로 예언에 얽매여 비극을 만든다. 맥베스가 들은 예언은 그가 코더 영주가 되고, 이어서 왕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코더 영주가 된다. 그러자 맥베스의 욕망이 들끓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현왕(現王)인 덩컨 왕을 시해함으로써 왕의 자리를 꿰찬다. 덩컨 왕을 죽인 이후로 그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덩컨 왕을 죽였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이 현세에서 심판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양심과 욕망 사이에서 그는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불면증과 환영에 시달리며, 불안감으로 모든 대신들의 집에 감시자를 두는 지경이다.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맥베스는 자신의 악행을 멈추지 못한다. “피비린내 나는 일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물러서는 것이 앞으로 나가는 것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고통이 커질수록 그의 악행도 심해진다. 그렇게 그는 불나방처럼 파멸 속으로 뛰어든다.
그는 그토록 원하는 권력을 얻었지만 조금도 행복하지 않다. “인생의 노년에 마땅히 따라야 할 명예와 애정, 순종과 친구들과는 인연이 멀다.” 이처럼 두 손에 피를 묻히며 얻어낸 권력이 얼마나 허망하고 무의미한 것인지 뼈저리게 느낀다. 자신이 패할 것을 알면서도 맥베스는 맥더프와의 마지막 일전에서 방패를 벗어 던지고 덤비라고 소리치며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내달린다. 치욕을 당하느니 죽음을 선택하는 맥베스의 모습에서는 어떤 고귀함마저 느껴진다. 그는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 어쩌면 그것이 맥베스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이자 책임일는지도 모른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결말에는 구원의 이미지를 찾기가 힘들다. 뒤늦은 깨달음에서 오는 후회와 자기 파괴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비극 발생에 있어 운명이나 부득이한 과오보다는 개인의 의지와 자율성이 더 큰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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