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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비교 글쓰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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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혜진 작성일25-08-09 20:27 조회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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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적 명랑성과 근대적 절망

 

1.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적 관점에서 살펴 본 『오이디푸스 왕』과 『오텔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셰익스피어의 『오텔로』는 비극 장르의 정전으로 평가받는 작품들로, 두 작품 모두 등장인물의 행위를 통해 연민과 두려움을 재현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구현한다. 첫째, 특정 이름을 가진 인물이지만 이들을 통해 보편적 인간상을 드러낸다. 독자는 오이디푸스와 오텔로가 실제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집중하기보다, 이들이 “있음직함과 필연성에 따라 하는 말과 행동”의 유형으로서 어떻게 표현되는지에 주목한다. 둘째, 여기에서 벌어지는 격정적인 사건들은 아버지와 아들(『오이디푸스 왕』), 남편과 아내(『오텔로』)라는 우호적이고 친밀한 관계 내에서 발생한다. 셋째, 두 주인공 모두 처음에는 행복한 상태에 있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행동을 저지르고 뒤늦게 진실을 깨닫으며 불행으로 치닫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적 관점에서 볼 때,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셰익스피어의 『오텔로』는 모두 “사건들의 조직과 줄거리가 갖추어야 할 품격”을 지닌 작품이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는 각 주인공이 비극적 상황에 이르게 된 원인에서 비롯된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의 운명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전환되는 원인이 악덕이나 악행이 아니라 중대한 과오에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그 과오의 본성이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다는 데 차이가 있다.

 

2. 오이디푸스의 ‘앎의 지연’

   먼저, 오이디푸스의 파멸은 신이 내린 운명과 그가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이 비극은 아버지 라이오스를 살해하고 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오이디푸스가, 자신이 저지른 행위들의 과정과 의미를 깨닫고 그 절망적인 현실에 맞서 대응하는 과정을 따라 전개된다. 극 중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테바이를 구한 영웅이자, 역병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며 구원을 약속하는 인자하고 유능한 통치자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가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면 장님이 되어 자신을 추방해 달라 애원하는 처지가 된다. 오이디푸스의 이 파국은 그의 죄나 도덕적 결함과는 무관한, 단순한 과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라이오스의 살해범을 저주하고, 마치 친부인 양 복수를 다짐하지만, 결국 신이 내린 가혹한 운명 앞에서 무력할 뿐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제야말로 끔찍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구나!”라고 한탄하는 목자 앞에서 오이디푸스가 “나는 듣지 않을 수 없고, 그래도 기어이 들어야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운명과 적극적으로 맞서는 영웅적 면모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오오, 햇빛이여, 내가 너를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기를!”이라 외치며 궁전 안으로 달려가고, 목매달아 자살한 이오카스테의 시신 옆에서 그녀의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찔러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이처럼 오이디푸스는 두려운 진실 앞에서 이를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니체는 이러한 오이디푸스를 “고귀한 인간”으로 규정한다. 니체에 따르면,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모든 법과 자연의 질서, 도덕 세계를 붕괴시켰으나, 바로 그 행위를 통해 “붕괴된 낡은 세계의 폐허 위에 새로운 세계를 세우는 보다 높은 마술적인 영향권”이 구축된다.

 

3. 오텔로의 ‘무의식’

   한편, 한때 그렇게도 고매했던 오텔로 장군이 비극적 결말을 맞은 이유는 외부의 신탁이나 예언이 아니라, 그의 무의식 속에 깊이 자리한 열등감과 불안이었다. 이밀리아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그는 이아고에게 달려들어 “벼락이라도 맞고 죽어라, 이 악랄한 놈!”이라고 외친다. 그러나 곧, 파국의 원인이 단지 이아고의 흉계가 아니라 “일단 속임수에 걸려들자 앞뒤를 가리지 못한” 자신의 내면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을 향해 “아, 저주받은 노예놈!”이라며 자책하고, 결국 스스로 칼을 찔러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셰익스피어의 『오텔로』는 로도비코가 마지막 대사를 남기고 퇴장하며 막을 내린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 스파르타의 개 같은 놈! 고통이나 굶주림, 성난 바다보다 더 잔인한 놈! 침대 위의 이 처절한 광경을 보라. 모두 네놈의 짓이다.” 이는 표면적으로 이아고를 향한 외침이지만, 이 마지막 장면은 독자에게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아고라는 인물이 오텔로의 무의식이자, 더 나아가 근대인의 무의식을 대변하는 존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흑인이라는 인종적 조건, 고령, 서툰 사교술에 대한 오텔로 내면 깊숙이 자리한 열등감과 콤플렉스는 자기혐오와 편집증을 낳았고, 이는 타인에 대한 증오로 번졌다. 그는 속임수를 당하기 전에 이미 속아 넘어갈 조건을 스스로 완벽히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4. ‘은폐된’ 오텔로의 과오

   소포클레스와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문명인이 스스로를 “유일한 실재로 가장하는 문화”나 “현실이라 부르는 허위와 가식”과는 거리를 두며, 개인의 주관적 의지가 아니라 존재의 심연, 곧 자연의 본래적 진리를 드러낸다. 니체에 따르면, 이러한 비극은 “개별화의 원리 뒤에 있는 전능한 의지를 표현하는 예술”이자 “모든 현상의 피안에 존재하며 어떤 파멸에도 굴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우리가 비극 속에서 형이상학적 기쁨을 느끼는 까닭은,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디오니소스적 지혜가 형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관객은 가상이나 아름다움의 범주를 넘어, 개체의 파멸 그 자체로부터 예술적 쾌감을 얻는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비극의 주인공이 파멸하더라도 그는 “의지의 최고의 현상”이며, 그 파멸이 의지의 영원한 생명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의 종족 전체보다 귀한 보물을 어리석은 인도인처럼 스스로 내던진 사나이”이자 “자기 망상 속에서 몰락한 근대인”인 오텔로도 과연 고귀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오텔로』가 남긴 마지막 여운을 우리는 과연 예술적 카타르시스나 쾌감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자신의 지혜에 의하여 자연을 파멸의 심연에 빠뜨리는 자는 그 자신에게서도 자연이 해체되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는 니체의 소포클레스 해석은 셰익스피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단 오이디푸스가 사건의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가다가 결국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변증법적 과정 속에서 그리스인들은 오히려 기쁨을 맛보았고 그 결과 『오이디푸스 왕』에는 작품 전반에 걸쳐 일종의 ‘명랑한 분위기’가 감돌았다면, 『오텔로』는 우리에게 섬뜩함과 절망감을 남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그리스 비극과 마찬가지로 디오니소스적 예술로 규정될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고대의 독자와 달리 이 작품에서 그리스적 명랑성을 경험하지 못한다. 타자와 구별된 개체로서, 정해진 규범과 경직된 환경 속에 살아가는 근대인의 시선에서 보면, 오텔로의 심연에 자리한 끔찍한 자기 파괴적 충동은 드러내기보다는 은폐하고 싶은, 야만의 속성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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