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이성비판강의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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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산아래 작성일25-09-07 08:01 조회61회 댓글0건본문
『순수이성비판』강의 에세이/수성/2025.09.10/안미선
충만과 공허의 경계에서
감이당에서 일주일에 2시간씩 강의를 듣는 것으로 철학 공부가 시작되었다. 그 즈음 강의를 듣고 집으로 향하던 길에 느꼈던 그 충만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 세미나와 1년 과정의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충만한 마음에 공허한 감정이 겹쳐졌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행동들을 복기하는 습관이 있는데 주로 나의 미흡했던 점만 보였다. 더구나 글쓰기 합평 후에는 자괴감에 마음이 어수선하여 한참을 헤메이곤 하였다. 그리하여 간혹 강의만 듣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은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순수이성비판』 강의” 강독 시간에 와 닿은 통각(자기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나의 이러한 상태를 분석해 보았다.
초월적 통각과 대상=X
칸트의 인식론에서 감성은 직관적 표상들의 수동적인 수용 형식체이다. 그리하여 인식이 성립하려면 표상들의 결합 능력으로서 순수한 자발성의 지성적 활동이 필요하다. 표상들을 일정한 질서와 연관 아래 결합하는 지성의 작용을 종합(통일)이라고 한다. 이는 지성의 가장 중요한 작용이고, 인간에게만 있는 고유한 능력이다. 즉, 우리가 무언가를 개념을 통해 인식한다고 하였을 때, 직관적 표상들의 종합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종합된 잡다들의 통일이 있어야 하는데 이 통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을 칸트는 ’통각‘이라고 불렀다. 통각은 지성의 근본 기능이다.
칸트는 이 ‘통각’을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로 이해하였다. 이 ‘나는 생각한다’라는 표상이야말로 자발적인 것이므로 감성에 소속될 수 없는 것이다. 이 표상은 모든 경험 이전에 선험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므로 순수하고 근원적인 통각이라 할 수 있다. 수 많은 표상들에 모두 ‘나는 생각한다’가 수반된다는 것은 곧 표상들의 잡다 속에서도 나는 하나의 동일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칸트는 “나는 그것을 근원적 통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여타의 모든 표상들에 수반할 수밖에 없는 ‘나는 사고한다’는 표상을 낳으면서, 모든 의식에서 동일자로 있는, 다른 어떤 표상으로는 이끌어낼 수 없는 자기의식이기 때문이다”(B132)라고 하였다.
이렇게 자기의식으로서 통각은 인식의 근원적인 초월적 조건이다. 그리하여 칸트는 이를 “초월적 통각”이라고도 하였다. 이 초월적 통각에 의해 초월적 대상=x가 만들어 진다. 이 대상은 우리의 종합적 구성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언제나 직접 경험할 수 없는 미지의 x이다. 미지의 x인 이유는 이것이 상상력의 종합과 통각의 통일이라는 활동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이므로 이 활동이 멈추면 사라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대상은 “우리의 통각과 상상력이 범주의 도움을 받아 형성한 우리의 창작품이다.”(이수영, 『순수이성비판』 강의, 165쪽)
분열된 주체
이러한 칸트의 인식론을 통해 나의 상태를 분석해 보자면,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들은 감성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직관(시공간)을 통해 직관적 표상들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표상은 마음의 변양 없이 발생할 수 없는데, 이 마음의 변화가 내감”(앞의 책, 150쪽)이다. 따라서 표상들은 내감의 형식적 조건인 시간에 종속된다. 이로써 ‘충만하거나 공허한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의 상태 변화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자괴감에 공허한 나’라는 존재도 초월적 통각의 창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초월적 통각, 즉 자기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대상=X로서의 나는 ‘어떤 나’인가? 이 ‘나’는 나의 인식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나’는 직관적 표상들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나’는 ‘나 자신’도 아니다. 직관적 표상들을 지성이 종합(통일) 하여 구성한 ‘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칸트의 인식론에서 주체는 ‘생각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로 분열되었다.
그렇다면 인식의 대상도 아니고 ‘나 자신’도 아닌 이 ‘나’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칸트는 이 ‘나’는 경험의 대상이 아닌 경험 가능성의 조건으로만 존재한다고 하였다. 경험이 불가능한 이유는 이 존재는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렇게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것도 실제화 하였다. 그리하여 경험의 대상이 아닌 신도 인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반면에 칸트는 경험이나 인식은 직관적 표상들의 종합통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 대상=X는 경험 가능성의 조건으로만 의미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 어떤 뜻인가? 칸트는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명시하였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은 경험이 가능한 영역, 즉 직관의 영역이고, 사고의 영역은 경험 가능성의 조건이 된다. 이 경험 가능성의 조건으로만 존재하는 대상=X의 속성은 어떠한가?
새로운 주체의 탄생
‘나는 생각한다’, 이 자기의식의 창작품인 대상=X로서의 ‘나’는 실체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나’는 아무런 내용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나’는 통각과 상상력이 범주의 도움을 받아 형성한 것이다. 그리하여 직관적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칸트는 이를 “하나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가 없으며, 그것은 모든 개념들에 수반하는 한낱 의식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모든 사고에 수반되는 이 ‘나’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경험 조건이 필요하다. 그런데 직관적 질료들이라는 표상의 형태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실존하는 것으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초월적 주체=X’(‘나’)는 표상이 아니라 표상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 즉 하나의 ‘형식’이기 때문에 인식될 수 없다. 모든 표상들을 우리의 사고로 만드는 의식(‘나는 ~을 생각한다’)은 일종의 논리적 의미 이외에 실제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이 논리적이고 이념적인 주관을 연장적 실제처럼 실재하는 실체, 경험할 수 있는 고정불변적인 실체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통하여 난 아직 데카르트적 사고체계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대상중심의 사고체계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그리고 칸트의 질문처럼 나는 그동안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공부의 화두였던 것 같다. 칸트에게 이 질문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되는 지점이 참 흥미롭다. 인간은 직관적 질료만을 인식할 수 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 이성은 절대적 통일성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이 욕망에 대한 칸트적 해석은 이렇다.
“인간의 이성(reason)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서는 특수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 이성은 이성의 자연본성 자체로부터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물리칠 수도 없고 그의 전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AVⅡ)라고 하였다.“어떤 종류의 인식에서는 특수한 운명”이란, 우리는어떤 조건에 제약되어 있어 자유롭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조건에 구속되지 않는 절대적 존재 즉 신같은 무조건자를 찾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 신이 도덕적 논법으로서의 신이든, 아니면 절대적 능력의 신이든 간에, 칸트에게 신은 어쩌면 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된 실천적 대상으로서의 존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대상중심에서 대상을 구성하는 주관중심이라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서 탄생한 새로운 주체에게서 나온 질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질문 앞에 우리는 우리 삶의 주체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스스로 찾아야 하는 길 위에 놓이게 되었다. 이 길 위에서 나는 ‘충만과 공허“라는 감정과 마주하게 된 것은 아니였을까, 이렇게 새로운 주체는 초월적 통각에서 비롯된 대상=X라는 스스로 구성해 낸 자신에게 구속된 존재이자 동시에 스스로 자신을 구성해 낼 수 있다는 자유 앞에 서있는 존재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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