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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의 QnA] 2주 후기 - 제어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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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6-06-09 06:56 조회8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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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을 보러 가면 달걀부터 집는다. 한 판을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언젠가부터 껍데기 옆에 찍힌 숫자를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1번이 좋고 4번이 나쁘다는 것 정도는 안다. 닭이 어떤 자리에서 그 알을 낳았는지를 그 한 자리 숫자가 말해 준다는 것도. 그런데 비싼 달걀을 골라 봐도 거기 찍힌 건 자꾸 4였다. 한 마리가 겨우 몸을 돌릴 만한 칸, 옆 칸의 부리가 닿을 만한 칸, 그 안에서 평생 알만 낳는 닭. 돼지가 새끼 곁에서 몸도 못 트는 그 칸의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는데, 닭도 지금 그러고 있다는 거였다. 손에 쥔 달걀이 무거워졌다. 이걸 먹어도 되나. 계산대 앞에서 그런 걸 생각하는 사람은 나만은 아닐 것이다. 세미나에 모인 사람들도 같은 자리에서 멈칫했다고 했다.

그날 우리가 펼친 건 하라리의 책이었다. 거기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에서 인간은 이미 오래전에 신이 되었다. 우리가 그다지 정의롭거나 자비로운 신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 깊이 들여다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1부 2장 「인류세」)

신이라는 말 앞에서 다들 한 번 멈췄다. 우리가 닭의 칸을 짜고 돼지의 칸을 짠 그 손을 신의 손이라 부른다면, 그건 들여다보기 싫은 종류의 신이었다. 그 손은 가두기만 한 게 아니라 먹이고 돌보고 살렸다. 살리는 손과 가두는 손이 같은 손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통제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칸 속의 사람들

통제. 제어. 지배. 누가 먼저 꺼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말이 한 번 나오자 그 말이 자리를 옮겨 다녔다. 인간이 동물을 통제한다. 인간이 자연을 제어한다. 인간이 지구의 어떤 짐승보다 위에 서서 지배한다. 세 단어는 조금씩 다른 얼굴을 했지만, 쓰다 보면 결국 한 말이었다. 누가 위에 있고 누가 아래에 있는지를 정해 놓고 시작하는 말. 우리는 이 말을 쓸 때 거의 멈추지 않는다. 농업이 시작되고, 짐승을 가축으로 길들이고, 그 가축을 공장으로 들여보내 식탁까지 실어 오는 그 긴 줄 어디쯤에서, 사람은 슬그머니 신의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누군가 말했다. 유신론이 신을 내세워 농업을 정당화했다면, 인본주의는 인간을 내세워 공장식 축산을 정당화했다고. 책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했다. 신을 끌어내린 자리에 인간이 앉았고, 인간은 거기서 닭의 칸과 돼지의 칸을 설계했다. 그러니까 통제라는 말은 단순한 동사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매일 그 말을 쓴다.

그런데 이상한 건, 통제한다는 말이 곧장 다른 말을 불러온다는 점이다. 통제하지 못하는 것. 그게 나타나는 순간 방의 공기가 바뀌었다. 말이 AI로 옮겨 갔다. 매트릭스 이야기가 나오고, 몸을 가진 로봇 이야기가 나오고, 그게 다음 세대의 일인 줄 알았는데 우리 세대의 일이 되어 버렸다는 말이 나왔다. AI가 우리한테 너는 인간인 것 말고 나보다 나은 게 뭐가 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지 않냐고 누가 말했다. 한동안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통제 바깥에 있는 것은 다 무서웠다. AI든, 병이든, 죽음이든. 한 사람이 그 마음을 이렇게 옮겼다. 책을 읽을 때도 그렇고 신화를 읽을 때도 그런데, 잠을 청하려고 누우면 이 도시가 앞으로 어디로 갈지, 나하고 같이 공부하는 이웃들은 어떻게 될지가 자꾸 떠오른다고. 그러면서 물었다. 이런 마음으로 던지는 질문이 과연 옳은 질문이 될 수 있겠느냐고.

여기서 한 사람이 거꾸로 물었다. 만약 저 닭이, 저 돼지가 정말 자유로운 자리에서 길러진다면, 그래도 우리가 그걸 먹는 건 마찬가지 아니냐고. 그 말에 다들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문제는 자리의 넓이가 아니었다. 넓은 칸도 칸이고, 좋은 자리도 내가 짜 준 자리였다.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는 일조차, 결국 내가 편히 먹기 위해 그들을 관리하는 일의 한 방식이었다. 동물복지라는 말도 그랬다. 누군가 말했다. 동물의 환경권이라는 게 달라진다 해도 그것은 곧 인간의 위생과 관리에 닿아 있어서, 결국 그것도 다 인간이 관리하는 일 아니냐고. 보호한다는 건 내가 위에 서서 아래에 있는 것을 살핀다는 뜻이었다. 살린다, 돌본다, 지킨다는 말이 다 그랬다. 그 말을 하는 동안 누가 살리는 쪽이고 누가 살려지는 쪽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보호는 통제의 반대말이 아니라 통제의 부드러운 얼굴이었고, 그 밑에는 지배가 그대로 깔려 있었다. 한 사람은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 이야기를 했다. 그 강아지한테도 미안하다고. 너는 나 때문에 이렇게 반갑다고 꼬리를 흔드는 거구나 생각하면 마음이 좀 그렇다고. 내가 먹이를 쥐고 산책 시간을 쥐고 문을 여닫는 손을 쥐고 있는 한, 그 반가움도 내가 짜 놓은 자리 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도 소유가 들어 있었다. 우리가 무엇을 보살핀다고 말할 때, 그 보살핌은 자주 통제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날 가장 오래 남은 건 숲산책 샘이 그린 그림이었다. 공장 안에 돼지들이 소시지처럼 한 마리씩 칸칸이 들어 있다는 대목을 읽다가, 숲산책 샘은 문득 사람의 모습을 떠올렸다고 했다. 서울로 청년들이 다 모여드는데, 마포 어디쯤 원룸 촌에 아들 방을 얻어 두고 일주일에 하룻밤씩 거기서 지낸다고 했다. 거기 가면 청년들이 보인다고. 칸마다 들어 있는 돼지나 닭처럼, 청년들도 원룸 한 칸씩에 들어앉아 노트북을 보고 스마트폰을 보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다고. 자기 칸 안에서 생각을 넓히는 게 아니라 점점 그 칸 속으로 고립되어 들어가는 것 같다고. 돼지도 꿀꿀거리고 닭도 운다. 그 소리는 칸 밖까지 들린다. 그런데 서로에게 그것을 공명하거나 공감하지는 않는다. 청년들도 괴롭다고 말하면서 옆 칸의 소리에 응답하지는 않는다. 각자 자기 칸 안에 있는 것이다. 숲산책 샘은 말했다. AI 시대가 특별한 로봇으로 와서 우리를 억누르는 게 아니라, 우리 정신을 잠식해 들어와서, 우리가 스스로 자기 칸 속에 누운 돼지처럼 고립되는 방식으로 오는 것은 아니겠냐고. 그러면서 미안한 듯 덧붙였다. 내가 너무 어두운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고.

화면을 끄고 나서도 그 그림을 자꾸 되짚었다. 처음부터 칸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래전 어느 사람들은 짐승과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같은 물을 먹고 같은 추위를 났다. 짐승에게서 젖을 얻고 털을 얻고 힘을 빌렸고, 그 짐승이 죽으면 그 자리에서 한 번쯤 손을 모았을 것이다.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잘 가라고. 죽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무언가를 빌어 주던 그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함께 사는 사이였으니까. 그런데 그 함께 사는 일이 수백 년을 지나고 수천 년을 지나면서 조금씩 한쪽으로 기울었다. 젖을 얻던 일이 젖을 짜내는 일이 되고, 힘을 빌리던 일이 힘을 부리는 일이 되고, 죽음 앞에 손을 모으던 일이 도축 수를 세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천천히, 함께 있던 것이 먹거리가 되었다. 누구도 어느 날 작정하고 그들을 칸에 넣은 게 아니었다. 다만 함께 산다는 말이 닳고 닳아, 어느새 관리한다는 말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통제도 지배도 처음부터 거기 있던 게 아니라, 함께였던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굳어 가며 남긴 자국이었다.

숲에서 나눈 두 사람의 말, 정해진 길과 뛰어드는 일

여기서 우리는 책을 한 권 더 펼쳤다. 한 방향으로만 굳어 온 그 시간을 거꾸로 되감아 본 사람들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마하바라따였다. 노름에 져서 모든 걸 잃은 다섯 형제가 열두 해를 숲에서 살아야 하는 이야기. 다섯 형제의 아내인 드라우빠디가 어느 날 숲의 고요를 깨고 남편 유디슈티라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모욕당했고 빼앗겼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고. 분노가 없고 도전하지 않는 것은 전사의 법이 아니라고. 지금은 저들에게 힘을 보여 줄 때라고. 그 말 밑에는 꽉 찬 분노가 있었다. 회당으로 끌려 나와 머리채를 잡히던 그날의 수치가 있었다. 그 분노를 느낀 유디슈티라는 분노로 받아치지 않고 평온하게 받았다.

"분노는 모든 생명을 파멸로 끌고 가는 힘이다. 자신을 다스리는 자만이 왕국의 적임자이며, 인내와 자비가 왕의 다르마다. 나는 결실이 드러나기를 바라며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보시와 제사를 의무로 여기고 다르마에 의해 살 뿐, 결실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마하바라따』 「숲의 책(Vana Parva)」, 드라우빠디와 유디슈티라의 대화)

같은 사건을 둘은 다르게 쥐었다. 드라우빠디의 말은 복수의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적의 허점을 찾아내 자신은 물론 동지의 빚도 갚아야 한다는 말로. 유디슈티라의 말은 바깥으로 넓어졌다. 다르마로, 보시로, 자비로, 자유로. 한쪽은 통제하려는 힘이었고, 다른 한쪽은 함께 살아가려는 힘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하는 말의 알맹이는 사실 같았다. 행위에는 반드시 결실이 따른다. 이건 둘 다 인정했다. 다른 건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쥔 마음이었다. 한 사람은 분노로 시작했고, 한 사람은 평온으로 받았다. 발제를 맡은 사람은 그 차이를 이렇게 옮겼다. 우리가 무언가를 어떻게 해야 할까 물을 때, 먼저 우리 마음을 한번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그 마음 밑바닥에 잠을 설치게 하는 것이 깔려 있다면, 우리가 찾는 답이라는 것도 결국 그 마음을 달래는 답밖에 못 되지 않겠느냐고.

그날 우리를 가장 무겁게 누른 단어는 알고리즘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게 다 알고리즘대로 굴러가는 것 아니냐고. 마하바라따에서도 드라우빠디는 같은 의심을 품었다. 모든 것이 조물주의 손에 미리 정해진 일이라면, 힘없는 인간은 너무 안타까운 것 아니냐고.

"사람은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그것이 우연이건 저절로 굴러든 것이건 전생의 업보로 생긴 것들이다. 조물주가 전생의 업을 파악해 금생의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결실도 자질도 볼 수 없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이 번성하도록 힘과 능력에 따라 장소와 방법을 지혜로이 살려 자신을 이롭게 한다." (『마하바라따』 「숲의 책(Vana Parva)」, 드라우빠디의 말)

업보가 다 정해 두었다 해도,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결실도 없다는 말. 그 한 줄이 마음에 박혔다. 한 사람이 말했다. 나사가 아무리 정밀하게 숫자를 계산해도 자연이 주는 조건 앞에서 변수가 끊임없이 일어난다고. 작은 구멍 하나가, 변수 하나가 큰일을 해낼 수 있다고. 그러니 내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움직여 보자고. 그래서 다섯 번 먹을 걸 한 번으로 줄여도 보자고. 발제자는 그 마음을 마하바라따의 한 사람에게서 다시 찾았다. 유디슈티라가 그러하듯, 분노가 아니라 상상하는 즐거움으로 세상에 계속 참여하면, 내가 참여하는 만큼 세상이 다르게 열린다고. 책상에 앉아 지혜만 쌓고 있어서는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어떻게든 내가 세상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다만 그게 분노의 방식은 아니라고.

토론을 닫으며 Dandi가 새 질문을 꺼냈다. 우리는 왜 다른 존재를 만날 때, 그것을 자꾸 대결이나 지배의 구도로 보느냐고. 내가 돼지를 먹든 벼를 먹든 그건 본디 똑같은 일이고, 방식이 다를 뿐인데, 우리는 거기에 제어니 통제니 하는 단어를 얹는다고. 그러면서 물었다. 왜 AI를 통제의 상대로만 보는가. 그냥 AI와 주고받으면 안 되는가. 인터넷이 처음 왔을 때도 우리는 그것과 주고받으며 살았다. 그렇다면 AI와도, 동물과도, 식물과도, 통제하거나 통제당하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사이가 될 길을 찾으면 되지 않겠냐고. 통제라는 단어를 빼고 그 자리에 주고받는다는 말을 놓자, 같은 풍경이 다르게 보였다. 닭은 내가 통제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갚아야 할 상대가 되고, 청년의 원룸은 가두는 칸이 아니라 옆 칸의 소리에 응답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다만 그렇게 보려면 먼저 내 마음과 거리를 두어야 했다. 잠을 설치게 하는 것에 떠밀려 던진 질문은 그것을 달래는 답밖에 못 찾으니까. 거리를 두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거기서부터 다른 질문이 시작될 수 있다고 우리는 말했다.

온라인 세미나를 끝내고 늦은 저녁을 먹으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오늘 사 온 달걀 한 판이 거기 있었다. 이번엔 4 대신 껍데기에 '동물복지'라고 찍혀 있었다. 나는 그걸 다시 들여다보았다. 좋은 자리에서 나온 달걀이라는데도, 이걸 먹어도 되나 하는 물음은 그대로였다. 다만 같은 물음이 다르게 들렸다. 답은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가 아니었고, 4번 칸이냐 동물복지 칸이냐도 아니었다. 좋은 칸도 결국 내가 짜 준 칸이라는 걸 그날 확인했으니까. 답은 차라리 단어 하나를 바꾸는 일에 가까웠다. 통제한다는 말을 주고받는다는 말로. 살린다는 말, 지킨다는 말, 보호한다는 말이 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말이었다면, 주고받는다는 말에는 위아래가 없었다. 그 작은 바꿈이 다섯 번 먹을 걸 한 번으로 줄이는 손이 되고, 옆 칸의 소리에 한 번 귀를 기울이는 일이 되고, 분노 대신 상상으로 세상에 뛰어드는 한 걸음이 된다면. 유디슈티라가 숲에서 했던 말처럼,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결실도 없으니까. 나는 달걀 한 알을 꺼내 손에 쥐었다. 처음 장을 보던 그 자리에서처럼 조금 무거웠다. 그 무게를 모른 척하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게 내가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변수일지도 몰랐다.


이 글은 감이당 세미나세상 모든 것의 QnA에서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와 『마하바라따』 4권을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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