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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철학의 질문들] 불온한 신화 읽기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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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6-03-26 06:40 조회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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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루크셰트라 전장에서 아르주나가 활을 내려놓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연민의 표현으로 읽어왔다. 전차 위에서 몸을 떨며 활을 내려놓는 아르주나의 모습은 인간의 양심이 전쟁 앞에서 겪는 고통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그 장면에 달라붙어 떠나지 않는 물음이 있다. 이것은 비폭력인가, 아니면 책임의 회피인가.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의 망설임을 거두지 않는다. 그는 설득하고 논리를 펼치고, 급기야 우주적 형상을 드러내기까지 하며 아르주나를 싸움으로 이끈다. 싸워라. 그것이 네 다르마다. 이 두 마디가 이 에세이의 출발점이다.

 

결과를 내려놓으라는 말의 두 얼굴, 그리고 현대의 전장

바가바드 기타의 후세 해설자들은 기타가 삶의 세 가지 길을 가르친다고 말해왔다. 지혜의 요가, 행위의 요가, 사랑의 요가. 간디를 비롯한 많은 해석자들이 지혜와 사랑을 강조하는 동안, 행위의 요가에 집중하는 목소리는 드물었다. 그러나 기타의 핵심 긴장은 바로 이 까르마 요가에 있다.

그 명령은 단순하게 들린다. 행위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그러나 이 명령 안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얼굴이 겹쳐 있다.

첫 번째 얼굴은 해방이다. 결과에 대한 불안을 내려놓을 때 인간은 비로소 지금 여기에 온전히 있을 수 있다. 미래의 두려움이 현재의 행위를 왜곡하지 않는다. 결과에서 자유로운 행위만이 행위 본래의 순도에 도달한다.

두 번째 얼굴은 복종이다. 결과를 묻지 않고 행위에 집중하라는 명령은, 동시에 조직의 부품이 되기에 가장 좋은 정신적 조건이기도 하다. 상관이 시키는 일을 하되 그 결과를 묻지 마라. 이 논리는 어떤 폭력에도 가담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낸다. 텍스트는 이 의심을 스스로 거두지 않는다.

 

"그대의 특권은 행위 자체에 있을 뿐 전혀 결과들에 있지 않다오. 행위의 결과를 행위의 수단으로 삼지 마시오. 그대는 행위를 하지 않음에도 집착하지 마시오."

— 『바가바드 기타』 2장 47절

 

크리슈나의 이 말은 제1의 길(욕망을 좇는 행위)도 제2의 길(행위 자체를 거부하는 고행)도 아닌 제3의 길을 가리킨다. 행위하면서도 행위의 결과에서 자유로운 길. 이 두 얼굴 중 어느 쪽으로 읽느냐는 텍스트가 아니라 읽는 사람이 결정한다. 그 결정이 곧 삶의 방향이 된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이 두 얼굴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2026년 초, 중동 전쟁에 반대하며 트럼프 행정부를 사직한 존 켄트는 이후 FBI 수사를 받게 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는 판을 거부한 자다. 다르마가 요구하는 자리에서 다르마 자체를 문제 삼으며 물러난 인간이다. 그 선택 이후 무엇이 기다리는지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행위했고, 그 결과를 자신이 감당하고 있다.

같은 시기, 서울 도심에서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한 아이돌 그룹의 공연을 앞두고 26만 명의 관객이 올 것이라는 예측이 언론을 통해 확산되었다. 경제적 파급 효과가 수조 원으로 계산되었다. 편의점 점주들은 샌드위치를 수백 개씩 준비했고, 국위 선양이라는 대의가 그 모든 선택을 정당화했다. 결과적으로 참석 인원은 예측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흥행의 성패가 아니다. 기대치를 만들어낸 언론은 결과에 아무 책임을 지지 않았다. 공연 전에 반대 의견을 묵살했던 여론은 뚜껑이 열리자 태도를 바꾸었다. 자신이 한 말에 책임지지 않는 것 — 이것이 세미나에서 "언론의 폭력"으로 불린 것의 실체다.

존 켄트와 편의점 점주는 대조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그러나 두 경우에서 공통으로 드러나는 것이 있다. 행위의 결과를 누가 감당하는가. 까르마 요가가 말하는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는 욕망은 내려놓되 책임은 끌어안으라는 것이다. 책임을 내려놓으라는 말이 아니다.

 

비폭력은 폭력의 부재가 아니다

책임을 온전히 감당한 행위는 역사에서 어떤 모습이었는가.

1919년 3월 1일, 아무도 지시하지 않았는데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일어섰다. 쌀가마를 지고 장터에 온 사람이 짐을 내려놓고 단 위에 올라섰다. 독립을 외쳤다. 그는 잡혀갈 것을 알고 있었다. 총칼을 든 순사들이 군중을 향해 움직일 것을 알면서도 빈손으로 서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비폭력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비폭력의 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너무 쉽게 지나친다. 단 위에 오르기까지, 그 사람의 내면에서는 두려움과, 가족에 대한 걱정과, 혼자라는 고독과의 싸움이 먼저 치러졌다. 비폭력적 행위란, 그 내면의 전쟁을 먼저 치른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외면의 고요함이다.

간디의 역설은 여기서 이해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간디는 영국을 위해 젊은이들이 총을 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비폭력의 사도가 폭력을 권했다는 이 역설은, 비폭력을 "폭력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는 한 풀리지 않는다. 간디가 말한 것은 이것이다. 폭력을 감당할 수 있음을 먼저 증명한 자만이 진정한 비폭력을 선택할 수 있다. 내면의 전쟁을 치르지 않은 채 행하는 비폭력은 용기가 아니라 두려움의 다른 이름이다.

『불온한 신화』의 저자는 이 지점에서 기타 원문을 이렇게 읽는다.

 

"크리슈나가 '싸우라!'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너 자신과 싸우라!'고 하는 뜻이다. 자신 안에 놓여 있는 유약함과 거짓됨을 물리치기 위해 그렇게 만든 원인을 찾아 당당하게 대면하고 싸우라는 뜻이다. 따라서 싸우라는 가르침은 폭력의 가르침이 아니다. 도리어 자신과 싸워 이김으로써 진리에 도달하게 만드는 가혹하고 냉철한 비폭력의 가르침이다."

—  『불온한 신화 읽기』 3장

 

칼을 내려놓는 것이 비폭력이 아니다. 칼을 든 채로 자기 내면의 전장을 먼저 완전히 치른 자가, 비로소 그 칼의 의미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나의 본성이 시대의 악과 충돌한다면, 나는 결과를 무시하고 행위 자체에 몰입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판 자체를 거부하는 불온한 개인이 되어야 하는가. 이 물음으로 이 에세이는 시작되었다. 불온한 개인이란, 판을 거부하기에 앞서 그 판의 무게를 먼저 견딘 자다. 아르주나는 결국 싸웠다. 기타는 그 결과에 대해 말한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욕망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욕망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두려움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 두려움이 없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자유이다."

—  『불온한 신화 읽기』 4장

 

까르마 요가는 결과를 포기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결과에 대한 욕망이 행위를 오염시키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 싸우라는 요청이다. 그 싸움을 치른 자만이, 칼을 내려놓을지 아니면 칼을 들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그것이 불온한 개인이 서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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