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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철학의 질문들] 불온한 신화 5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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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6-04-08 11:27 조회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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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속에서 멈추는 연습


1. 알고 있다, 그래도 한다

라스베이거스의 ㅋㅏ지노에는 창문이 없다. 시계도 없다. 시간이 흐른다는 감각 자체를 지워버린 공간이다. 들어서는 순간 이미 무언가가 결정된다는 걸 알면서도 사람들은 들어선다. 세미나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주사위 판으로 딱 들어서는 순간, 모든 거는 정해진 거 아닌가." 그 말을 듣는 동안 나는 유디슈티라를 생각했다. 마하바라타의 주사위 판, 그 회당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이미 왕국이 사라지고 형제가 팔리고 아내가 끌려 나온다. 이 위대한 왕은 한 번도 이기지 못할 판에 다섯 번 더 앉는다. 매번 주사위를 집어 들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차마 못할 일이지만. 알고 있다. 그래도 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인간이 산다.

유디슈티라가 주사위를 집어 드는 건 이성이 꺼졌기 때문이 아니다. 단디 샘의 발제문은 이 지점을 정확하게 짚는다. 욕망은 이성을 끄지 않는다. 이성은 다른 방향으로 켜질 뿐이다. 이기고 싶다는 이성, 이번엔 다를 것이라는 이성, 여기까지 왔으니 되돌릴 수 없다는 이성이 뒤에서 판을 밀어붙인다. 드리타라슈트라는 그 구조의 가장 완벽한 예시다. 아들들이 숲을 떠났다는 보고를 받는 그 순간에도 이미 알고 있었다. 패망이 다가오면 신이 먼저 이성을 마비시킨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맹인이 그 마비의 가장 정확한 증거로 살아간다. 이성이 꺼지는 게 아니라 포획된다. 포획된 채로 작동한다. 그게 더 무섭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야식을 먹는다. 자야 한다는 걸 알면서 스크롤을 내린다. 그 회의가 시간 낭비라는 걸 알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안다. 그래도 한다. 유디슈티라와 나 사이에 거리가 없다. 왕관이 없고 카스트가 없고 아내를 판돈으로 얹지 않는다는 차이만 있을 뿐, 구멍의 구조는 같다.


2. 걸 것이 없는 곳

이성이 포획당하지 않는 조건이 있다면, 그건 수련의 연수가 아니라 배치의 문제일지 모른다. 세미나 말미에 신영복 이야기가 나왔다. 20년간 감옥에서 가족에게 편지를 써온 사람, 한 달에 한 장씩, 오탈자 하나 없이 써낸 사람이다. 검열이 있었으니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한 달 동안 머릿속에서 수만 번 썼다가 지우고 나서야 종이에 옮긴 사람, 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살 수 없는 곳에서, 그 편지를 썼다. 이길 수도 없고 질 수도 없는 자리. 그 배치 안에서만 가능한 글이 있다는 것을 그는 몸으로 보여준 셈이다. 그 편지들은 나중에 공개되었고, 읽은 사람들의 마음에 무언가가 일었다. 그가 의도한 결과가 아니었다. 대가를 기대하고 쓴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인데, 그게 닿은 것이다.

배치가 인간을 다르게 만든다는 것을, 인도는 다른 방식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힌두교의 신이 몇이냐고 물으면 3억이라고 답한다. 어떤 이는 거기에 1을 더한다. 3억 플러스 1, 그 하나가 자기 자신이다. 인도에서는 내가 기준이다. 아침에 나가다가 오늘은 크리슈나를 따르겠다 싶으면 그렇게 살고, 점심을 먹고 나니 기운이 달라졌다 싶으면 다른 신을 택한다. 집안마다 다르고 동네마다 다르고, 상위법이 종교법이고 그 종교법도 각자가 해석한다. 우리 눈에는 엉망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엉망에는 비교가 없다. 자기 다르마가 아무리 허술해도 남의 완벽한 다르마보다 낫다고, 바가바드 기타 어딘가에 쓰여 있다. 기준이 각자에게 있으니 다른 사람의 자로 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인도는 왜 그 모양이냐"고 물을 때, 우리는 이미 자본이라는 단일한 신을 들고 서 있는 것이다. 자본신의 교리는 간명하다. 노동해서 벌고, 남으면 쌓고, 소비하라. 어기면 가난이라는 심판이 내려진다. 이 단순한 신이 지구 전체를 손에 쥔 채, 그 손 안에서 우리는 인도를 낙후라고 부르고 K-문화의 부상을 자랑스러워하며 더 많은 나라가 우리처럼 살기를 원한다. 자본신의 눈으로 본 지도에는 방향이 하나뿐이다. 그 지도 안에서 살면서 그 지도 바깥을 묻는 것, 그게 이 에세이가 드라우파디에게 가는 이유다.


3. 막간의 질문 하나

회당에 머리채를 잡혀 끌려온 드라우파디는 달거리 중이었다. 옷 한 겹. 둘러앉은 건 왕들과 장수들이었다. 가장 불결하다고 여겨지던 몸이, 가장 고귀한 회당 한가운데에서, 가장 논리적인 질문을 꺼낸다. 알림꾼에게 묻는다. 당신과 나 중에 누구를 먼저 이겼습니까. 울면서 묻는데 질문이 정확하다. 유디슈티라가 자기 자신을 걸고 진 다음에 아내를 건 것이냐, 아니면 이미 자신을 잃은 사람이 남의 것을 판 것이냐. 그게 판가름되지 않으면 지금 이 자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 질문 하나가 회당 전체를 잠시 멈추게 했다. 유디슈티라가 좋거나 나쁜 대답을 줄 수 없었다고 서술자가 전한다. 그 한 순간에 신이 개입하고 옷이 한 겹씩 더 생겼다. 신화의 언어로는 그렇다. 현실의 언어로는 이렇다. 집에 돌아올 차비, 그만큼이 주어진 것이다. 왕국이 돌아온 게 아니고 형제들이 살아난 게 아니다. 다만 옷이 다 벗겨지지 않은 것, 그게 이성이 할 수 있는 일의 실제 크기다.

세미나에서 테트리스 이야기가 나왔다. 87년에 32비트 컴퓨터를 사서 레벨을 올리려고 밤을 꼬박 샌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말했다. 하물며 라스베이거스에 갔다면 빠져나올 수 있겠냐고. 웃음과 함께 나온 말인데, 나는 거기서 멈췄다. 솔직한 것이다. 빠져나올 수 없다. 유디슈티라도 드리타라슈트라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드라우파디는 달랐다고 하면 틀린다. 그녀도 끌려왔다. 그 자리에서 나올 수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가장 밑바닥에서 질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달랐다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했다는 것이다. 그 질문이 회당을 멈추게 했다. 왕국은 돌아오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실제 모습이다.

신영복이 감옥에서 편지를 썼을 때, 드라우파디가 회당에서 질문을 꺼냈을 때, 두 사람 모두 걸 것이 없는 자리에 있었다.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자리,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자리. 그냥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인데, 그게 닿았다. 인도에는 이것을 야즈냐라고 부르는 오랜 말이 있다. 원래는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었다. 바가바드 기타는 그 제의에서 나를 지운다. 바치는 행위만 있고, 바치는 자도 받는 자도 없다.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이것이 나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묻지 않고, 그냥 행위만 있는 그 상태. 혜선 선생이 말했다. 자본의 흐름에서 비껴 살고 싶은데, 비껴 살겠다는 마음만으로는 도저히 안 된다고. 그 흐름에서 빗겨난 어떤 활동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월요일 저녁 7시에 화면을 켜고 마하바라타 속 왕들의 실패를 함께 들여다보는 이 시간이, 어쩌면 그것이다.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나를 얼마나 바꿔놓을지 따지지 않고, 그냥 앉아서 텍스트와 마주하는 것. 정신 차리면 또 휩쓸리고, 또 돌아오고. 흐름 속에서 멈추는 연습은 그렇게 된다. 막간의 질문 하나, 차비 정도의 정신, 그걸 위해 매주 한 번씩 우리는 여기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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