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탐구 세미나] S1 / 『죽음의 부정』5주차 발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싱싱이 작성일26-02-24 19:57 조회65회 댓글0건본문
[죽음 탐구 세미나] S1 / 『죽음의 부정』 발제 8장 / 20260225조갑남
8장. 오토랑크-키르케고르 정신분석의 완결
유대교 기독교 세계관의 우산 아래서 안전하게 살아갈 때 인간은 거대한 전체의 일부였다. 이 땅이 눈물, 지독한 고통, 불평등, 괴롭고 치욕적인 일상의 하찮은 일, 질병과 죽음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그것은 신의 행위를 통해 인간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보이는 세계로 왔으며 존엄과 믿음으로 살아감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우주적 영웅주의는 그가 아무것도 아님에도 보장되었다.
기독교가 피조물 의식을 우주적 영웅주의의 바로 그 조건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 낭만적 해법 >
현대인은 우주적 영웅주의 충동을 사랑의 대상이라는 형태로 딴 사람에게 고착 시켰다. 자신의 가장 깊숙한 본성에서 필요로 하던 자기찬미를 이제는 연애 상대에게서 찾았다. 연애 상대는 그에게 거룩한 이상이 되며 그는 그 속에서 삶을 성취한다. 현대인이 연애 상대에게 의존하는 것은 영적 이데올로기를 잃은 결과다.
현대인은 한때 신에게서 실현한 자기확장 충동을 이제는 사랑의 대상에게 실현한다. 몸이 상대방에게 몸으로서 온전히 받아들여지자 우리의 자의식은 사라진다. 그리하여 정화되고 정당화 된다. 몸이 자녀 생산이라는 자연적 쓰임새를 발견하면 죄책감은 더더욱 씻겨 나간다. 하지만 섹스는 몸의 것이며 몸은 죽음의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딴 사람에게 신과 같은 ’모든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떤 인간관계도 신성의 짐을 감당할 수는 없다. 신이 완벽한 영적대상인 이유는 헤겔이 간파했듯 추상적 존재이기 때문이다.신은 구체적 개별자가 아니기에 개인적 의지와 욕구에 따라 우리의 발전을 제한하지 않는다. 신의 위대함과 힘 속에 머물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결코 방해 받지 않고서 스스로에게 자양분을 공급할 수 있다.
연애상대를 통해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연애 상대를 신의 위치에 올리면서 우리가 바라는 것은 구원이다. 우리는 자신의 창조가 헛되지 않았음을 인정받고 싶어하고 공허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사랑을 통해 ’당신을 선하게 만들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인간 상대방이 그렇게 해줄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그는 완벽한 힘, 완벽한 보증, 확고한 영웅주의가 없다. 그 이유는 그 또한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어떻게 오는가?
구원은 오로지 개인의 바깥에서, 너머에서, 사물의 궁극적 원천인 창조의 완벽함에 대한 우리의 개념화에서 온다. 랑크가 간파했듯 구원은 우리가 자신의 개별성을 내려놓고 포기하고 자신의 피조물성과 무력함을 받아들일 때 찾아온다.
사람은 어떤 종류의 너머에서 확장되려고 하는가?
사람들은 ’너머‘를 필요로 하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에 맨 먼저 손을 내민다. 그러면 자신에게 필요한 성취를 얻을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제약되고 노예가 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안전을 기한다. 부모,우두머리, 지도자 같은 일반적 전이 대상이라는 ’너머‘를 선택하며 영웅주의의 문화적 정의를 받아 들여 ’좋은 공급자‘나 건실한 시민이 되려 노력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
< 창조적 해법 >
창조의 가장 두려운 짐은 고립되는 것이며 이것은 개별화 과정에서 일어난다. 그는 자신을 무리 밖으로 분리한다. 그러면 완전히 으스러지고 소멸되는 듯한 감각에 노출되는데, 이는 그가 너무 도드라져 너무 많은 것을 자신 속에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위험이 다가오는 것은 사람이 영웅적 자기 창조의 틀을 의식적으로, 또한 비판적으 만들어 내기 시작할 때다.
예술가는 자신의 고유한 재능을 발휘하여 불멸을 얻는 법을 알고 싶어 한다.그의 창조적 작업은 자신의 영웅주의를 표현하는 동시에 정당화한다. 랑크 말마따나 ’사적 종교‘인 것이다.창조적 작업의 고유함은 그에게 개인적 불멸을 선사한다. 이것은 그 자신의 ’너머‘이지 남들의 ’너머‘가 아니다.
그는 무엇을 하든 자신에게 얽매여 있으며 자신의 바깥과 너머로 확실하게 나아갈 수 없다. 예술작품 자체에도 얽매여 있다. 아무리 위대하더라도 자연의 초월적 장엄함 앞에서는 빛이 바래며 따라서 불멸의 상징이 되지 못한다.
창조적 예술가가 인간적 갈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예술가의 선물은 언제나 창조자체, 삶의 궁극적 의미, 신에 대한 것이다. 랑크가 키르케고르와 똑 같은 결론으로 인간적 갈등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한 포기, 즉 지고한 힘에 바치는 선물로서 자신의 삶을 내어 주는 것이라는 것에 이른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세상과 자신을 포기하고 그 의미를 창조의 힘에 두는 것은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가장 힘든 일이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사람들은 신에게 복종하는 것이 피학적이며 자신을 비우는 것이 모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랑크는 오히려 이것이 자아의 가장 큰 확장이며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이상이라고 답한다.
랑크는 가장 높고 덜 절편화된 차원에서 자연의 거대함에 굴복함으로써만 인간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삶을 진정 영웅적으로 승인하는 것은 성 너머에 , 타인 너머에 , 사적 종교 너머에 있다. 인간이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바로 ”인격 안에 참된 내적 가치“가 없을 때요 자신이 옆에 있는 무언가의 반사에 불과하며 영구적인 내적 자이로스코프가 없어 중심을 잡지 못할 때다. 중심을 잡으려면 인간은 ’당신‘ 너머, 타인과 이 세상 사물이 주는 위안 너머를 바라보아야 한다.
랑크는 인간이 ’신학적 존재‘이지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것이 신학자가 아닌 정신분석가의 일생에 걸친 결론이라는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