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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특강] 5주 후기 더듬더듬 걷는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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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6-02-28 06:31 조회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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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에게 선생님이라 쓴 날

1907년, 간디는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에서 인종차별에 맞선 저항운동을 이끄는 중이었다. 그에게 인도에 있는 형으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내용은 단순했다. 가족에 대한 경제적 의무를 다하라는 것, 매달 100루피를 보내라는 것. 간디를 어린 시절부터 보살피고 영국 유학을 가능하게 해준, 후견인이나 다름없는 형이었다.

간디는 답장을 썼다. 그런데 편지의 첫머리가 예상치 못한 말로 시작됐다. "선생님께."

형이 아니라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문장들은 더 예상 밖이었다. 간디는 형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을 조목조목 적었다. 말과 마차를 구입한 것, 파티를 연 것, 부도덕해 보이는 일들에 돈을 쏟은 것. 그러면서 자신이 돈을 보낼 수 없는 이유를 밝혔다. "저는 제가 버는 것의 주인이 아닙니다. 저는 제 모든 것을 민중에게 바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선생님을 제 엄마로 존경합니다. 그러나 저는 진리를 더 조심합니다."

형의 반응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충격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형의 건강은 이후 급격히 나빠졌고, 간디가 인도로 귀국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 죽음이 이 편지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치스러운 생활이 건강을 갉아먹었다는 사실, 그리고 동생으로부터 그 사실을 정면으로 통보받은 충격이 겹쳤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간디는 왜 그 편지를 썼을까. 더 정확하게는,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은, 낯선 적에게 맞서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우리는 대부분 가족에게 진실을 삼킨다. 관계가 끊어질까 봐, 상처를 줄까 봐, 혹은 그냥 귀찮아서. 그런데 간디는 썼다. 그리고 그 편지는, 그가 평생 추구한 사티아그라의 논리와 같은 구조 위에 서 있었다.


1 사티아그라 — 적을 굴복시키지 않는 싸움

사티아그라(Satyagraha)는 사티아(Satya, 진리)와 아그라(Agraha, 파지·움켜쥠)를 합성한 말이다. 간디가 직접 만든 이름이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이 '사다그라'라고 제안했는데, 간디는 그 발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힘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힘. 이 단어가 핵심이다.

그 이전까지 비폭력 저항운동은 '수동적 저항(passive resistance)'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톨스토이도, 소로우도 그 표현을 사용했다. 그런데 간디는 이 명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동적이라는 말은 약자의 무기처럼 들렸고,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저항의 본질과 달랐다. 그에게 저항은 소극적인 버팀이 아니라 잠재력의 능동적 표현이었다. "트란스발의 인도인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인류를 흔들어 놓을 것이다." 이것이 그가 품었던 확신이었다.

사티아의 뜻을 이해해야 이 확신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있다. 사티아는 단순히 '진실말하기'가 아니다. 힌두 철학에서 사티아는 '존재 그 자체'를 뜻한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내는 환상(마야)의 반대편에 있는 것. 간디에게 신은 바로 이 진리였다. 야훼가 모세에게 자신을 "나는 있는 자다(I am who I am)"라고 밝혔을 때처럼, 존재 자체가 곧 신이었다. 그 존재는 생명을 낳고 기르고 순환시키는 힘을 포함했고, 사티아그라의 '아그라'는 그 힘을 움켜쥔다는 뜻이다. 사티아(진리·존재)를 파지(아그라)하는 순간 솟구쳐 나오는 힘. 이것이 간디가 말한 저항의 원천이었다.

그러니 사티아그라는 적을 굴복시키는 운동이 아니었다. 간디의 말을 빌리면, 목적은 "영국인을 분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무지와 오류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적에게 고통을 주는 대신 자신이 고통을 감당함으로써 진실을 증명하고, 그 증명이 상대의 내면에 작용하게 한다. 폭력이 아니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단 한 명의 동료도 없이 시작한 남아프리카 운동이 1만 3천 명의 저항으로 확장됐고, 그중 많은 이가 쓰러졌지만 "국가의 명예는 구해졌다"고 그는 썼다. 그런데 이 운동을 더 독창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 성과가 아니라 간디가 그것을 어디서 실천했느냐에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보통 수도원으로 가거나 히말라야 동굴로 간다. 세상을 등지고 내면으로 향한다. 그런데 간디는 대중 투쟁의 한가운데서 진리를 구현하겠다고 했다. 군중의 분노 속에서, 제국의 총칼 앞에서, 아군의 배신과 압박 속에서. 종교적 원리가 이렇게 정치 투쟁에 직접 적용된 사례는, 인류사에서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원리는 인도 본토에서 곧 한계에 부딪혔다. 1919년, 간디는 롤렛법에 맞서 전국적인 불매운동을 조직했다. 상점이 문을 닫고, 공장이 멈추고, 선박의 하역이 중지됐다. 그런데 운동이 확산되면서 대도시에서 방화가 시작됐고, 전선이 끊겼고, 영국인에 대한 폭행이 이어졌다.

간디는 즉시 운동을 멈췄다.

"이건 실수였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인도 민중이 폭력으로 치닫는 경향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운동 내부에서 반발을 불러왔다. 지금 잘 돼가고 있는데 왜 멈추라고 하느냐. 위협도 있었다. 그러나 간디는 개의치 않았다.

이 장면이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가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다. 간디는 "독재자들의 무오류성을 동경하지 않았다"고 훗날 기록됐다. 자신의 실수는 과장하고 이웃의 실수는 최소화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사티아그라의 논리적 귀결이다. 진리가 목표라면, 자신의 오류를 숨기는 것은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일이다. 설령 그 오류를 인정하는 것이 운동에 타격을 준다 해도.

암리차르 학살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영국군이 출구 없는 광장에서 군중을 향해 1650발을 발사했고, 379명이 죽었다. 그러나 간디는 내란 대신 비협조 운동을 택했다. 폭력으로 폭력에 맞서는 것이 사티아그라의 원리에 반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분노한 군중을 잠재우는 역할을 자임했다. 아군에게 가장 불편한 사람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간디가 운동을 멈출 때마다, 그는 그 시간을 책으로 채웠다. 감옥에서는 바가바드기타를, 코란을, 성경을 읽었다. 러스킨과 소크라테스와 톨스토이를 읽었다. 폭동이 일어난 이유 중 하나로 그는 이것을 꼽았다. 운동이 멈춘 시간을 채울 내면의 자원이 없는 사람들이 폭력으로 흘러갔다는 것이다. 빈 시간에 홀로 자기를 채울 수 있는 길이 없을 때, 그 공백은 폭력 아니면 방탕으로 메워진다. 이 관찰은 외부의 적보다 내면의 공백이 더 먼저 채워져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싸움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간디 자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2 브라마차리아 — 더듬더듬 걷는 실험

간디의 삶에서 가장 많은 오해와 논란을 불러온 것은 이른바 '브라마차리아 실험'이다. 그는 37세에 아내에게 더 이상 성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말년에는 여제자들과 같은 침대를 쓰는 실험을 했다. 그 실험이 공론화되면서 동료들이 사직서를 냈고, 공개 토론이 벌어졌고, 루머가 퍼졌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브라마차리아가 무엇인지를 봐야 한다. 흔히 금욕 혹은 독신으로 번역되지만, 간디에게 그 의미는 달랐다. "브라마차리아는 무한과 접촉하고 그의 존재에게로 다가가는 생각이자 실천이다." 즉, 성욕을 억제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목표였다. 성욕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은 다른 종류의 폭력과 탐욕에서도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세상의 폭력의 뿌리에는 욕망이 있고, 그것을 극복한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비폭력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67세에 그는 고백했다. "몇 달 전 뭄바이에서 말할 수 없이 참담한 경험을 했다. 잠이 들었는데도 갑자기 여자가 보고 싶었다. 거의 40년 동안 본능을 초월하려고 노력해 온 사람으로서 이런 끔찍한 경험을 했을 때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77세, 죽기 1년 전에는 사촌의 손녀 마누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는 모습이 동료에게 목격됐다. 동료들이 이의를 제기했고, 두 명은 사직서를 냈다.

간디의 대응은 예상 밖이었다. 그는 숨기지 않았다. 공개 토론을 요청했고,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이라도 떠나도 좋다. 자네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자유롭게 공표해도 좋다." 자신을 비판하는 내용을 직접 공표하라고 권유한 것이다.

그는 이 실험을 피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욕을 억제하거나 자리를 피하는 것은 그것을 극복한 게 아니라 그것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봤다. "신하고 합의를 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공론의 장에 올린 것은, 자신이 신 앞에서 숨길 것이 없어야 한다는 원칙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러나 이 실험이 문제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같은 침대에 누웠던 여성들 중 일부는 훗날 피해 의식을 가졌다. 진리 탐구의 동등한 주체가 아니라 이용당한 대상으로 자신을 느끼게 된 것이다. 동의를 했더라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이것은 간디를 비난하기 위한 관찰이 아니라, 이 실험이 안고 있던 구조적 한계를 보여주는 사실이다. 지도자를 향한 감정적 의존, 비대칭적인 관계의 권력, 진리라는 이름 아래서도 작동하는 신체의 생리. 간디 자신도 이 한계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의 고백들은 보여준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그가 이 한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류 문명사 이후 처음으로 시도하는 것이니 미지의 땅이었다"고 그는 남아프리카 시절을 회고했다. 그래서 더듬더듬 걸었다고. 브라마차리아 실험도 그 더듬더듬 걷기의 연장이었다. 완성된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향해 실패하면서 전진하는 과정.

간디를 소비하는 방식은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그를 성인으로 추앙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결함을 들어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 방식은 사실 같은 전제 위에 서 있다. 간디가 완성된 인간이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인이라면 흠이 없어야 하고, 흠이 있다면 성인이 아니라는 논리.

그러나 간디는 처음부터 완성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의 자서전 제목은 '진리 실험'이었다. 실험이란 결과를 알 수 없는 과정이다. 그것은 실패를 포함한다. 67세에 잠결에 욕망이 솟구쳤다는 고백, 폭동이 나자 운동을 멈추고 실수를 인정한 것, 형에게 쓴 편지에서 불편한 진실을 적은 것, 이것들은 모두 같은 구조다. 완성된 결론이 아니라 매 순간 진리를 향해 다가서는 태도.

여기서 사티아그라의 진짜 의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운동 방법론이기 전에 삶의 방법론이다. 형에게 쓴 편지에서 그것은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불편한 진실을 말할 때 상처를 받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다. 관계가 끊어질 위험, 가족에게 냉정하다는 비난, 그 모든 부담을 자신이 지는 것. 간디가 그 편지를 "선생님께"로 시작한 것은, 형에게 거리를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관계를 진실 위에 다시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간디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그가 옳았는가"가 아니다. 그것은 결국 완성을 기준으로 그를 판단하는 방식이다. 오히려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나는 진실을 말할 때 그 비용을 스스로 치를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거창하지 않다. 간디의 실험은 히말라야 동굴이나 사원 깊숙한 곳이 아니라 평범하고 불편한 일상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이 이 사람을 유일하게 만드는 것이고, 동시에 그의 삶이 우리에게 아직 할 말이 있는 이유다.

더듬더듬이라도 좋다. 방향이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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