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철학의 질문들] 1주 아수라의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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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6-03-11 22:41 조회33회 댓글0건본문
I 숲이 불탄 자리에 궁전이 선다
마하바라타 세 번째 권은 불길로 시작한다. 칸다바 숲이 타오른다. 불의 신 아그니가 소화불량을 해소하려 숲 전체를 삼키고, 인드라는 아들 아르주나를 구하려 빗물을 퍼붓지만 아르주나의 화살이 하늘을 가로막는다. 숲은 재가 된다. 그 파멸 직후에 마하바라타가 꺼내드는 것은 폐허의 슬픔이 아니라 새로운 건축이다. 재 위에서 판다바 형제들은 궁전을 세우기로 한다.
그 건축을 맡은 자가 마야 다나바다. 아수라, 곧 마신(魔神)의 족속이지만 신들의 세계에도 필적하는 건축가다. 불길에서 목숨을 건진 마야는 은혜를 갚겠다고 나서고, 크리슈나의 허락 아래 유디슈티라 형제들을 위한 회당을 짓는다. 브라흐마가 창조 이래 쌓아온 공정도, 천상의 수다르마 회당도 능가하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카라산 기슭에서 채취한 수정과 보석, 천상의 철퇴, 신성한 자리에서 가져온 재료들. 완공까지 14달이 걸렸고, 8천 명의 락샤사가 그 공간을 호위했다. 인도의 우주론에서 14는 완전한 우주 질서를 뜻하는 숫자다. 마야는 인간의 왕을 위해 우주의 집을 지으려 했다.
그런데 완공 직후 회당은 이상하게 작동한다. 왕들이 연못을 땅으로 착각하여 발을 헛디디고, 땅인데도 물인 줄 알고 옷자락을 추켜올린다. 바닥이 어딘지, 발이 닿는 곳이 어딘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야(Maya)는 인도철학에서 환상 혹은 허상을 뜻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마야 다나바가 지은 공간이 처음부터 실재와 환상의 경계 위에 설계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름에서부터 예비된 이야기다. 아수라의 건축가가 지은 회당에서, 인간은 발 디딜 곳을 잃었다.
숲이 불타는 것은 자연의 원리다. 너무 번성하면 소멸이 뒤따르고, 그 재 위에서 새로운 것이 자란다는 이치를 마하바라타는 반복해서 보여준다. 아그니의 소화불량은 자연이 스스로를 조율하는 방식이었고, 판다바 형제들이 그 재 위에 왕국을 세운 것은 그 흐름의 일부다. 문제는 그 위에 무엇을 세우는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채우는가다. 마야는 최선을 다해 지었다. 재료는 천상에서 왔고, 규모는 우주를 모사했으며, 완성도는 신의 공간을 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왕들은 연못과 땅을 구분하지 못했다. 건축이 완성된 자리에서 인간의 감각이 멈춘 것이다.
II 사람 없는 회당
회당이 완성된 뒤 마하바라타는 그 안에서 벌어지는 축하의 장면을 묘사한다. 노래꾼이 오고, 춤꾼이 오고, 선인들이 찾아와 유디슈티라에게 묻는다. 여인들을 잘 다독거려주고 보살펴 주었는지, 지나치게 비밀스러운 말을 누설하지 않았는지, 왕이 저지르기 쉬운 14가지 잘못을 범하지 않았는지. 위대한 왕이 갖추어야 할 조목들이 그 자리에서 조목조목 확인된다. 그런데 그 확인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다. 회당 안에서 일상을 사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축하하는 사람은 있고, 당부하는 사람은 있고, 호위하는 사람은 있지만, 그 공간을 삶의 자리로 삼고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회당은 있는데 도대체 누가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마어마한 건축물들 짓고, 올림픽 한다고 건축물 짓고, 다 비어 있죠." - 세미나 단디의 발언 중에서
이 발언이 마야의 회당을 읽으면서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미나 참여자는 코로나 이후 인테리어 열풍을 떠올렸다. 집을 고치고 꾸미는 데 공을 들이는 동안, 그 안에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대화가 사라지던 시절. 공간은 완성되었는데 그 안의 생활은 오히려 얇아졌다. 올림픽이 끝난 경기장들, 행사용으로 지어진 건축물들, 완공 이후 잡초만 우거지는 시설들. 이것들이 마야의 회당과 같은 계열에 있다. 회당의 문제는 완성도가 아니었다. 그 안에 들어와 살아야 할 사람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있을지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다.
유디슈티라는 다르마의 왕이다. 죽음의 신이자 질서의 신인 야마의 아들로, 마하바라타는 그를 정의를 몸으로 사는 존재로 반복해 묘사한다. 그 인물을 향해 신들과 현자들이 끊임없이 당부하는 것은, 다르마·아르타·까마·모크샤의 균형이 그만큼 흔들리기 쉽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도철학에서 이 네 가지는 삶의 네 방향이다. Artha 재물, K?ma 욕구, Dharma 삶의 원리, Mok?a 평화. 이 넷이 서로를 견제하며 균형을 이룰 때 삶은 방향을 갖는다. 그 균형은 회당이 유지해주지 않는다. 그 안에 사는 인간이 매 순간 유지하거나 잃는 것이다.
마야의 회당은 그 시험대로 읽힌다. 선인들의 당부가 반복될수록, 독자는 그 당부가 언젠가 소용없어지는 순간을 기다리게 된다. 실제로 회당은 무너진다. 유디슈티라는 도박에 빠지고, 그 회당 안에서 드라우파디가 모욕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며, 판다바 형제들은 13년의 유배를 떠난다. 천상의 재료로 지어진 공간이 그 안에 사는 인간의 선택 앞에서 아무 보호막이 되지 못했다. 회당은 실패하지 않았다. 회당 안에서 균형을 잃은 것은 인간이었다.
마하바라타 「회당권」은 인도의 네 가지 삶의 목표(puru??rtha)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유디슈티라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는 서사다. 다르마의 왕도 아르타의 유혹 앞에서 흔들린다는 것이 이 권의 핵심 긴장이다.
III 회당을 채우는 것
세미나 자리에서 한 참여자가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를 떠올렸다. 전교생 90명이 운동장에 모여 공을 굴리고 달리기를 했다. 특별한 시설도 프로그램도 없는 자리였는데, 사람들이 서로 어울리는 데서 기쁨이 생겼다. 그 기쁨이 어디서 왔는지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당이 주어야 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규모가 아니라, 재료가 아니라, 그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에게 반응하는 것.
대구의 한 도서관에서 독서 동아리가 열린다. 도서관 동아리실을 빌려 11명이 모인다. 반은 여성, 반은 남성이고 40대부터 60대까지 섞여 있다. 이 자리에서 사람들은 자식과의 갈등을 털어놓고, 노후 걱정을 꺼내고, 정치 얘기를 한다. 공적 공간이기 때문에 올 수 있었다고, 세미나 발제자는 말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꺼내기 어려운 말들이 거기서는 나왔다. 그 말들이 쌓이는 것이 회당을 채우는 방식이다. 마야가 14달을 들여 지은 것과는 전혀 다른 크기와 재료지만, 그 안에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회당에 가깝다.
마하바라타 「회당권」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재물의 결실은 보시하는 것이고, 학문의 결실은 선행이다. 아르타, 곧 재물은 나쁜 것이 아니다. 마하바라타가 반복해 말하듯, 물질 없이는 삶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아르타가 축적에서 멈출 때, 그것은 마야의 회당이 된다. 수정과 보석이 가득하고 락샤사 8천 명이 호위하지만, 그 안에서 발 디딜 곳을 잃은 공간. 결실이 다시 사람에게로 흘러갈 때, 비로소 그 공간 안에 삶이 들어온다.
판다바 형제들이 13년의 유배를 끝내고 돌아올 때, 회당은 이미 없다. 그들이 되찾는 것은 회당이 아니라 다르마다. 유배의 시간 동안 질문하고 실수하고 통찰하면서 스스로 만들어간 것이다. 마야는 그 과정이 시작될 무대를 지었을 뿐이다. 회당을 채우는 것은 아수라의 재주가 아니었다. 그 안에 들어온 인간이 서로에게 무엇을 했는가, 그것이 회당의 실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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