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철학의 질문들] 2주 전장으로 나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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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6-03-18 10:16 조회31회 댓글0건본문
쿠루크셰트라 전장에서 아르주나는 전쟁이 막 시작되려는 순간, 그는 크리슈나에게 전차를 몰아달라고 청한다. 두 진영 사이,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그 한가운데로. 거기서 그는 건너편 진영의 얼굴들을 본다. 스승이 있고, 형제가 있고, 숙부가 있다. 자신이 죽여야 할 바로 그 사람들이다. 아르주나는 활을 떨어뜨린다.
많은 독자가 이 장면을 나약함으로 읽는다. 전사가 싸우기 전에 무너졌다고. 그런데 박효엽의 《불온한 신화》의 바가바드 기타 강독을 따라가면서 그 이탈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르주나가 흔들린 것은 전장 한가운데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자기 진영에 머물렀다면 그 얼굴들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흔들림을 만들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이미 자기 자리에서 결론을 내린 사람이다.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판단한다. 어떤 사안을 마주할 때 생각의 출발점은 이미 내가 서 있는 곳이다. 거기에는 오랜 시간 굳어온 판단의 방향이 방점처럼 찍혀 있어서, 어떤 질문을 들이대도 같은 방향으로 귀결된다. 나는 그것을 판단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확인에 가깝다. 이미 품고 있는 결론을 바깥 세계의 사건들이 하나씩 증거로 채워주는 과정, 그것이 우리가 '생각한다'고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박효엽이 말하는 '회색 지대'는 중립이라는 안락한 자리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속한 곳에서 발을 떼는 과정이다. 결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결정이 내려지던 자리를 한 번 의심하는 움직임이다. 아르주나가 활을 떨어뜨린 것은 그 움직임의 시작이었다.
한 참석자가 말했다. 어떤 유튜브 채널에서 첫 문장부터 특정 인물을 사기꾼으로 규정하고 시작하는 발언자를 보았다고. 이후의 모든 논증은 그 규정을 향해 수렴했다. 주장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선언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역겹다고 느끼면서, 동시에 자신도 그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타인의 전제는 쉽게 보인다. 자신의 전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전제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사고의 배경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고를 구성하는 틀이지 사고의 대상이 아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가 이미 기울어진 방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 아침 같은 채널을 켜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것은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확증이다. 내가 보고 싶은 세계를 반복해서 확인하는 일이다.
전제를 건드리는 방법은 전제로 맞서는 것이 아니다. 같은 세미나에서 다윈을 읽으면서 나온 이야기가 이것을 보여준다. 진화론 논쟁에서 다윈의 방식은 창조론자의 주장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창조론자들이 딛고 있는 전제 자체를 건드렸다. 반박은 같은 지반 위에서 맞서는 것이지만, 전제를 묻는 것은 그 지반을 바꾸는 일이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하는 것도 같다. 그는 전쟁의 옳고 그름을 직접 따지지 않는다. 아르주나가 왜 흔들리는가를 묻는 것에서 시작한다. 흔들림의 기원을 묻는 것, 그것이 그의 방법이다.
그런데 전제는 단순히 인식의 문제가 아니다. 아르주나가 혈족 앞에서 흔들린 것은 그들이 옳은 편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내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연민의 기원이 도덕적 감수성이 아니라 '내 것'이라는 집착이었다면, 전제는 결국 에고가 만들어낸다는 이야기가 된다.
바가바드기타는 에고가 발생하는 순간을 특정한다. 감각이 대상을 만나는 그 순간이다. 아르주나가 건너편 진영의 얼굴을 눈으로 확인하는 그 찰나, 그 시각적 접촉 안에서 '나의 혈족'이라는 집착이 생겨났다. 보는 것, 듣는 것, 닿는 것—감각이 대상과 접촉하는 순간 나는 그것을 '나의 것'으로 당기거나 '나에게 위협이 되는 것'으로 밀어낸다. 이 당김과 밀어냄이 에고다. 에고는 판단 이전에 작동하기 때문에, 판단이 시작될 때 이미 방향은 정해져 있다.
아들이 군에 있을 때 이웃이 말했다. 전쟁이 나면 자기 아들은 밀항시키겠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반감이 일었다. 그런데 그 반감의 기원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그 사람의 윤리에 대한 판단이기 이전에 내 아들과 그의 아들을 나눈 에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 것과 그의 것이 감각 안에서 분리되는 그 순간, 비교와 비난이 따라왔다. 그 반감은 내가 선택한 판단이 아니라, 이미 작동하고 있던 에고가 만들어낸 전제였다.
그렇다면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전쟁에서 이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두려움을 버리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감각이 대상에 달라붙는 그 순간을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흔들리는 것은 괜찮다. 다만 왜 흔들리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 물음이 에고와 판단 사이에 틈을 만든다. 틈이 없으면 에고는 곧장 판단으로 흘러가지만, 틈이 생기면 거기서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틈을 만드는 것이 훈련이 필요한 이유다.
도반에게서 '3분만 말하라'는 권고를 처음 들었을 때 분노가 올라왔다고 했다. 나는 잘 듣는 사람이라고 믿어왔으니까. 그런데 일주일을 씩씩거리다가 그 말이 서서히 들어왔다. 분노가 사그라든 자리에서 비로소 다른 것이 보였다. 분노가 대상에 완전히 달라붙어 있는 동안은 그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들 수 없다. 에고와 판단 사이의 틈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의 마부이자 처남이자 신이라는 설정은 이 맥락에서 읽힌다. 그는 멀리서 가르치는 스승이 아니다. 아르주나의 전차 위에 앉아 그의 기질을 꿰뚫고 있는 자다. 고전을 통해 같은 질문을 품은 사람이 내 일상의 구체적인 장면에서 건네는 한 마디가, 어떤 보편적 가르침보다 더 정확하게 에고의 작동 지점을 짚는 것도 그래서다.
아르주나는 전장 한가운데로 나아갔기 때문에 얼굴을 보았고, 얼굴을 보았기 때문에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나약함이 아니라 전제가 균열하는 순간이었다. 자기 진영에 머물렀다면 적군은 끝내 얼굴 없는 존재로 남았을 것이다. 얼굴 없는 대상에게 에고는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으면 판단은 빠르고 행동은 깔끔하다. 그러나 그것은 판단이 아니라 처음부터 전제였다.
바가바드기타는 에고를 없애라고 말하지 않는다. 에고가 작동하는 그 순간을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아르주나가 활을 떨어뜨린 것은 에고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에고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앎이 전제와 판단 사이에 틈을 만들고, 그 틈에서 크리슈나의 목소리가 들어온다.
쿠루크셰트라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가 3천 년을 건너 지금 이 자리까지 오는 것은, 그 틈을 만드는 일이 여전히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진영에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언제나 더 쉽고, 전장 한가운데로 나아가 얼굴을 보는 것은 언제나 흔들림을 동반한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는 자리에서는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는다. 아르주나가 활을 떨어뜨린 자리가 곧 배움이 시작되는 자리였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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