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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철학의 질문들] 시즌3-7 불타는 숲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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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6-01-21 21:24 조회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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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다와 숲이 불타오른다. 불의 신 아그니가 요구한 대로, 크리슈나와 아르주나가 함께 나서서 숲 전체를 화염으로 뒤덮는다. 나무들이 타들어가고 생명들이 소멸하며 천신 인드라가 빗물로 불을 끄려 하지만 아르주나의 화살이 비구름을 흩어버린다. 이 장면을 읽으며 우리는 묘한 불편함을 느낀다. 숲을 태우는 행위가 과연 정당한가, 이것은 폭력이 아닌가, 다르마는 어떻게 이런 파괴를 허용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그런데 정작 마하바라타는 이 사건을 정당한 행위로 제시한다.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칸다와 숲은 불탈 운명이었다"고 선언하며 인드라를 설득하고, 모든 신들이 그 말을 받아들여 물러간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욕망과 조건

"나는 음식을 먹지 않소. 내가 불이라는 것을 알아주시오. 칸다와 숲을 태우겠소. 이 숲이 바로 내가 택한 음식이오." 아그니는 자신의 배고픔을 이렇게 표현한다. 표면적으로는 음식을 요구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아그니가 원하는 것은 먹는 행위가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갈구하는 것은 자신의 본래 능력, 즉 불의 신으로서 숲을 태울 수 있는 그 능력의 회복이다. 아그니가 느끼는 허기는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는 공허함이다.

여기서 욕망의 의미가 달라진다. 인도 철학에서 욕망은 까마라고 불리며,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은 아르타라고 불린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욕망을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수단을 그것을 얻는 방법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아그니의 욕망은 소유가 아니라 회복이다. 불의 신이 불을 태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언가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닌 상태다. 따라서 아그니에게 아르타는 물질을 얻는 방법이 아니라 자신을 되찾는 과정 그 자체가 된다. 숲을 태우는 행위는 배고픔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의 신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완성하는 행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그니의 요구는 탐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려는 시도다. 문제는 그 과정이 필연적으로 파괴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불의 신이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태운다는 것을 의미하며, 태움은 소멸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이 파괴는 어떻게 정당성을 얻는가. 아그니 혼자서는 칸다와 숲을 태울 수 없다. 천신 인드라가 비를 내려 불을 끄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그니는 크리슈나와 아르주나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 둘의 관계를 우리는 우정이라고 부르지만, 여기서의 우정은 친밀함이나 호감의 문제가 아니다. 크리슈나는 지혜를 가진 존재이고, 아르주나는 용기를 지닌 전사다. 이 둘은 서로가 없으면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크리슈나의 지혜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고, 아르주나의 용기만으로는 그 행위가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 이들의 우정은 서로를 통해서만 완성되는 관계,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의 공존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우정이 때로 파괴적 행동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정이라고 하면 우리는 상생과 조화를 떠올리지만, 크리슈나와 아르주나의 우정은 칸다와 숲을 태우는 파괴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 파괴가 적대적 행위가 아니라 완전한 믿음 위에서 함께 수행되는 행위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이 함께 나서서 칸다와 숲을 태우는 과정에는 분명한 조건들이 있다. 첫째, 약조를 통한 구제다. 아그니는 미리 여섯 존재와 약속을 맺어 그들을 불에서 구한다. 나가 타크샤카와 그의 친구, 아스라푸트라, 마야, 그리고 네 마리의 새가 살아남는다. 약조라는 사전 합의가 있었고 그 약속이 지켜졌다는 것은 파괴가 무분별한 소멸이 아니라 분별 있는 변환임을 보여준다. 둘째, 수단에 제한이 있다. 아르주나는 화살로 비구름을 흩어버리지만 그것은 숲을 태우기 위한 최소한의 개입이다. 셋째, 그 결과가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변환이다. 숲이 타고 난 뒤 하늘이 드러나고 새로운 질서가 열린다.

운명과 시선

숲이 거의 다 타갈 무렵, 인드라는 여전히 비를 내리며 저항한다. 하지만 아르주나의 화살이 모든 빗방울을 막아내고, 결국 인드라는 패배를 직감한다. 바로 그때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들린다. "너 혼자의 힘으로는 크리슈나와 아르주나를 이길 수 없다. 네 친구 뱀도 다른 곳에 가 있다. 그리고 칸다와 숲은 불탈 운명이었다." 이 목소리를 듣고 인드라는 모든 신들과 함께 칸다와 숲을 떠난다. 아무런 저항 없이, 아무런 고통도 남기지 않고 물러난다.

왜 갑자기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개입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불탈 운명이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숲은 불탈 운명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우주적 질서를 가리킨다면, 이를 다르마의 정당성으로 받아들일 때 폭력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닐까. 운명이라는 말은 모든 파괴 행위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숲이 불탄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대하는 존재들의 태도를 봐야 한다. 인드라는 왜 저항했는가. 인드라의 저항은 칸다와 숲을 지키려는 선한 의도 때문이 아니었다. 인드라는 자신의 권능이 도전받는 것을 참지 못했다. 천신으로서의 자신의 위치, 자신의 능력이 무력화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면 아그니는 자신의 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숲을 태우고자 했고, 크리슈나와 아르주나는 약조, 제한, 변환이라는 조건들을 충족시키면서 그 행위를 수행했다.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개입한 것은 인드라에게 자신의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말하기 위함이다. 네가 지키려는 것은 숲이 아니라 네 자신의 권능일 뿐이라고, 그러니 물러나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탈 운명이었다"는 말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운명론적 정당화의 위험을 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집착하는 존재에게 손을 놓으라고 권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불탈 운명이었다"는 말이 던지는 불편한 질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문제는 우리가 이 신화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쟁 자체가 폭력적인가 아니면 그 전쟁에 임하는 인간의 마음이 폭력적인가.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 영화들이 보여주는 패턴이다. 아바타를 보면 마지막에 가족주의로 돌아간다. 어벤져스도 마찬가지로 결국 가족으로 환원된다. 이것이야말로 신들의 싸움을 인간의 이야기로 끌어내리는 일이다. 아그니가 숲을 태우는 것을 환경 파괴로, 인드라가 비를 내리는 것을 생명 보호로 해석하면서, 우리는 신화를 인간의 이야기로 환원시킨다. 하지만 신화는 각 존재가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불의 신은 태우고, 비의 신은 내리며, 그 과정에서 세계는 변화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하는가, 그 행위가 어떤 조건 위에서 이루어지는가다.

오히려 폭력적인 것은 이 변화를 인간의 도덕률로 재단하려는 우리의 시도 자체인지도 모른다. 자꾸 우주적 질서를 인간화시키려는 것, 신이라는 존재를 인간의 감정과 도덕으로 해석하려는 순간, 우리는 그 자체를 보지 못하게 된다. 마하바라타가 제시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률이 아니라 다르마이며, 그것은 선악의 경계를 넘어선 곳에 있다.

칸다와 숲이 불탔다. 아그니의 허기는 탐욕이 아니라 불의 신으로서의 능력을 회복하려는 갈망이었고, 크리슈나와 아르주나의 우정은 파괴를 함께 수행하는 상보적 관계였으며, 보이지 않는 목소리는 인드라에게 권능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권유했다. 약조를 통해 여섯 존재를 구하고, 수단을 최소한으로 제한하며, 결과를 변환으로 이끈다는 조건들이 충족되었을 때, 파괴는 새로운 질서를 여는 통로가 되었다.

우리가 이 장면 앞에서 느낀 불편함은 사건 자체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숲이 타는 것을 파괴로, 생명이 소멸하는 것을 폭력으로 먼저 규정하고, 그 행위의 정당성을 따지려 했던 우리의 시선에서 왔다. 하지만 마하바라타는 다르게 묻는다. 사건이 아니라 마음을 보라고, 행위가 아니라 욕망을 들여다보라고, 결과가 아니라 조건을 따지라고 말한다. 아그니는 왜 숲을 태워야 했는가. 인드라는 왜 그것을 막으려 했는가. 보이지 않는 목소리는 왜 개입했는가. 이 물음들 속에서 우리는 각 존재의 욕망과 집착을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쟁 자체가 아니라 전쟁에 임하는 마음을, 누군가 죽었을 때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집착을, 변화가 일어났을 때 변화 자체가 아니라 변화를 거부하는 욕망을 보아야 한다. 폭력은 사건에 있지 않다. 마음에 있다. 정당성은 고정된 기준이 아니다. 약조, 제한, 변환이라는 조건들을 끊임없이 따지는 과정 속에서만 열린다. 이것이 다르마가 작동하는 방식이며, 마하바라타가 불타는 숲 앞에 선 우리에게 건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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