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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특강] 1주 죽음 앞에서 쾌활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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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6-01-30 10:16 조회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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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월, 단식 나흘째였다. 물도 거부한 79세 노인이 "오늘 전에 없이 기분이 좋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그 자리에 있었던 영국 편집장은 그 모습을 이렇게 전했다. "간디는 마술사였다. 단식을 끝내자 평소의 즐거운 모습으로 되돌아와 힘차게 일을 계속하고 인터뷰를 했다." 죽음 직전에 왜 이토록 밝은가, 이것은 연기인가 광기인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삶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서 고미숙 샘의 간디 강의는 시작되었다.

고미숙 샘은 말했다. "간디의 생애를 관통하는 하나의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일관성이다. 48년 전 전장에서도, 77세에 가시밭길을 걸을 때도, 그는 똑같이 밝았다. 외부 조건이 달라졌어도, 나이가 들어도, 상황이 절망적이어도, 그 명랑함은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간디에게서 배워야 할 본질이 아닌가.

31세, 전장의 비스킷

시간을 거슬러 1900년으로 가보자. 남아프리카 보어전쟁 전선, 31살의 간디는 야전 위생 부대를 이끌고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갔다. 그는 인도인 차별에 저항하는 운동의 지도자였지만, 전쟁이 일어나자 이런 제안을 했다. "나는 영국의 식민지다. 영국 시민으로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야전 위생 부대를 조직하겠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영국이 전쟁을 하면 그들의 국력이 소진될 것이고, 그 틈을 타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그러나 간디의 생각은 달랐다. 영국이 승리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그 안에서 힘을 키워 영국과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정부는 처음에 거절했지만, 간디와 인도인들은 자비를 들여 간호병을 훈련했고, 보어인들의 대공세로 영국군이 타격을 입자 그제서야 야전 부대 결성이 승인되었다. 인도인 300명과 계약 노동자 800명이 지원했다.

포화 속에서 그들은 부상당한 병사들을 병원으로 이송했다. 어떤 기자가 그 현장을 취재했는데, 그가 본 간디의 모습은 이랬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피곤해 할 만큼 고된 야간 작업 후 새벽같이 간디를 만났다. 그는 길가에 앉아 일반 군용 비스킷을 먹고 있었다. 부대의 모든 사람은 지쳐 절망했고 모든 것이 음산했다. 그러나 간디는 침착하면서도 쾌활했으며 확신에 차 얘기했고 눈빛은 친절했다."

전쟁터에서, 그 새벽에,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가. 비스킷이 그렇게 맛있었을까, 아니면 그의 밝음은 비스킷의 맛과는 무관한 어떤 내적 상태에서 비롯된 것일까. 기자는 그 순간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기록을 남겼고, 그 기록 속에 '쾌활'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48년 전에도 그는 그랬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이미 그때부터 그의 본질이었던 것인가.

77세, 가시밭길의 맨발

1946년 11월부터 1947년 3월까지, 77세의 간디는 노아칼리 지역의 49개 마을을 순회했다. 이 지역은 젠지스강과 브라마푸트라강이 만나는 늪의 삼각지대로, 인도에서 교통이 가장 불편한 곳이었다. 기차와 증기선과 자전거와 나무배를 타고, 마지막엔 걸어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 독립한 후 인도는 파키스탄과 분단되었고, 이슬람과 힌두교의 충돌로 어마어마한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노아칼리에서는 무슬림이 힌두교도를 습격했고, 비하르에서는 힌두교도의 폭력에 의해 희생된 무슬림이 4500명에 달했다. 간디는 비하르 학살을 멈추기 위해 단식을 했고, 광기가 가라앉자 노아칼리로 향했다.

발이 헐어 가로염증이 생겼다. 어떤 마을을 지나갈 때는 주민들이 길에 오물을 뿌리고 깨진 유리와 가시덤불을 깔아놓았다. 간디는 샌들을 벗었다. 맨발로 그 길을 걸었다. 고미숙 샘이 강조한 대목이다. "이것을 뉴스로 접한 사람들은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떠올렸다."

1946년 12월 5일, 간디는 이렇게 썼다. "지금 내 사명은 내 생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지금까지 했던 일들은 너무 쉬운 일들이야." 고미숙 샘은 이 대목에서 말했다. "스매츠와의 투쟁, 인도 독립 투쟁, 그 모든 것은 쉬운 일이었다. 지금 이것이 어렵다. 분단과 폭력, 그것도 같은 민족끼리 벌이는 유혈 사태를 멈추는 일이 가장 어렵다."

간디는 덧붙였다. "난 어떤 사고에도 준비가 되어 있다. 행하라 아니면 죽으라라는 말을 여기서 시험해 보아야 한다. 행하라는 것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평화롭게 화목하게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걸 노력하면서 죽어야 한다."

이것이 바가바드 기타의 정신이다. 행하라 아니면 죽으라. 다른 선택지는 없다. 군말이 필요 없다. 그 길을 갈 뿐이다. 그러자 대여섯 명의 이슬람교도가 그의 발 아래 흉기를 내려놓았고, 폭동을 피해 달아났던 힌두교도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동네 깡패들이 와서 간디를 끌어안고 울었다. 가장 극한의 순간에도 그의 내면은 흔들리지 않았다.

79세, 마지막 단식과 세 발의 총탄

노아칼리를 가라앉힌 후 델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1500만 명이 자기 집을 떠나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하면서 서로를 죽였다. 양쪽은 서로를 향해 칼과 곤봉을 휘둘렀다. 고미숙 샘은 말했다. "이것은 인류가 되새기고 또 되새겨야 하는 사건이다. 어떻게 종교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이런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가."

간디의 생애 마지막 단식이 시작되었다. 1948년 1월 13일, 죽기 17일 전이다. "나는 신의 손에 맡겨졌다." 이번에는 의사를 거부했고 물도 거부했다. 요구 조건은 명확했다. 파키스탄에 5천만 루피를 지불하라. 원래 분단 시 협의된 사항이었으나 유혈 사태로 시행되지 않았고, 간디는 힌두교도가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 말고는 길이 없다고.

힌두교도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암살단 청년들이 조직되었다. 그들은 말했다. "간디를 살려둬서는 안 된다. 단식하다 죽으면 안 된다. 반드시 우리의 총에 죽어야 한다." 죽음의 형식이 중요했다.

단식 나흘째, 간디는 "오늘 전에 없이 기분이 좋습니다"라고 기록했다. 간디의 숨이 거의 끊어지기 직전, 모든 정치인들이 달려와서 이슬람교도의 생명과 재산과 신앙을 보호한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간디는 눈앞에서 서명하는 것을 확인하고 오렌지 주스 250그램을 마셨다. 단식이 끝났다.

12일 후, 간디는 델리의 기도 집회장에서 세 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암살자는 간디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그가 평안하기를 빌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암살자조차 간디 앞에서는 평안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

쾌활함이라는 역설

31세 전장에서 비스킷을 먹으며 밝았던 모습, 77세에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으며 "지금까지의 일들은 너무 쉬웠다"고 말했던 모습, 79세에 단식 나흘째 "오늘 전에 없이 기분이 좋습니다"라고 말했던 모습. 고미숙 샘은 이렇게 정리했다. "간디의 처음과 마지막 사이에는 완결된 일관성이 있다. 그는 외부 상황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드러난다. 우리는 보통 밝음을 낙관주의의 산물로, 혹은 고통을 모르는 순진함의 표현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간디의 밝음은 고통을 모르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전쟁터의 참혹함을 목격했고, 가시밭길을 맨발로 걸었으며, 단식으로 죽음에 이르렀던 사람의 밝음이었다. 고통을 회피한 결과가 아니라 고통의 한가운데를 통과한 결과였다.

고미숙 샘은 말했다. "그것은 하루와 영원이 겹치는 삶의 방식에서 온다. 간디는 늘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매일을 온전히 살았다." 간디는 "나는 125세까지 살 것이다"라고 말했다. 히말라야 근처를 62회나 등산했고, 힘이 넘쳤으며, 단식이 끝나자마자 생명력을 곧바로 회복했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과 125세까지 살고 싶다는 것, 이 둘은 어떻게 양립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간디의 밝음이 단순한 감정 상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는 밝으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밝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신의 손에 맡겨졌다"고 말한 순간, 그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고, 자신의 것이 아닌 삶은 잃을 것이 없는 삶이며, 잃을 것이 없는 삶은 자유로운 삶이고, 자유로운 삶은 밝을 수밖에 없다. 밝음이란 죽음을 극복한 결과가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행하라 아니면 죽으라. 간디에게 매일은 행할 것인가 죽을 것인가의 선택이었다. 그는 매일 행하기로 선택했고, 그 선택은 동시에 죽기로 한 선택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행하는 것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고, 자기를 내어주는 것은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매일 죽었고, 매일 죽었기 때문에 매일 새로 태어났으며, 매일 새로 태어났기 때문에 밝을 수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방식과 정반대다. 우리는 보통 죽지 않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산다. 그래서 무겁다. 지켜야 할 것이 많고,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많으며, 그 두려움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고미숙 샘은 비몽사몽의 시대를 말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하지 못하며 표류하는 이 시대에, 기술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은 왜 무력해지는가. 한국의 대학 강의실에서 만난 MZ세대는 무표정했고, 연세대 한국어 학당의 외국인 유학생들도 똑같은 표정이었으며, 아시아 전역의 젊은이들이 동일한 눈빛으로 앉아 있었다. 그것은 죽지 않으려고,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간디는 "나는 너무나 결점이 많은 사람이다. 나와 하루만 함께 있으면 나의 무수한 결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겸손의 표현이 아니었다. 자기가 비어 있다는 선언이었다. 자기가 비어 있는 사람은 채워야 할 것이 없고, 채워야 할 것이 없는 사람은 무거울 이유가 없으며, 무겁지 않은 사람은 밝을 수 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간디가 매일 내려놓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옳음'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보통 옳은 일을 하기 위해 산다고 말하지만, 간디는 옳은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옳음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밝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영국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 옳은가, 힌두교도가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 옳은가.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 행할 것인가 죽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옳음을 따지는 순간 우리는 옳음에 갇히고, 옳음에 갇히면 무거워지며, 무거워지면 밝음을 잃는다. 간디는 옳음이 아니라 필요를 따랐고, 필요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며,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따르는 사람은 가벼울 수 있다.

암살자가 간디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평안을 빌면서 방아쇠를 당긴 그 순간은 무엇이었을까. 암살자는 간디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간디 앞에서는 평안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 간디는 옳은 사람이 아니라 비어 있는 사람이었고, 비어 있는 사람 앞에서는 평안을 빌 수밖에 없으며, 평안을 빌면서도 죽일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이 인간의 비극이자 역설이다.

전쟁터 새벽에 비스킷을 먹으며 웃었던 31세의 얼굴과, 49개 마을을 맨발로 걸었던 77세의 발과, 단식 나흘째에 "오늘 전에 없이 기분이 좋습니다"라고 말했던 79세의 목소리. 그 일관성은 우리에게 묻는다. 밝음은 고통을 모르는 것인가 고통을 아는 것인가. 죽음을 회피하는 것인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인가. 자기를 채우는 것인가 자기를 비우는 것인가. 간디의 삶은 대답하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내려놓았는가. 당신은 오늘 죽었는가.



간디의 마간랄(Maganlal) 앞으로 보낸 편지, 1910년 8월 21일자, CWMG, X, pp. 307~8쪽. 수년 후, 람다스 간디는 회고록에서 팜(Farm)의 일일 시간표를 재게시하며 엄격한 생활 규율을 회상했다.

    5.30: 기상

    5.30~7: 청소와 기도

    7~8: 밭일

    8~9: 아침식사

    9~11: 밭일, 부엌일, 인쇄소 일

    11~1: 목욕, 점심, 설거지 및 휴식

    1~4.30: 공부

    4.30~5.30: 밭일 및 땔감 모으기

    5.30~6.30: 스포츠와 게임(축구, 크리켓, 카바디 등)

    6.30~7: 저녁식사, 부엌 청소

    7~8: 기도 및 종교 텍스트 읽기

    8~10: 휴식

    10~5.30: 수면

    람다스 간디, 『Sanskaran』, 상카르 조시(Shankar Joshi)가 구자라트어에서 힌디어로 번역(Ahmedabad: Navajivan Press, 1970), p. 3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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