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탐구 세미나] S1 <죽음의 부정> 3주차 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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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싱싱이 작성일26-02-03 16:25 조회75회 댓글1건본문
[죽음 탐구 세미나] S1 / 『죽음의 부정』 발제 5장 / 20260204 조갑남
5장. 정신분석가 키르케고르
< 심리학과 종교의 시작으로서의 실존적 역설 >
인간이 불안을 안고 살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키르케고르는 짐승에게는 불안이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본래 동물은 정신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그러므로 짐승은 무지하지만 인간은 ”영과 육의 종합“이기에 불안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영’은 자의식‘으로 해석해야 한다. 자의식의 최종적 공포는 자신의 죽음을 아는 것이며 이는 동물계에서 인간에게만 내려진 고유한 선고다. 이것이 에덴동산 신화의 의미이자, 죽음이 인간의 최대의 불안이라는 현대 심리학의 재발견이다.
< 키르케고르의 성격학 >
키르케고르가 전반적으로 이해하는데 인간의 성격은 ”공포와 멸망과 절멸이 모든 사람과 이웃하고 있음“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구축한 구조다
인간은 자신에 대한 성격학적 거짓말에 의해 어떻게 노예신세가 되는가?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폐쇄성 침묵‘의 의미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억압과 같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폐쇄성 침묵은 아동기에 자신을 울타리로 둘러싸 자신의 힘을 실제로 검증하지도, 자신과 세상을 여유롭게 발견할 자유를 누리지도 못하는 닫힌 성격이다. .
그래서 키르케고르가 ’선‘은 새로운 가능성과 선택을 향한 열림이요 불안을 직면하는 능력이며 ’악‘은 개인을 새로운 것과 더 넓은 인식과 경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닫힘이다. 닫힘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성격의 거짓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직접성의 인간은그 자신은 시간성,세속성의 차원 안에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는 것을 배우고,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이제 그는 계속 똑같이 살아간다. 직접성의 인간은 자신의 자기를 알지 못한다.
인간은 왜 진부한 삶을 받아들일까?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속물근성‘은 하찮음이었다. 그것은 일상적 틀에 안도감을 느끼고 안주하는 인간이다. 속물근성은 진짜 적이 누구인지 안다. 자유는 위험하다. 가장 안전한 방법은 사회적으로 가능한 것의 발자취를 밟는 것이다.
< 정신증 이론가로서의 키르케고르 >
키르케고르는 정신증이란 극단으로 밀어 붙여진 신경증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조현병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징적 자아가 유한한 몸의 한계를 부정하려는 시도다. 그럼으로써 인격 전체가 균형을 잃고 부서진다.
우울증은 타자(가족,직업,그리고 일상적 의무의 좁은 지평)의 요구에 파묻히는 것이다. 우울증 환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두려움 너머를 보지 못하며 자신이 왜 이꼴이 되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의 중심에 홀로 서지 못하고 삶을 직면하는 데 필요한 힘을 내면에서 끌어내지 못하는 겁쟁이다.
< 정상적 신경증 >
속물근성은 우리가 ’정상적 신경증‘이라고 부를 법한 것이다. 대다수 사람은 주어진 사회적 규칙 집합의 가능성 안에서 안전하게 사는 법을 알아낸다. 속물근성은 ”진부하고 뻔한 것으로 기운을 얻음“으로써 작동한다.
<자유에 대한 또다른 충동들>
’직접성‘을 매우 경멸하는 유형의 사람이 있다. 그는 내면을 닦고 더 깊고 내적인 것을 자부심의 토대로 삼고 자신과 평균적 인간 사이에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키르케고르는 이런 유형을 ’내향인‘이라고 부른다.
이런 유형의 인간은 개별성과 고유함을 가진 인격체가 되는 것에 좀더 관심을 쏟는다.
하지만 이것은 도를 넘지 않으며 철저하지도 않다. 어쨌든 그는 기본적으로 약하며 타협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 인간다움의 의미 >
건강한 사람, 참된 개인, 자기실현을 한 사람, 진짜 인간은 자신을 초월한 사람이다.
키르케고르는 우리가 처한 조건의 진실을 깨달으면 스스로를 초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처한 조건의 진실은 우리의 완전하고도 비참한 피조물성이다. 인간에게 교육은 자신이 타고난 무능력과 죽음을 직면하는 것이다. 애초에 자기 초월을 위해서는 자아를 파괴하여 무로 끌어내려야 한다. 그러면 자아는 자신을 자기 너머의 힘과 연결 지을 수 있다. 에고는 자신의 유한성 속에서 몸부림치고 ’죽어‘야 한다. 그래야 그 유한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유한성 너머를 볼 수 있다.
유한성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키르케고르는 유한성 너머에는 무한, 절대적 초월, 유한한 피조물을 만든 창조의 궁극적 힘이 있다고 답한다.
어떤 사람이 궁극적 힘, 무한과 자신의 관계를 살펴보고 자기 주변의 것들에서 궁극적 힘으로서의 연결고리를 고치기 시작하면 그는 한없는 가능성의 지평, 진짜 자유의 지평을 열게 된다. 이것이 키르케고르의 메시지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피조물이지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신의 맞은편에 존재한다. 가능성이 우리를 이끄는 곳은 다름 아닌 믿음이다.
모든 피조물의 심장에 있는 이 보이지 않는 신비는 창조의 심장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신비와의 연결을 확인함으로써 이제 우주적 의미를 얻는다. 이것이 믿음의 의미이다. 그에게 필요한 새로운 뒷받침을 해주는 것은 ”불안 없이 불안을 버릴 수 있는 용기“이며 이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키르케고르는 말한다.
댓글목록
라다크님의 댓글
라다크 작성일"자기 초월을 위해서는 자아를 파괴하여 무로 끌어내려야 한다. 그러면 자아는 자신을 자기 너머의 힘과 연결 지을 수 있다." 키르케고르가 '무아'를 말하는군요. 불교의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