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 특강] 3주 후기; 간극 없음
페이지 정보
작성자 Dandi 작성일26-02-15 15:08 조회34회 댓글0건본문
1948년 1월 30일 간디가 총 세 발에 맞아 암살당했을 때, 손녀들이 그의 머리를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고 다른 여자들은 말없이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들을 낭송했다. 막 총에 맞아 죽어가는데 흐느끼지도 소리 내어 울지도 않고 경전을 낭송한 것이다. "태어나는 자의 죽음도 확실하고 죽은 자의 태어남도 확실하다. 따라서 그대는 피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말라." "사람이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이 몸을 입었던 자도 낡은 몸을 벗고 새 몸으로 옮겨간다."
간디는 이 경전을 매일 읽고 암송했다. 의심에 사로잡히거나 실망하거나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면 펼쳐서 "한없는 슬픔 속에 있다가도 즉시 웃게 된다"고 했는데, 추상적 위로가 아니라 몸의 반응으로 답한 것이다. 간디가 죽을 때도 바가바드 기타가 있었고, 손녀들과 여자들이 낭송했으며, 경전이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사전처럼 함께 있었다.
힌두교의 윤회론에서 몸은 옷이고 아트만은 영원하기 때문에 간디도 다음 날 바로 화장해서 겐지스 강에 재를 뿌렸다. 바가바드 기타는 "지혜로운 자들은 산 자를 위해서나 죽은 자를 위해서나 애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가바드 기타를 삶과 일치시킨 사람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우리에게 매일 읽는 책, 의심이 들 때 펼치는 구절, 죽을 때까지 암송하는 문장이 있는가. 대부분은 많이 읽고 밑줄 긋고 감동받지만 책은 책이고 삶은 삶으로 분리되어 있다. 간디에게 바가바드 기타는 사전이었고 행위의 모든 순간마다 참고했다. 경전을 읽고 웃었고, 경전을 읽고 보험을 해지했고, 경전을 암송하며 죽었다. 책과 삶이 일치했다.
간디는 바가바드 기타를 읽고 웃었다. 슬픔이 사라져서가 아니다. 슬픔과 웃음이 동시에 있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슬픔=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슬픔을 느끼는 나와 그 슬픔을 보는 나가 있다. 우리는 슬픔에 빠진다. 슬픔=나. 그래서 슬픔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 웃을 수 있다. 간디는 슬픔을 봤다. 슬픔≠나. 나는 슬픔을 보는 자다. 그래서 슬픔 속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
폭행당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은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았다는 걸 생생하게 기억한다."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비난하지 않았다. 비난하고 싶은 마음≠나. 나는 그 마음을 보는 자다. 우리는 폭행당하면 비난=나가 된다. 화가 곧 나다. 그래서 화를 내고 나서 왜 화를 냈는지 모른다. 정신줄을 놓았기 때문이다. 화=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간디는 달랐다. 폭행당하는 순간에도 정신줄을 놓지 않았다.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봤다. 나≠비난. 나=그것을 보는 자.
마리츠버그 기차역에서 쫓겨났을 때 "밤새 떨며" 생각했다. 떨었다는 것은 분노와 수치심이 있었다는 뜻이다. 감정이 사라진 게 아니다. 그런데 감정에 빠지지 않고 생각했다. 감정≠나. 나=생각하는 자. 우리는 쫓겨나면 분노=나가 된다. 그래서 분노→폭력으로 바로 간다. 감정→행위. 간디는 감정→사유→행위였다. 이 사유가 간극을 만든 것이 아니라, "나"의 위치가 달랐던 것이다. 나=감정이 아니라 나=감정을 보는 자.
경전을 읽고 보험을 해지한 것도, 러스킨의 책을 읽고 내리자마자 공동체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도 같은 원리다. 우리는 감동받으면 감동=나가 된다. 그래서 감동이 식으면 나도 식는다. "나중에 해야지"라고 말하는 순간 감동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감동≠나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나는 무엇인가. 계산하는 나다. "조건이 되면, 시간이 나면, 돈이 모이면." 계산=나. 그래서 계산이 끝나면 실천은 사라진다.
간디는 달랐다. 감동을 봤다. 감동≠나. 나=감동을 보는 자. 그래서 감동이 식기 전에 행위했다. 아니, 감동이 식든 안 식든 상관없이 행위했다. 왜냐하면 나≠감동이기 때문이다. 읽기→웃음, 읽기→해지, 읽기→결심. 간극이 없다는 것은 시간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위치가 감정/욕망/생각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자리에 있다는 뜻이다.
이 "나"의 위치 이동이 어릴 때부터의 훈련에서 나왔다. 거짓말을 하면 참회 편지를 썼다. 거짓말한 나≠참회하는 나. 거짓말한 나를 보는 나가 있다. 고기를 먹으면 자살을 고민했다. 고기 먹은 나≠고민하는 나. 고기 먹은 나를 보는 나가 있다. 썸을 타다 오해가 생기면 긴 편지를 썼다. 오해한 나≠해명하는 나. 오해한 나를 보는 나가 있다. 이 훈련이 매일 반복되면서 "나"의 위치가 고정되었다. 나=행위가 아니라 나=행위를 보는 자.
매일 같은 시간 양치질하며 경전을 암송한 것도 같은 훈련이다. 양치질하는 나≠암송하는 나. 양치질하는 나도 보고 암송하는 나도 보는 제3의 나가 있다. 이 제3의 나가 진짜 나다.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둘을 동시에 보는 자. 돈을 쓰면 가계부에 기록했다. 돈 쓴 나≠기록하는 나. 돈 쓴 나를 보는 나가 있다. 이것이 자각이다. 정신줄을 잡는다는 것은 "나"의 위치를 감정/욕망/생각에 두지 않고 그것을 보는 자리에 두는 것이다.
"논리는 사건 이후에 온다"는 말도 이것이다. 미리 계산하는 나=계산. 계산에 빠진 나. 그래서 상황이 와도 계산과 맞지 않으면 행위하지 못한다. 간디는 나≠계산. 나=상황을 보는 자. 그래서 상황이 오면 반응한다. 계산 없이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하는 나를 보면서 반응하는 것이다. 방향은 분명하다. 평화의 말, 비폭력. 이 방향은 "나"의 위치에서 나온다. 나=평화를 보는 자. 나=비폭력을 보는 자.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는 그 순간에 결정되지만, 어떤 방향으로 갈지는 "나"의 위치가 정해준다.
간디가 죽을 때 여자들이 바가바드 기타를 낭송한 것은 "나"의 위치가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몸이 죽어도 나≠몸. 나는 몸을 보는 자. "낡은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듯이 몸을 입었던 자도 낡은 몸을 벗고 새 몸으로 옮겨간다." 옷을 입는 자가 나다. 옷=나가 아니다. 경전을 읽는 것과 사는 것이 하나였다는 것은 경전=나도 아니고 삶=나도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경전을 읽는 자이면서 동시에 삶을 사는 자를 보는 자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특별한 영성 체험이나 신비한 계시가 아니라 "나"의 위치 이동이다. 나=감정에서 나=감정을 보는 자로. 나=생각에서 나=생각을 보는 자로. 나=욕망에서 나=욕망을 보는 자로. 이 이동이 즉시 일어나는 것. 이것이 간극 없음이다. 감정이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보는 것. 욕망이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보는 것. 생각이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보는 것.
이것은 매일 연습할 수 있다. 거짓말하면 거짓말한 나를 봄. 돈 쓰면 돈 쓴 나를 봄. 화나면 화난 나를 봄. 감동받으면 감동받은 나를 봄. "나중에"라고 말하는 순간 나=계산이 된 것이다. 그 계산하는 나를 보면 된다. 그러면 "나중에"가 사라진다. 나≠계산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뗄 수 있다. 감동받은 나를 보는 나가 한 걸음을 뗀다.
간디는 달팽이의 속도로 살았지만 실천의 속도는 빛의 속도였다.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 "나"의 위치가 안정되어 있었다는 증거다. 느리게 걷는 나를 보고, 느리게 물레 돌리는 나를 보고, 느리게 침묵하는 나를 본다. 그러다가 감동받은 나를 보면 행동한다. 느림과 빠름이 공존한다. 우리는 바쁘게 사는 나=바쁨이다. 나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일은 미룬다. 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간디는 일상은 느리고 실천은 빨랐다. 느린 나를 보고, 빠른 나를 본다. 나는 느림도 아니고 빠름도 아니다. 나는 그것을 보는 자다.
간극 없음. 이것이 간디가 보여준 삶의 본질이다. 읽자마자 웃고, 읽자마자 실천하고, 경전을 삶과 일치시키고, 죽으면서도 경전을 듣는 것. 모두 "나"의 위치가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나"의 위치를 이동시키면 된다. 오늘 감동받았으면 감동받은 나를 본다. 그러면 오늘 한 걸음 뗄 수 있다. 내일로 미루지 않게 된다. 화가 나면 화난 나를 본다. 그러면 화=나가 아니게 된다. 나중에 반성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보면 된다. 그렇게 매일 연습하면, 언젠가 우리도 경전을 읽고 웃을 수 있고, 슬픔 속에서 웃을 수 있고, 읽자마자 실천할 수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