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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의 질문들] 시즌3-3 먹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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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5-12-18 09:45 조회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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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자 먹는 시대

한 세미나 참석자의 이야기다. 그는 시골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채식 위주의 식단을 유지해왔다. 밭에서 막 따온 오이를 된장에 찍어 먹고, 찬물에 밥을 말아 고추장을 곁들여 먹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혼자 살게 되면서 자신도 모르게 어떤 마음이 일어났다고 한다. "나는 살생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 "나는 윤리를 실천하고 있는 합리적 인간"이라는 자의식이었다.

그러나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한 달 이상 토사곽란을 반복하고, 심한 두통과 하반신 통증에 시달리다 한의원을 찾았을 때, 한의사는 말했다. "맥이 약하고 혈 부족이 심각합니다. 고기를 드셔야 합니다." 결국 그는 닭가슴살을 삶아 먹기 시작했다. "너무 괴로워하면서도 살려고 지금 먹고 있다"는 그의 말에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것은 비단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연애를 하지 않고 결혼도 미루는 세대가 식욕에만큼은 몰두한다. 인스타그램을 열면 정갈하게 담긴 요리 사진들이 넘쳐나고, 주말이면 사람들은 새로 생긴 레스토랑을 찾아 줄을 선다. 먹는 것은 안전하다. 음식은 나를 거절하지 않는다. 배달 앱은 언제나 친절하다.

그런데 이렇게 먹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된다. 폭식과 구토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다. 헬스장에서 살을 빼고 병원에서 시술받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먹고 다시 후회한다. 몸이 원하지 않는데 입으로 밀어 넣고, 몸이 요구하는데도 죄책감에 빼내려 한다. 자기 자신을 적으로 삼는 이 분열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2. 중심에 선 나

우리는 자신을 중심에 놓는다. 나라는 존재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고, 모든 것을 나로부터 출발해서 이해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필요한 것. 그런데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세계에서 중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유일한 중심으로 여길 때, 우리는 서로를 주변부로 밀어낸다.

바가바드기타는 이렇게 말한다. 참 자아인 아트만은 우주의 근원인 브라만과 다르지 않다. 삼라만상 안에서 자아를 보고, 자아 안에서 삼라만상을 본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을 에고, 즉 거짓 자아의 덩어리인 개인으로만 생각한다. 이 순간 우리의 생명은, 모든 생명과의 연결은 단절된다.

현대 사회는 이러한 개인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심지어 추구해야 할 가치로 여긴다. 우리는 독립된 개인으로 권리를 주장하고, 개인의 선택으로 소비하며, 개인의 책임으로 실패를 감당한다. 그렇다면 이 고립을 깨뜨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가장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순간, 바로 식탁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3. 식탁이라는 공동체

고대의 신화들은 먹는 행위를 의례로 보존했다. 사냥꾼은 들소를 죽인 후 들소를 위해 춤을 춘다. 죽임에 대한 죄의식을 표현하고, 동시에 그 생명이 나에게로 이어진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다. 고대인들에게 들소는 단순한 먹잇감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었다. 살생 후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의식을 치러야 했다.

사무라이 문화에도 비슷한 윤리가 있다. 한 사무라이가 영주의 복수를 위해 적을 찾아냈다. 그런데 그 적이 사무라이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화가 치민 사무라이는 그러나 칼을 거두고 돌아선다. 화난 상태에서 죽이면 그것은 영주의 복수가 아니라 나의 복수가 되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먹는 행위를 개인의 욕망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나 공동체와 세계, 그리고 생명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이러한 의례를 완전히 상실했다. 우리는 마트에서 깨끗하게 포장된 고기를 산다. 그것이 어떤 생명이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 공장식 축사에서 평생 햇빛 한 번 보지 못하고 자란 동물들. 이 모든 폭력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그저 스티로폼 용기에 담긴 고기만 본다.

생태계의 먹이사슬을 그려보면, 모든 생명이 먹고 먹히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풀이 토양의 영양분을 흡수하고, 초식동물이 풀을 먹고,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먹는다. 그리고 이들이 죽으면 다시 토양으로 돌아간다. 이 순환 속에서 어느 하나도 특권적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먹은 풀이고 고기이며, 동시에 나를 먹을 미래의 흙이고 벌레다.

우리는 살기 위해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한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외면하고 깨끗한 척할 것이 아니라, 그 무게를 느끼며 살아야 한다. 적어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 먹을 만큼만 담고, 담은 것은 다 먹는다.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해, 내가 버리는 음식에 대해 의식적이 되는 것. 그것이 현대의 우리에게 가능한 의례다.

 

4. 투명한 식탁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한 가족 이야기를 해보자. 희생 제의를 앞두고 누가 희생될 것인가를 두고 가족들이 대화를 나눈다. 놀라운 것은 이 대화에 어린아이까지 참여한다는 점이다. 죽음과 희생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족 모두가 함께 논의한다. 각자의 논리를 갖고 대화하며, 서로의 입장을 경청한다. 투명하게 열린 공간에서 진행되는 논리적 대화.

현대 사회의 많은 비극은 이러한 투명성의 결여에서 비롯된다. 주식 투자로 전 재산을 잃은 한 가장을 상상해보자. 집도 날아가고 차도 날아가고 월급도 차압되었다. 그는 절망에 빠진다. 그런데 만약 그가 평소에 가족들과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요즘 주식이 떨어지고 있어. 걱정이야." 이런 이야기를 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었다면, 가족들이 함께 대안을 모색하고 서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면,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많은 경우 가장은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려 한다. 가족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명목으로 문제를 숨긴다. 이것을 책임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책임 회피에 가깝다. 나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생각은 오히려 연결을 끊는 행위다. 혼자 끙끙 앓다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폭력적인 방식이다.

전 가족을 몰살하고 자살한 가장의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분노한다. 너무 비겁하다고, 무책임하다고. 그러나 그 사람을 그 지경까지 몰고 간 것은 무엇인가? 잘 살아보려고 투자했던 것 아닌가? 의도는 좋았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죽는 것이 책임지는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책임 회피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끝까지 살아남아 그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삶은 우발적 사건들의 연속이다. 그것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오만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통제가 아니라 수용이다. 그리고 투명한 대화다. 자기답게 산다는 것은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타자와 투명하게 소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통은 가장 일상적인 공간, 바로 식탁에서 시작될 수 있다.

 

5. 함께 먹는다는 것

세미나를 마치며 한 참석자가 물었다. "신화와 인도철학을 지금까지 얘기해놓고 결론은 그냥 고기를 먹자는 건가요?"

그가 닭가슴살을 먹기 시작한 후 몇 달이 지났을 때, 명절에 집에 갔다. 어머니가 저녁을 차리면서 물었다. "요즘 뭐 먹고 사니?" 그는 평소처럼 "잘 먹어요" 하고 넘기려다가, 문득 솔직하게 말했다. "요즘 닭가슴살만 먹어요.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어머니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 식탁에 삼계탕이 나왔다. 평소보다 푹 고아서 국물이 진했다. 아무 말 없이 내온 밥이었지만, 그는 먹으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자기 혼자 윤리를 실천한다고 채식하고, 병들어서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먹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혼자였다는 것. 정작 중요한 건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먹느냐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를 먹고 나면 소의 춤을 추고, 돼지를 먹고 나면 돼지의 춤을 추고, 닭을 먹고 나면 날아보는 것. 고대인들의 이 우스꽝스러운 말이 사실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먹은 생명이 내 안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생명을 통해 나는 다시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다는 것.

주식으로 전 재산을 잃은 그 가장이 만약 저녁 식탁에서 가족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면. "요즘 투자가 안 좋아. 걱정이야." 아마 가족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혼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함께 밥을 먹으며 "그래도 우리 있잖아"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달랐을지 모른다.

마하바라타의 가족들은 죽음과 희생이라는 무거운 주제조차 식탁에서 함께 이야기했다. 물론 우리는 그런 극단적 상황에 놓이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보다 훨씬 사소하다. 저녁 여섯 시, 누군가는 피곤해서 말이 없고, 누군가는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오늘 뭐 했어?" "그냥." "학교는?" "별일 없어." 이렇게 건성으로 주고받는 대화. 하지만 적어도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앉아 있다. 같은 밥을 먹는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혼자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며 유튜브를 보는 것과,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것. 대화가 많지 않아도, 특별한 음식이 아니어도,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다르다.

그 참석자는 말했다. "그날 이후로 가끔 집에 가요. 어머니랑 별로 할 말이 없어도, 그냥 같이 밥 먹으러요. 어머니도 별말 안 하세요. 그냥 '많이 먹어라' 이 말만 하시죠. 근데 그게... 나쁘지 않더라고요." 소고기와 대화. 몸을 유지할 영양분과 마음을 나눌 관계. 거창한 철학이 필요한 게 아니다. 함께 앉아서 밥 먹는 것. 이따금 "요즘 어떠니?" 하고 묻는 것. "별일 없어" 하고 대답하는 것. 그리고 다음에 또 만나는 것.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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