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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철학의 질문들] 시즌3-4주 고통을 옮기는 기술, 고통을 안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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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5-12-31 09:33 조회5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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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아는 16년 전 죽은 언니를 떠올린다. 언니가 죽던 날 하늘에서 떼죽음을 당한 새들도 함께 떠올린다. 새들은 다시 세월호를 불러온다. 바다에 잠긴 아이들, 차가운 물속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는 아이들. 경아는 작별하지 않는다. 언니와도, 새들과도, 세월호와도. 고통은 경아만의 것이 아니다. 언니의 죽음이 새들의 죽음과 만나고, 새들의 죽음이 세월호의 죽음과 만난다.

이것이 고통을 다루는 한 가지 방식이다. 고통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는 것. 혼자 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고통들과 이어 흐르게 하는 것. 그런데 마하바라타는 정반대 방향을 보여준다.

 

온 세상 대신 숲만 태우다

와시슈타는 100명의 아들을 모두 잃고 다섯 번 죽으려 했다. 산에서 뛰어내렸지만 바위가 받쳐주었고, 강물에 몸을 던졌지만 물이 풀어주었다. 돌아가는 길에 며느리 배 속에서 손자가 베다를 배우는 소리가 들렸다. 와시슈타는 그 소리를 듣고 살기로 했다. 정확히 말하면, 죽는 것을 멈췄다. 살 이유를 자신이 아닌 손자에게 둠으로써 고통과 거리를 만들었다.

손자 빠라샤라는 태어나 진실을 알았다. 아버지가 락샤사에게 잡아먹혔다는 것을. 그는 온 세상을 파멸시킬 고행을 시작했다. 조상들이 말려 온 세상 대신 락샤사만 태웠고, 성자들이 다시 말려 희생제를 멈추고 남은 분노를 히말라야 북쪽 숲에 버렸다. 마하바라타는 전한다. 오늘까지도 그 숲이 나무와 돌들을 삼키고 있다고.

빠라샤라의 분노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동했다. 온 세상에서 락샤사로, 락샤사에서 숲으로. 분노는 여전히 무언가를 태우지만 이제 그것은 빠라샤라 안이 아니라 저 멀리 숲에 있다. 빠라샤라는 분노를 숲에 버림으로써 자신과 분노를 단절시켰다. 온 세상이 타는 대신 숲만 타게 함으로써 최악을 피했다. 이것이 마하바라타가 제시하는 답이다. 고통을 자신 밖으로 옮기는 것, 고통이 미치는 범위를 줄이는 것.

이 방식의 효능은 명확하다. 와시슈타는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상태에서 벗어나 손자를 키울 수 있었다. 빠라샤라는 온 세상을 파멸시키는 대신 세상을 구했다. 화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해친다. 그 화를 멀리 보냄으로써 나와 내 주변을 보호했다. 그러나 한계도 분명하다. 숲에 고립된 분노는 더 이상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통을 밖으로 옮기지 않고 안에 품는 방식은 어떤 결과를 낳는가.

그런데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정반대를 보여준다. 빠라샤라가 분노를 숲에 버렸다면 경아는 슬픔을 자신 안에 품는다. 그리고 그 슬픔을 언니에서 새들로, 새들에서 세월호로 확장하며 연결한다. 빠라샤라는 파괴의 범위를 줄였고, 경아는 애도의 범위를 넓혔다. 고통을 외부로 던져 단절하지 않고 내면에 품으면서 다른 고통들과 연결함으로써 개인적 슬픔을 집단적 애도로 변화시킨다.

 

고립이 아니라 연대로

제주 4·3을 생각한다. 1948년 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는 친척이 친척을 죽였다. 형제가 형제를 죽였다. 이웃이 이웃을 총으로 쏘고 불을 질렀다. 누가 누구를 죽였는지 말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제주에서는 누군가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함부로 꺼내지 않는다. 그 할아버지가 어느 편이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고통은 어디로 갔는가. 빠라샤라처럼 숲에 버려졌는가. 아니다. 드러낼 수조차 없었던 이 고통은 침묵 속에 내면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연결되지 못한 내면화였다. 말하지 못하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몸 안에 남아 고립된다. 2003년 정부가 공식 사과를 했을 때 70대 노인들이 처음으로 울었다는 증언이 있다. 55년 동안 품고 있던 슬픔이었다. 그 순간 고립되었던 고통이 비로소 드러났고, 다른 이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

경아의 내면화는 4·3 생존자들의 침묵과 다르다. 4·3 생존자들은 말할 수조차 없었기에 고통이 몸 안에 갇혀 고립되었다. 반면 경아는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고통을 드러내고 언니의 죽음을 새들과 세월호로 확장하며 연대를 만들었다. 고통을 내면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품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어 다른 고통들과 연결하는 것이다. 그래야 고통이 고립되지 않고 흐른다.

이 방식의 효능은 다르다. 한강의 글쓰기는 경아의 고통을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의 신체 속으로 내면화시킨다. 독자가 읽는 순간 경아의 고통이 우리에게 전달되고, 우리를 통해 다시 이어진다. 4·3의 고통도 이렇게 살아서 숨 쉰다. 이것은 제주도 어느 할머니 한 분의 문제가 아니다. 그 고통을 읽은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된다. 고통이 이렇게 연결될 때, 혼자 짊어진 짐은 나눠지고 홀로 감당하던 트라우마는 조금씩 가벼워진다. 트라우마가 정직하게 드러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함께 이야기할 때 그 트라우마는 조금씩 무화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을 기억함으로써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경각심을 갖게 된다.

숲은 여전히 타고 있고 경아는 여전히 작별하지 않는다. 둘 다 고통을 끝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있다. 빠라샤라의 고통은 숲에서 단절되어 홀로 타고, 경아의 고통은 다른 고통들과 연결되어 계속 흐른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방식은 정반대로 보이지만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 와시슈타는 손자 때문에 살았다. 분노를 숲에 버린 빠라샤라는 이야기를 듣고 온 세상을 태우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고통을 자신에게서 떼어냄으로써 고통에 잠식되지 않았고, 그래서 다시 세상과 관계 맺을 수 있었다. 손자를 키우고, 성자로 살아가고,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경아 역시 언니를 작별하지 않음으로써 새들과 세월호와 연결되었고, 그 연결을 통해 고립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 있었다. 마하바라타와 한강이 보여주는 두 길은 방향은 다르지만 같은 곳을 향한다. 고통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고 계속 살아가는 것.

와시슈타와 빠라샤라의 이야기가 보여주듯, 6·25를 겪지 않았어도, 4·3을 경험하지 않았어도, 5·18의 현장에 없었어도 우리 안에는 그것들이 내재화되어 있다. 고통은 세대를 건너 전승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물려받은 고통을 다룰 것인가. 빠라샤라처럼 멀리 버려 단절시킬 것인가, 경아처럼 다른 고통들과 연결하여 함께 기억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중요한 것은 고통이 나를 완전히 삼키지 않도록 하면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당신에게도 작별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멀리 버려 홀로 타게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들과 연결할 것인가. 고통은 사라지지 않지만 흐르게 할 수는 있다. 단절이 아니라 연결의 방향일 때, 고통은 나 혼자를 태우거나 숲에 고립되는 대신 우리를 잇는 끈이 되어 계속 흐른다. 고통을 옮겨 단절시키는 기술도 때로 필요하지만, 고통을 안아 연결로 만드는 용기는 더욱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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