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철학의 질문들] 6주 전쟁터의 양자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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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5-06-03 22:42 조회64회 댓글0건본문
나는 세상의 파멸을 위해 익은 시간이다. 온 세상을 여기에 모여들게 했으니. 반대편에 있는 용사 모두는 그대가 아니어도 없어지리라. 그러니 일어서라, 영예를 얻어라. 적을 이기고 풍요로운 왕국을 누려라. 왼손잡이 궁수여, 이들은 내게 이미 죽은 자들이다. 그대는 다만 상징이 될 뿐이구나. 드로나, 비슈마, 자야드라타, 까르나 그리고 다른 영웅적 병사들도 이미 내게 죽임을 당했다.(바가와드 기따, 박경숙 옮김, 새물결, 2022, 165쪽)
『바가바드 기타』의 이 수수께끼 같은 선언이 던지는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의외의 곳에서 비슷한 딜레마와 마주한다. 20세기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원자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맞닥뜨린 근본적 한계 말이다.
원자 내부는 직접 볼 수 없다.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것은 빛을 쏘았을 때 나오는 스펙트럼뿐이다. 전자가 궤도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빛이 나오는 것은 전자가 궤도 사이를 이동할 때뿐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여기서 발상을 바꿨다. "원자가 무엇인지는 덜 생각하고 원자가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실체 대신 관측 가능한 전이에 주목한 것이다.
그가 만든 행렬 언어에서는 A×B와 B×A가 다르다. 위치를 먼저 재고 속도를 재는 것과 속도를 먼저 재고 위치를 재는 것이 다른 결과를 낳는다. 이것이 불확정성 원리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기술적 한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원리상 우리는 결코 둘을 동시에 알 수 없다. "어려운 게 아니라 안 되는" 것이다.
크리슈나의 가르침도 비슷한 구조를 보인다. 그의 지혜는 미리 완성된 교리로 저장되어 있지 않다. 아르주나의 구체적 질문 속에서만 현실화된다. 아르주나가 다른 질문을 했다면 크리슈나의 답변도 달랐을 것이다.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표현과 "세상을 파멸시키러 온 시간"이라는 표현은 서로 다른 관측 방식을 보여준다. 전자는 전체 스펙트럼을 보는 관점이고, 후자는 특정 전이 순간을 포착하는 관점이다.
아르주나가 "상징"이라는 것은 허상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는 독립적 개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정체성을 갖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에서 각 성분이 전이 값을 나타내듯, 아르주나는 크리슈나와의 대화, 전쟁이라는 상황, 왕족으로서의 역할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는 과정적 존재다.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크리슈나의 말은 운명론이 아니다. 아르주나의 인식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아르주나는 적군을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존재들로 본다. "저 사람은 내 스승이니까, 저 사람은 내 친족이니까." 하지만 스승됨이나 친족됨도 특정 관계와 상황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 아닐까? 지금 이 전쟁터에서 그들은 이미 '적'이라는 새로운 관계 속에 있다.
크리슈나가 제시하는 "니르바나 카르마"는 여기서 새로운 행위 방식을 제안한다.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의 모든 결과를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행위의 순간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이는 체념이 아니라 해방이다.
하이젠베르크와 크리슈나 모두 기존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 했다. 하나는 연속적 변화 대신 불연속적 전이를 표현하는 행렬 언어를 만들었고, 다른 하나는 고정된 정체성 대신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를 그렸다. 둘 다 보이지 않는 실체를 상정하려는 우리의 습관 자체를 문제 삼았다. 변화 자체가 더 근본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결국 『바가바드 기타』가 던지는 질문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 대신 "지금 여기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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