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설수설 s3-2 배중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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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5-03-25 18:26 조회43회 댓글0건본문
배중율
빛은 대체 무엇일까?
양자역학이라는 이름의 이 황당무계한 과학의 출발점은 의외로 심플하다. 바로 '빛' 때문이다. 우리 눈앞에 늘 존재하지만, 그 정체를 묻는 순간 뭔가 수상해지는 그것.
촛불의 흔들림 속에, 별빛의 반짝임 속에, 스마트폰 액정의 번쩍임 속에 존재하는 그것. 없으면 모든 게 암흑이 되고, 있어도 그 실체는 잡히지 않는 그 존재. 그러니 과학자들의 집착도 이해된다. 세상을 이렇게 찬란하게 물들이는 존재가, 정작 뭔지 알 수 없다는 건, 학자 입장에선 잠 못 잘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묻는다. 꽤나 간단하지만 깊은 질문을. "빛은 입자인가, 파동인가?" 물리학이 아니라 철학이다. 아니, 존재론이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다. 대답 대신 불 꺼진 방 안에 촛불 하나를 놓고 나가는 것처럼. 대답은 없고 질문만 더 남는다.
입자라는 건 뭘까. 따로따로 존재한다. 불연속적이다. 알갱이처럼 떨어져 있다. 고깃집에서 고기만 골라 먹고 채소는 남겨두는 식이다. 각자의 자리, 각자의 몫. 나뭇잎 위에 굴러다니는 빗방울처럼, 서로 닿지 않으면서도 존재감을 뽐낸다.
반면 파동은 어떤가. 물결처럼 연속적이다. 어디서 시작했는지 알 수 없고, 어디까지 이어질지도 감이 안 잡힌다. 하나가 또 하나로 이어지며 공간을 채우고, 경계를 지우며 확장한다. 오케스트라의 음들이 겹치고, 퍼지고, 뒤섞이며 하나의 울림이 되는 것처럼.
이 둘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입자는 독립적인 존재이고, 파동은 관계적인 흐름이다. 입자가 회의실이라면 파동은 술자리다. 입자가 '나'를 강조한다면, 파동은 '우리'로 스며든다.
철학자들은 단호하게 말한다.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일 수 없다. 누군가가 "나는 여자이면서 동시에 남자야"라고 말하면, 그걸 이해하기 위해 기존의 이분법은 붕괴되어야 한다. 익숙한 분류 체계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상태, 그것을 '모순'이라 부른다. 동시에 둘 다일 수 없다는 것. 적어도 과거에는 그렇게 믿었다.
그럼 타협을 하면 어떨까? "그 중간 어딘가쯤이면 되잖아?" 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현실에선 회색지대가 익숙하니까. 아침엔 커피를 좋아하지만 저녁엔 차를 마시는 사람도 있고, 주말엔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지만 평일엔 누구보다 부지런한 이도 있다. 그런데 고대 논리학은 이런 '양다리 인생'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엄격한 논리를 '배중률'이라 부른다. 선택은 둘 중 하나. a이거나 b이거나. a이면서 b인 건 없다. 입자이거나 파동이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흑이거나 백이거나. 회색을 꿈꾸는 자에겐 너무 가혹한 조건이다. 그게 논리의 철학이었다. 헷갈리면 지는 거고, 애매하면 버림받는 거다.
그래서 19세기 사람들은 고민했다. 책상 앞에서, 실험실에서, 꿈속에서까지. 빛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입이 마를 정도로. 첫사랑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어 안달하는 청춘처럼. 입자일까, 파동일까. 그 끝을 알 수 없는 질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등장한 인물이 토마스 영. 물리학계의 시인이자 연금술사 같은 존재. 그는 1800년, 단 한 번의 실험으로 전 세계를 술렁이게 만든다. 이름도 낭만적인 '간섭 실험'.
방법은 간단하다. 물 위에 돌을 하나 던지면 물결이 퍼져나간다. 돌을 두 개 던지면? 각자의 물결이 퍼져나가다가 서로 만나 증폭되거나 상쇄된다. 이 정교한 리듬과 충돌, 이것이 간섭이다. 입자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일. 알갱이들은 만나도 튕겨나갈 뿐이다. 파동만이 가능한 춤이다.
영은 이 원리를 빛에 적용했다. 슬릿 두 개를 만들고, 빛을 그 사이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보았다. 스크린 위에 떠오르는 줄무늬—진하고 옅고, 다시 진하고 옅고. 간섭 무늬였다. 빛이 파동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이 발견은 선언이었다. "빛은 파동이다!" 학계는 박수를 쳤고, 시대는 흥분했다. 고백을 받아들인 연인처럼 모두가 들떴다. 드디어, 빛의 정체를 밝혀낸 것이다. 당시엔 그렇게 믿었다.
사람들은 들떴다. 긴 기다림 끝에 애인에게 고백받은 기분. 100년 동안 빛을 파동으로 믿었다. 그것도 '과학적으로' 믿었다. 간섭무늬도 봤고, 물결도 확인했으니 의심할 여지는 없었다. 그런데!
그 믿음을 배신하는 일이 벌어진다. 1900년, 연애편지를 읽다가 이별 통보를 받은 기분. 새로운 실험이 등장했다. 그 실험에서 빛은 알갱이처럼 행동했다. 제법 물질적인 태도를 보였다. 불연속적이고,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모습—말 그대로 '입자'다.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왜 이래? 분명 파동 아니었어?" 새로운 행동에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 그래서 붙은 이름, '양자'. 빛이니까 다정하게 '광자'라고도 불렀다. 마치 빛이 본명을 밝힌 순간.
파동이라 믿었던 빛이 입자의 특성을 보인다. 우주의 질서가 다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커피를 내팽개치고 실험실로 달려갔고, 철학자들은 헤겔과 뉴턴을 들고 사색에 빠졌다. 한 줄의 관측이 모든 걸 흔든다. 세계는 다시 뒤집히기 시작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번엔 통째로 뒤집는다. 누군가 실험실에서 외친다. "잠깐만, 그렇다면! 입자라고 믿었던 전자도, 파동일 수 있지 않아?" 중년에 떠오른 첫사랑처럼, 잊고 있던 가능성이 불쑥 튀어나온다.
전자. 교과서 첫 장부터 등장하는 성실한 입자. 그런데 그 전자가 파동처럼 행동한다면? 물리학계의 정체성 혼란이다. 평생 아재 개그만 하던 삼촌이 기타를 들고 재즈를 시작하는 격.
과학자들은 머리를 감싸 쥔다. 논문을 찢고, 데이터를 의심하고, 밤새 중얼거린다. "정말 그런 걸까? 우리가 놓친 게 있다면... 바로 그거야!" 그렇게 탄생한 실험이 '이중 슬릿 실험'이다.
단순한 실험이 아니다.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질문의 문이다. 입자인 줄만 알았던 전자가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하며 파동처럼 퍼지고, 간섭하고, 혼자 놀고, 감춰진 자리를 몰래 조율한다면?
이건 우주가 전하는 편지다. "너희가 아는 게 다가 아니야. 나는 더 복잡하고, 더 유연하며, 더 아름답단다."
이중 슬릿 실험은 세상을 갈라놓는다. 과학과 철학, 입자와 파동, 명확함과 불확실함 사이에.
그리고 그 중심에, 우리도 서 있다.
전자를 하나씩 쏴도 마찬가지다. 전자 하나가 두 개의 구멍을 동시에 지난 것처럼 행동한다. 혼자서 간섭한다. 셀프 파동 놀이. 물리학은 심리학 같아지고, 실험실은 철학관이 되어간다.
입자라면서도 파동처럼 행동하는 전자. 논리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논리가 닿지 못한 세계를 드러낸다. 전자는 속삭인다. "넌 나를 정의할 수 없어. 넌 아직 날 모른다구."
세상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과학자들은 넥타이를 풀고, 분필을 던지며, 밤새 칠판 앞에서 몸부림쳤다. 입자냐 파동이냐, 배중률과 모순율을 붙들고 괴성을 질렀지만, 어느 쪽도 빛과 전자를 설명할 수 없었다.
문득, 다른 가능성이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입자이면서도 파동일 수 있지 않을까? 논리의 균열이 아니라, 자연의 본모습 아닐까? 고전 물리학이 구축한 세계는 조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세상은 '이거나 저거나'가 아니라 '이면서 저인' 것으로 가득하다는 걸 우리는 깨달았다. 고양이는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고, 전자는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저기에도 있다. 상식, 논리, 냉정했던 이성의 법칙들은 이 세계 앞에서 입을 다문다.
양자역학은 상식 바깥에서, 그러나 현실 안에서, 불쑥—그러나 피할 수 없이 등장했다. 연인처럼. 가까워서 낯설고, 낯설어서 두근거리는.
그리고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입자'인가, '파동'인가?
정해진 자리에 머무르며 경계와 역할을 지키는 사람인가? 아니면 파동처럼 유연하게 퍼지고 스며들며, 언제든 자신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인가?
하루하루를 틀 안에서 살아내는 입자 같은 삶. 안정적이지만, 답답하고, 예측 가능하지만 예외는 없다. 파동 같은 삶은 어떤가. 한계가 없고, 규칙을 비웃고, 흐르고 흔들리고 넘친다. 동시에 불안하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이 두 가지 모두 가능하다면? 낮에는 입자처럼 단단하게 일하고, 밤에는 파동처럼 흐르며 사랑하고, 실수하고, 다시 깨어나는 삶. 당신은 어쩌면 그 둘의 모순을 껴안고 사는 '양자'일지도 모른다. 입자처럼 독립적이고, 파동처럼 연결된 존재. 중첩된 가능성.
그게 바로 우리다. 인간이라는 이름의 불확정성.
입자냐, 파동이냐
사람은 문을 하나만 통과한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발은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두 발이 각기 다른 문을 지나간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분신술이다. 너무 익숙해서 말 꺼내기도 민망한 이 사실을, 물리학자들은 다시 꺼내 들었다. 실험실에 모여 앉아 진지하게 말했다. "전자에게도 저 규칙이 통할까?"
그래서 전자 하나를 불러냈다. 몸통만 보면 입자처럼 생긴 그 녀석을, 문 두 개 앞에 세워두었다. 입자라면 한 문만 고를 터. 어딘가를 통과해 흔적을 남길 터. 그런데 그 흔적을 확인하려는 순간,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전자가 말했다는 듯하다. "당신들이 아는 문, 나는 그걸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사이를 흐른다."
자, 전자가 입자라면 어떻게 될까? 그건 돌멩이다. 크고 단단한 몸뚱이를 갖고 있어서 어느 쪽 문을 고르든 하나만 통과해야 한다. 두 문 사이를 날아가다 반으로 쪼개질 리도 없고, 스스로 복제돼서 두 개가 될 일도 없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생각했다. "전자야, 너도 입자라며? 그럼 문 하나 골라서 가겠구나."
그렇게 되면 스크린에는 예상 가능한 무늬가 생길 것이다. 여기에 몇 개, 저쪽에 몇 개. 얼룩처럼 흩어져 찍히는 입자의 흔적들. 말하자면, 전자들의 통근기록이다. 출근 시간, 경로, 도착지까지 정확히 남긴 흔적.
과학자들은 머릿속에 그렸다. "이쪽 문으로 간 애들은 여기쯤 찍히겠지. 저쪽 문으로 간 애들은 저쪽에 모이겠지."
예측은 단정했고, 기대는 단순했다. 입자가 문 하나를 통과한다는 건 너무도 자명한 사실 아닌가? 문제는 전자가 그 자명함을 철석같이 무시했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실험을 해보니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결과가 튀어나왔다. 전혀 다른 그림이 스크린에 그려진 것이다. 간섭무늬. 물결처럼 반복되며 밝고 어두운 줄무늬가 번갈아 나타나는, 그 무늬다.
이 무늬는 파동이 만들어낸다. 예컨대 잔잔한 연못에 돌을 두 개 던졌을 때, 각각의 물결이 서로 만나 겹치고 부딪치며 생기는 동심원의 교차. 가운데는 서로 겹쳐서 밝아지고, 엇갈린 곳은 소멸돼 어두워지는 그 무늬다.
그런데 지금 전자는 하나씩 쐈다.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한 줄씩. 입자처럼 날아가게끔. 그런데 결과는 파동이다? 입자라면 저런 무늬는 애초에 불가능하다. 전자가 어디를 지나갔는지에 따라 자국이 찍혀야 하는데, 이건 누가 봐도 물결의 흔적이다.
전자는 입자 복장을 입고 나타났지만, 파동의 안무를 선보이고 있었다. 물리학자들의 눈앞에서, 그 모든 예측이 연못에 던져진 돌처럼 와르르 흩어졌다.
과학자들은 당황했다. "전자를 하나씩 쐈단 말이야. 한 줄, 한 줄. 그럼 당연히 입자처럼 움직여야지. 그런데 이 녀석, 스크린에 나타난 무늬는 웬 파동이람?"
하나씩 쐈다는 건 입자라는 뜻이다. 똑딱똑딱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한 줄씩 흘러나와야 한다. 그런데 스크린에는 물결이 일고 있었다. 간섭무늬. 파동의 흔적이다.
누구 하나 장난을 친 것도 아니고, 기계 고장도 아니다. 그대로 둔 실험, 그대로 둔 전자, 그대로 둔 장치에서, 예상과는 전혀 다른 무늬가 나타난 것이다. 전자는 입자 복장을 하고 파동의 춤을 췄다.
실험실은 조용했고, 이론은 흔들렸다. 눈앞의 결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때부터 과학자들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을 것이다. "전자야, 너… 무슨 수작이냐?"
이쯤 되면 물리학자들은 머리를 감싼다. 전자가 이쪽 구멍도 지나고, 저쪽 구멍도 지나고, 둘 다를 통과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는가?
사람이라면 양쪽 문을 동시에 지나갈 수 없다고 그토록 확신하던 이들이, 전자 앞에선 갑자기 유령 이야기를 꺼내게 된다. 전자는 몸 하나로 두 곳을 동시에 통과한단 말인가? 이쯤 되면 전자는 입자가 아니라 환영이다. 혹은 마법사. 아니면 아예 질문 자체가 틀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했다. "보자. 대체 어디를 지나가는 건지, 우리가 직접 보면 알 수 있겠지."
이윽고 구멍 앞에 관측기를 설치했다. 마치 몰래카메라라도 설치하듯. 전자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기 위한 비밀 장치. 이건 과학 실험이라기보다 일종의 잠복수사에 가깝다. 이제 남은 건, 눈을 부릅뜨고 기다리는 일이다.
관측기를 설치하고 전자를 지켜보기 시작한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간섭무늬가 사라지고, 입자무늬가 또렷하게 찍힌다. 전자는 더 이상 퍼지지 않는다. 한 방향으로 콕 찍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전까지만 해도 잔잔한 수면 위에 퍼져가던 파동의 흔적이었는데, 이젠 탁! 하고 자국을 남기는 입자다. 파동의 유영이 끝나고, 입자의 착지.
그 장면을 본 물리학자들은 머리를 긁는다. "아니, 방금까지 저 녀석, 파동 아니었나? 관측을 했다고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고?"
조금 더 솔직한 과학자는 중얼거린다. "전자야, 너… 이중인격이냐? 아니면 상황 따라 말 바꾸는 철학과 학생이냐?"
하지만 이건 농담이 아니다. 수많은 실험 결과가 말해준다. 전자는 상황을 본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끼고 반응한다. 마치 무대 위 배우처럼. 혼자 있을 땐 자유롭게 춤추고, 관객이 있으면 연기를 시작한다. 과학이라 쓰고, 연극이라 읽는 순간이다.
하지만 이건 농담이 아니라 엄연한 실험 결과다.
이 기묘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전자 한 놈을 놓고, 실험 방식에 따라 입자라고 하고, 또 어떤 경우엔 파동이라고 한다. 똑같은 전자인데, 매번 다른 결과를 낸다면, 그 정체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여기서 핵심은 '동일한 전자'라는 말이다. 동일하다는 건 같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같은 전자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입자처럼 탁 하고 찍히는가 하면, 파동처럼 퍼져나가 간섭을 일으킨다. 도무지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존재.
그러니 묻게 된다. "전자야, 너 진짜 누구냐?"
이 질문은 사실 물리학을 향한 질문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향한 질문이다. 관측자의 방식이 결과를 바꾼다면, 그 존재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그 무엇이다. 마치 거울에 비친 얼굴이 내 표정에 따라 바뀌듯, 전자는 실험이라는 상황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즉, 전자는 정해진 실체라기보다, 드러남의 방식이다. 고정된 이름이 아니라, 호출에 대한 응답이다. 그래서 더 묻고 싶어진다. "전자가 바뀌는 걸까, 아니면 우리가 바뀌는 걸까?"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중첩 상태'다. 전자가 입자인지 파동인지 묻는 건, 아직 이름도 생기지 않은 아기에게 직업이 뭐냐고 묻는 것과 같다. 관측 이전의 전자는 하나의 형체로 굳지 않는다.
입자처럼 보일 수도 있고, 파동처럼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런데 '처럼'이라는 말 자체가 함정이다.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혹은 그 너머일 수도 있다. 그야말로 이도저도 아닌, 이면서 저인 상태.
입자와 파동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며 그 사이를 누비는 이 전자는, 결정된 정체가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의 군무를 추는 존재다. 한 발은 입자에, 다른 한 발은 파동에, 나머지 몸뚱이는 아직 아무 데도 닿지 않은 채 공중에 매달린 듯한 상태.
그러니 중첩이란, 어떤 성질도 단정 지을 수 없는 상태, 말하자면 "전자는 무엇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진실에서 멀어진다. 그저 질문만 남는다. "너, 지금 어디쯤 있니?"
이걸 언어로 붙잡으려는 순간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전자야, 너는 지금 입자와 파동의 특성이 중첩된 상태야"라고 말하면, 듣는 우리는 그 말을 너무 순진하게 받아들인다. 입자도 있고 파동도 있어서 둘이 어깨동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상상하게 된다. 마치 한 사람이 두 직업을 겸하고 있는 것처럼, 낮에는 입자, 밤에는 파동인 전자. 하지만 전자는 그렇게 출퇴근하지 않는다. 그런 착각이 바로 중첩을 오해하는 출발점이다.
하지만 중첩은 그런 식의 단순 혼합이 아니다. 이건 입자 반, 파동 반, 이렇게 섞어놓은 샐러드가 아니다. 어떤 실체가 동시에 둘 다인 상태도 아니다. 오히려 실체라는 이름을 아직 받지 못한 상태, 이름 붙일 수조차 없는 흐름에 더 가깝다. 존재하려는 의지를 품었지만 아직 어떤 형체도 띠지 않은, 말 그대로 형상 이전의 시간.
그 잠재성은 단지 미완이 아니다. 그것은 '될 수 있음'이라는 고유한 힘이다. 실현 이전의 격렬함, 형태 이전의 풍경. 말하자면 잠재태는 '존재할 것'의 어머니이자, '아직 존재하지 않음'의 가장 넓은 공간이다.
전자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전, 그 무엇도 아닌 상태. 입자와 파동, 그 사이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다. 경계가 없기 때문에 안도 밖도 구분되지 않는 상태. 이곳에서 전자는 말 없이 머물며, 단 하나의 질문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중첩 상태에 있는 전자는 어디를 지나갔는지 묻는 질문 자체가 의미를 잃는다. 이쪽인가, 저쪽인가를 따지는 순간, 이미 중첩은 사라진다. 말하자면,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바로 그 가능성의 자유를 거세하는 셈이다.
그래서 전자는 어떤 구멍도 통과하지 않았다. 동시에 모든 구멍을 통과했다. 아니, 통과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 그저 존재할 수도 있었던 가능성의 흐름 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위치도 없고, 경로도 없다. 말하자면 그림자는 있지만 몸은 없고, 울림은 있지만 소리는 없다.
관측이 일어나기 전, 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는 상태다. 어떤 방식으로든 규정할 수 없는, 경계도 윤곽도 없이 떠도는 가능성의 얼룩.
그 자체가 실체가 아닌 공간, 의미가 아닌 여백, 존재가 아닌 물음표. 그 틈을 '불가능성의 공간'이라 부를 수 있다. 물리학이라 쓰고, 존재론이라 읽는 이 모호한 서사는 결국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관측이 일어나는 순간, 전자는 무대에 등장한 배우처럼 하나의 얼굴을 선택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장실에서 입자 옷과 파동 옷을 동시에 껴입고 있던 그가, 관객 앞에 나타나는 찰나에 입자를 선택하거나 파동을 선택한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던 무대 뒤편에서, 하나의 배역으로 수렴되는 장면. 바로 그 순간이 관측이다.
이때 관측은 그저 바라보는 행위가 아니다. 눈으로 본다는 뜻은 이미 틀렸다. 관측은 존재를 불러내는 주문이다. '나타나라!' 하는 주문. 그리고 전자는 명령에 응답한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니 관측은 존재의 등장식을 여는 일이다. 잠재태로 숨죽이고 있던 전자가 드디어 이름을 갖고, 모양을 입고, 자리를 차지한다. 입자든 파동이든. 그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모든 것이었다.
요컨대, 중첩이란 '모든 가능성이 한 자리에 머물고 있는 상태'다. 전자가 입자인지 파동인지, 혹은 그 둘 중 무엇도 아닌지를 묻는 건 무의미하다. 왜냐면, 중첩 속의 전자는 아직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은 채, 선택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머금은 채로 존재한다. 입자도 될 수 있고, 파동도 될 수 있으며, 그 둘을 넘어선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이런 상태를 두고 고전논리의 배중률, 즉 중간을 허용하지 않는 논리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배중률은 흑백 논리다. 하지만 중첩은 색을 섞은 게 아니라, 아예 팔레트를 들고 있는 상태다.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다. 입자이면서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도 파동도 아닌 제3의 가능성일 수도 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전자도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보다 더 모호하고 더 신비롭다. 살아 있음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 중간도 아니다. 전자는 거기 있지만, 아무 자리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떤 자리에든 갈 수 있지만, 아직 그 어디에도 발을 디디지 않은 존재. 그러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그 낯선 상태가 바로 중첩이다.
'코펜하겐 해석'은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해석이 되었고, 지금도 교과서에 떡하니 실려 있다. 이 해석은 우리가 살아가는 거시세계와 전자가 춤추는 미시세계를 철저하게 나눈다. 거시세계는 우리가 감각으로 인식하는 세계, 즉 탁자도 있고, 컵도 있고, 나도 있고, 너도 있는 그 세계다. 미시세계는 다르다. 그곳은 가능성이 출렁이는 바다,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가 흐려지는 우주의 변방이다.
이 둘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는 바로 '관측'이다. 관측이란 무엇인가? 눈으로 본다는 뜻이 아니다. 존재를 호출하는 주문이다. 전자는 관측되지 않으면 아직 무엇도 아니다.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고, 무엇인지조차 아닌 그 무엇이다.
우리가 문을 지나간다. 하나를 선택하고 통과한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하지만 전자는 선택하지 않는다. 그에겐 문이 아니라 문들의 총합, 가능성들의 길목이 열려 있다. 그는 그 모든 문을 동시에 '통과할 수도 있는 존재'다. 그리고 아무것도 통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쯤 되면 머리가 멍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묻는다. "전자야, 너는 도대체 누구니? 왜 그렇게 정체불명처럼 구는 거니?"
전자는 말이 없다. 다만 관측될 때, 하나의 얼굴을 드러낸다. 파동의 미소일 수도 있고, 입자의 찡그림일 수도 있다. 그가 말하는 유일한 방식은 '당신이 어떻게 보느냐'이다.
그러니 전자는 전자다. 정의하려 들면 도망치고, 붙잡으려 하면 중첩된다. 그는 해답이 아니라 질문이고, 해석이 아니라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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