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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언스talk s2-5 엔트로피,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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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인비 작성일24-11-08 05:40 조회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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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신화

사람들은 흔히들 시간은 흐른다고 말한다. 아침이 오고, 밤이 찾아온다. 우리는 시간을 당연히 여긴다.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우리 삶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철학자들은 이렇게 단언하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가 그토록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시간의 흐름, 그 틀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마치 우리가 당연히 여긴 신념이 무너질 때의 불안과 혼란처럼, 과학이 보여주는 새로운 시간의 실체는 우리의 사고를 뒤흔든다.

먼저, 물리학의 관점에서 시간을 바라보자. 19세기의 두 거인, 클라우지우스와 볼츠만은 엔트로피 법칙을 통해 시간의 정체를 설명하고자 했다. 엔트로피란 무질서도다. 물체는 높은 상태에서 낮은 상태로,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해간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세상은 점점 더 무질서한 상태로 변화한다. 마치 방을 치우지 않으면 점점 어지럽혀지듯,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은 질서에서 벗어나 무질서로 향한다.

이러한 엔트로피의 흐름 속에서, 과거와 미래는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 등장한다. 과거란 무엇인가? 안정된 상태였던 순간들이다. 미래란 무엇인가? 불안정하게 뒤엉킨 무질서다. 우리가 시간을 느끼는 것은 이 무질서의 방향성을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과거를 안정성의 순간으로, 미래를 불안정한 순간으로 인지하며, 시간의 흐름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엔트로피 법칙에 따른 시간의 개념은, 우리가 이해해온 시간의 정의와는 다른 차원에서 우리를 사로잡는다.

루트비히 볼츠만은 엔트로피 법칙을 통한 시간의 개념을 깊이 연구했다. 하지만 이 발견은 그에게 큰 고통을 안겼다. 그가 발견한 시간의 본질적 의미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깨달음은 그를 절망의 끝으로 몰고 갔다. 결국 그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는 서양 지성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애써 붙잡아온 과거와 미래의 구분이 허상이었다는 사실,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발견은 그들에게 충격이었다. 볼츠만이 겪은 정신적 고통은, 시간의 허구성을 받아들일 수 없는 서양 문명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시간에 대한 고찰은 과학적 영역을 넘어 철학적 사유로 이어진다. 뉴턴은 절대적인 시간을 상정했다. 그의 이론에서 시간은 우주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흘러간다. 시간은 그 자체로 완전하며 변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절대시간을 강하게 부정한다. 그는 뉴턴의 절대시간 개념에 맞서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이름에서 ‘T’를 지워버리기까지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라이프니츠’로 부른다. 라이프니츠와 뉴턴의 대립은 철학적 유머로 읽힐 수도 있지만, 시간의 본질에 대한 치열한 논쟁의 상징이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시간이라는 개념을 거부한 라이프니츠는, 우리에게 시간은 상대적이며, 개인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된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셈이다.

이제 시간의 개념을 더 세밀하게 파고들어 보자. 양자역학에서는 시간이 무한히 분할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미세한 세계로 들어가면, 시간은 더 이상 연속적이지 않다. 10에 마이너스 33승 초, 이 극미세한 단위의 시간에 이르면 시간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다. 이때 시간은 입자의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잘게 쪼개진 단위로서 멈추어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지 않고, 단위로 존재하는 세계. 이러한 관점은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의 개념을 완전히 뒤바꾼다.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공간은 우리가 개척할 수 있지만, 시간을 개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의 부재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형태를 찾을 수 있을까?

과학의 이러한 발견은 불교 철학과도 닿아 있다. 불교에서는 이미 수천 년 전, 과거, 현재, 미래가 없다고 선언했다. 부처님은 가고 오는 것도 없고, 고정된 현재도 없음을 설파했다. 우리가 불안하게 붙잡고 있는 시간의 구분은 무의미하며, 실제로는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존재할 뿐이라고 말했다. 현대 과학이 밝힌 시간의 입자성과 부재의 개념은 대승불교의 철학적 진리를 새로운 방식으로 확인해준다.

우리는 엔트로피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이해한다. 그러나 이 무질서의 증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과거는 정돈된 상태로 기억되며, 미래는 복잡한 무질서로 다가온다. 시간이란 결국 그저 안정성과 불안정성의 차이일 뿐이라는 사실.

우리는 시간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과거와 미래가 없다는 진리는 결국,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시간의 흐름에 얽매이지 않고, 엔트로피의 증가 속에서도 우리만의 질서를 찾으려는 노력.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시간의 부재 속에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본질적 질문이다.

시간이라는 허상을 넘어서, 지금 이 순간의 존재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발견하는 것.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안다는 것’이란 결국 관계를 이해

루프 양자 중력 이론, 엔트로피, 정보 이론은 우리가 사는 현실과 우주의 작동 방식을 탐구하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이 논의는 철학적이면서도 과학적 깊이를 지니고, 그 중심에는 ‘시간’이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과연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절대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낸 허상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누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어쩌면 시간이란 실체가 없는, 우리 마음 속에서만 존재하는 구분일지 모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이 질문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뉴턴,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각각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 시간의 본질에 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의 본질을 연속적 변화 속에서 보았고, 뉴턴은 시간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보았죠.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들을 통합해 중력장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엮었습니다.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이 독립적이지 않고, 하나의 섬유처럼 얽혀있음을 보여주었죠. 하지만 아인슈타인도 해결하지 못한 또 다른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론이 중력과 거시적 세계의 법칙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미시적 세계를 지배하는 양자 역학의 도전이 그의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양자 역학은 이 세계가 절대적으로 결정될 수 없는 비결정성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간과 연결된 또 다른 개념, 엔트로피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엔트로피는 흔히 무질서의 증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엔트로피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능성이 점점 줄어드는 ‘관계의 제한’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생일을 모를 때는 가능한 날짜가 365일에 걸쳐 무한히 열려 있지만, 관계가 깊어져 특정 정보를 알게 될수록 그 가능성이 점차 줄어들게 됩니다. 이제 그 사람의 생일을 아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모든 날이 선택지로 열려 있지 않게 되죠. 이를 통해 시간과 관계가 얽혀 정보가 축적되고, 선택의 가능성이 제한되는 과정이 엔트로피 증가와도 맞물리게 됩니다.

정보 이론의 관점에서 ‘안다는 것’이란 결국 관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자연이나 우주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양자 이론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이 세계는 독립적 존재가 아닌 상호 연결된 관계 속에서만 실체를 갖게 됩니다. 즉, 존재가 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존재를 형성한다는 것이죠. 이렇듯 우리가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존재가 어떤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A라는 존재에 대한 정보를 기술한다는 것은 A가 주변 존재들과 맺는 모든 관계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A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B, C, D와 어떤 상호작용을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정보를 축적한다는 것은 곧 그 대상이 맺는 관계망을 그려나가는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정보 이론과 엔트로피, 그리고 관계성의 개념이 상호 얽혀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정보란 단순히 객관적 데이터의 집합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된 그 대상의 다양한 가능성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이 점점 제한되고 좁혀지는 과정이 바로 엔트로피의 증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정보를 축적하고 있다고 느낄 때, 사실은 우리가 속한 우주와의 관계성을 점점 좁혀가며 특정한 실체에 대한 명확한 이해로 나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양자 역학적 사고로 볼 때, 우리 존재와 우주 만물이 본래 비결정성을 지닌다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비결정적이고 열린 가능성 속에 있으며, 특정 관계가 형성될 때 비로소 존재가 확립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면, 이는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 사회적 관계, 심지어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정립된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없다면, 우리의 존재는 어떤 형태로도 고정될 수 없는, 그저 가능성 속에 머무르는 비존재에 가까운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이렇듯 양자 이론과 정보 이론은 관계와 존재의 본질을 새롭게 조명하며, 우리가 보는 세계는 상호작용과 관계성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깨달음을 제공합니다.

따라서 이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저 독립된 개체를 분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개체가 맺는 모든 관계망을 파악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안다고 말할 때, 사실은 그가 속한 관계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해가며 축적한 정보의 결과일 뿐입니다.

관계의 주름

우리가 존재한다고 느끼는 모든 것은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끊임없는 관계성 속에서 나타난다.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나’라는 것은 실은 수많은 다른 존재들의 흔적과 정보가 접혀 들어간, 주름진 상태일 뿐이다. 가령, A라는 존재를 생각해보자. A 안에는 A가 존재하게 만든 수많은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이 정보는 단순히 외부에서 부여된 것이 아니라, A와 주변이 상호작용하며 형성된 주름이다. 마치 접힌 천 안에 다양한 모습과 무늬가 숨어 있는 것처럼, 모든 존재는 자신 안에 수많은 타인과의 관계적 흔적을 품고 있다.

이러한 관계성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보통 어떤 대상을 아는 것을 그 대상에 대해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그저 겉모습일 뿐이다. A라는 존재를 아는 것은 단순히 A를 고립된 실체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A와 나 사이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내가 A에 대해 안다는 것은 A와 내가 형성한 관계의 결과로 나타나는 정보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다는 것은 나와 타인, 혹은 나와 세계 사이의 관계의 주름을 읽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주름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피부의 표면에 나타난 흔적이 아니다. 주름은 나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타인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생겨난 내면의 흔적이다. 나이가 들수록 생기는 주름은 시간을 통해 겪어온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적 기록이다. 한 사람의 주름 속에는 그가 만난 사람들, 경험한 사건들, 그리고 형성된 감정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이것이 곧 우주적 주름이다. 따라서 주름 없는 얼굴이란, 다름 아닌 관계가 없는 고립된 상태일 뿐이다.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보톡스다. 보톡스 주사를 맞아 주름을 제거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매끄러운 모습을 제공할지 모르지만, 그 순간 얼굴은 마비되어 다른 세포들과의 소통이 단절된다. 보톡스는 세포를 기절시켜 주변과의 상호작용을 막아버린다. 이렇게 고립된 세포는 생명력 없는 상태에 빠지고, 그 얼굴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워진다. 우리의 주름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의 흔적이며, 그 주름 속에서 우리는 타인을 내면으로 끌어들이고, 나 또한 타인의 일부분으로 존재하게 된다. 보톡스로 주름을 지운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지워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가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 또한 이와 유사하다. 시간을 독립적이고 고정된 실체로 이해하는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간은 우리가 우주와 맺는 관계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로벨리는 시간의 실체를 의문시하며, 시간은 오직 우리가 우주와 연결되는 방식에 따라 경험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시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와 우주의 상호작용에서 형성되는 주름이다. 우리가 우주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시간은 늘어나고 줄어들며, 그 흐름이 달라진다.

이제 과학적 탐구에 대한 우리의 접근을 돌아보자. 우리는 종종 과학적 이론을 진짜와 가짜로 나누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로벨리는 이것이 과학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과학적 이론은 진위를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우주를 더 깊이 있게 연결해주는 도구일 뿐이다. 가령, 뉴턴의 이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우주를 설명한다. 뉴턴의 물리학은 수학적 규칙을 통해 자연의 운동을 설명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 가능성과 현실성을 통해 세계를 이해했다. 둘 다 우주를 설명하는 진실을 담고 있지만, 그 차이는 우리가 우주와 얼마나 깊이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느냐에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혈액형이나 MBTI, 사주명리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 각각은 독자적인 주름으로서, 나름의 방식으로 자연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든, 중요한 것은 이 방식이 자연과 깊이 있게 관계 맺도록 도와주는가이다. 과학이든 철학이든, 그 방식이 우리가 자연과 얼마나 연결될 수 있게 해주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진위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우리와 우주를 잘 연결해주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이때 과학은 단순히 지식의 축적이 아닌, 우리와 세계의 관계를 보다 깊이 있게 형성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각기 다른 주름 속에서, 우주와의 소통을 통해 자신을 확장하고 타인과 얽히며 살아간다.

 

 

무질서의 정도 엔트로피 - 싸톡s2(5-2) https://blog.naver.com/bat90/223651137718

엔트로피 법칙은 윤리적 -싸톡s2(5-3) https://blog.naver.com/bat90/22365165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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