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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의 QnA]4주 - 감정이 권위가 된 시대, 우리는 무엇을 잃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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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Dandi 작성일26-07-01 18:16 조회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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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소녀가 화면 안에서 울었다. 독일에 와서 얼마나 잘 지내는지, 그게 자기에게 무슨 의미인지 말하는 아이 앞에서 메르켈은 너는 여기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 사람은 감정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 걸까. 아니다.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정을 너무 정확히 읽어서다. 독일 부모들의 마음속에서 이 아이는 안아 들여서는 안 되는 아이였고, 메르켈은 그 마음에 충실했다.

고객은 옳고 유권자는 가장 잘 안다는 세계. 신이 정하던 자리를 이제 내 감정이 차지한 세계. 우리는 그곳을 오래 살았다. 그런데 그 세계가 아이 하나를 안지 못했다. 온 국민의 마음 하나 때문에 우는 아이를 끝내 돌려보내는 것, 그게 우리가 떠받들어온 감정인가. 감정이 마지막 권위가 된 자리에서, 그 권위는 우리를 풀어주었나, 아니면 우리가 못 알아챈 새 감옥을 지었나.

한 사람이 비폭력 대화에 빠져 센터를 오래 다녔다. 강사 자격까지 땄다. 이런 일이 있었고 그래서 내 마음이 이랬고 내게 이게 필요했으니 이렇게 해줄 수 있겠느냐. 그 차례로 말하는 법을 익히던 처음엔 눈을 뜬 것 같았다. 감정 없이 살았구나, 내 감정을 모르고 살았구나. 그런데 한참 지나 보니 거기에도 갇혀 있었다. 내 감정, 내 욕구. 늘 나 가운데였다. 한번은 에어컨 둘레로 어떻게 둥글게 앉을지를, 누구는 추위를 타고 누구는 안 타니 자리를 어떻게 둘지를 한 시간 동안 의논했다. 나의 진실, 나의 감정, 나의 욕구. 그것이 끝없이 펼쳐지는 방에서 그는 문득 이게 무슨 세상인가 싶었다.

우리가 감정이라 할 때 자꾸 한쪽만 떠올리는 것 아닌가. 고객의 감정은 채워지지 않은 자리의 감정이다. 학교가 다루는 감정도 상처받은 감정이다. 부모가 받은 상처, 아이가 받은 상처. 그러니 우리는 상처받고 비어 있는 데만 감정이라 여기고, 그걸 보듬어 메우면 무언가 찼다고 믿는다. 별로 아프지 않은데 자신을 문제적 인간으로 만들고, 우울하지 않은데 우울증 환자로 만들고, 모든 아이를 금쪽이로 만든다. 없는 문제를 만들어내는 일. 감정을 권위로 앉힌 시대의 가장 익숙한 풍경이다.

비폭력 대화는 간디 자서전을 읽은 한 심리학자가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의 그것은 처음에서 까마득히 멀어졌다. 간디가 한 말은 기분을 맞추라는 게 아니었다. 상대를 적으로 삼지 말라, 그것이었다. 상대를 적으로 여기는 순간 내 안에서 적개심이 인다. 적개심이 일었다는 것은 나마저 적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나는 이미 둘로 쪼개져, 욕망과 분노로 꽉 차 나 자신을 겨눈 사나운 상태다. 그래서 간디는 굶었다. 욕정을 다스리지 못할 때 스스로 끼니를 끊었다. 자기를 벌하는 게 아니라 불에 던질 장작을 거두는 일이었다. 더 탈 땔감을 주지 않는 것. 비폭력 대화가 자아를 메우고 부풀리는 도구로 변질되는 동안, 그 뿌리에 선 간디는 반대쪽을 걷고 있었다. 메우는 길과 비우는 길. 같은 감정을 두고 두 길이 갈라진다.

비우는 길은 감정을 없애는 게 아니라 떼어놓고 보는 일이다. 우리는 감정을 잘게 가르지 못한다. 기뻐, 슬퍼, 좋아. 요새는 미쳤다는 말로 죄다 뭉친다. 화도 여러 가지인데 화 하나로 다 묶어버린다. 누가 한 말이 내 마음과 어긋날 때, 우리는 거기 꽂혀 기분 상하고 괴로워한다. 그런데 그 말을 골짜기에 울리는 메아리로 들으면, 와서 가버리니 한결 가볍다. 메아리는 결국 내 목소리가 울려 돌아온 것이다. 이 골짜기에 메아리가 울리는구나, 하고 흘려보내는 일.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의 다른 이름이다.

마하바라타의 한 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지 순례다. 어디로 가라, 거기서 몸을 씻으라, 제사를 올려라. 그렇게 일러주는 곳이 백 군데가 넘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걸어서 다녔다는 사실이다. 배고픔을 견디며 그저 걷는 그 길이 수행이었다. 그러나 순례를 하면서도 배가 고파 남의 것에 손댈 마음이 인다면 그 걸음은 헛것이다. 끝내 다스릴 것은 내 마음이다. 그렇다면 내 마음이 있는 곳이 곧 순례지다. 떠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몸이 성치 않은 사람, 어머니를 모시느라 손주도 보러 가지 못하는 사람. 그렇다면 꼭 어디로 떠나야 하나. 마음 맑게 머무는 그 자리가 성지다.

AI는 즉답으로 생각할 틈을 거둬간다. 묻기만 하면 답이 떨어진다. 더 무서운 것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업이 잘될 거라고 부풀려도, 그게 거짓이어도, 내 기분을 맞춰줬다는 이유로 받아들인다. 온갖 바람에 활짝 열려 바깥이 보내는 말을 검증 없이 다 받는 사람. 메르켈도, AI를 곧이듣는 이도 그 자리에 함께 선다. 자기 삶의 지평이 없는 자리에.

그러니 다시 처음의 물음 앞에 선다. 감정이 마지막 권위가 된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잃었나. 잃은 것은 감정이 아니라 감정을 떼어놓고 볼 거리였는지도 모른다. 메울 결핍으로만 감정을 대하는 동안, 그것을 잘게 가르고 메아리처럼 흘려보내는 법을 잊었다. 감정을 권위로 떠받드는 대신, 그것을 한 줄씩 적어 내려가며 떼어놓고 보는 데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내가 선 자리가 곧 순례지라면, 다스릴 것은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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