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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1. ‘청년 붓다’, 길의 정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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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5-04-01 09:32 조회2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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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2025-03-07  

[고미숙의 붓다칼럼 숫타니파타] 

1. '청년 붓다', 길의 정복자

 

 

무지·번뇌서 해방... 신조차 도달 못한 '붓다의 길'

'사문'의 종류를 묻는 질문에 붓다는 '길'로 응답해
인간이 가야 할 보편·근원적 길에 대한 가르침 전해
격동의 시대 통과할 새 지도 청년 붓다에게서 찾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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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성도성지인 인도 보드가야의 대탑 앞에 조성돼 있는 불족석. [법보DB]

 

“내 몸은 늙고 노쇠하여, 마치 가죽끈에 묶여 끌려가는 낡은 수레 같구나.”(‘대반열반경’)

여든의 노구를 이끌고 붓다는 열반으로 가는 길 위에 나선다. 라자가하에서 바이샬리를 거쳐 쿠시나가라로 이어지는 머나먼 여정이었다. 쿠시나가라에 도착하기 직전, 붓다는 ‘빠와’라는 곳에서 대장장이 쭌다의 망고 숲에 머무셨다. 쭌다가 물었다.

“세간에 사문은 몇 종류인가요?” 

 

사문이란 집을 떠나 숲으로 간 수행자들을 말한다. 붓다 당시 인도의 숲에는 수많은 사문들로 넘쳐났다. 오래전 아리안족이 도래하면서 인도에는 ‘베다’를 신봉하는 브라만교가 출현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제계급인 바라문들은 점차 타락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반발과 모색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사문들이다. 그 결과, 우파니샤드, 자이나교, 유물론과 회의주의 등 갖가지 유형의 이론과 수행법이 출현하게 되었다. 붓다의 가르침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붓다는 답한다. 

“길을 정복한 자, 길을 가르치는 자/ 길에서 사는 자, 길을 더럽히는 자/ 사문은 이들 네 종류일 뿐, 다섯째는 없다.”(‘숫타니파타’ 이중표 역주)

우리의 예상으론 여러 종파를 나열할 것 같은데, 붓다가 제시한 기준은 뜻밖에도 ‘길’이다. 붓다에 따르면, 인생은 길이다. 길 위에서 ‘길’찾기, 그것이 곧 수행이요 구도 아닌가. 주지하듯, 붓다는 불자가 아니다! 불교라는 특정 종교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걸어가야 할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근원적인 길에 대해 설파했을 뿐이다. 하여, 쭌다는 ‘사문’들의 종류에 대해 물었지만 붓다는 ‘길’로 응답한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최상위의 단계를 먼저 제시했다는 것. 보통의 수사학은 낮은 데서 높은 데로 나아가는 점층법을 쓰지만, 붓다는 그와 달리 점강법을 구사한다. 도달해야 할 비전을 먼저 세워야 지금 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터, 그런 점에서 매우 역동적인 수사학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거꾸로 가장 낮은 데서부터 하나씩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붓다는  ‘길을 정복한 자’에 이르렀지만, 우리는 아직 제대로 길을 나서지도 못한 때문이다. 

그럼 가장 낮은 단계인 ‘길을 더럽힌다’는 건 무슨 뜻일까? “가식으로 착한 일을 하는 척하면서/ 가문을 더럽히는 무모한 위선자”다. 가식과 위선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뜻이다. 거짓말, 이간질, 무책임 등 다 여기에서 비롯한다. 이유는? 길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확신이 없으면 불안과 동요가 일상화된다. 길을 가는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상태인 것. 그런 이중성을 극복하면 비로소 ‘길에서 사는 자’가 된다. “잘 설해진 가르침 가운데서/ 그 길 가운데서 자제하고 집중하”는 이들이 그들이다. 가식과 위선에서 벗어나려면 어설픈 반성과 참회가 아니라 자제와 집중이 필요하다. 안과 밖을 두루 관찰하고, 그 간극을 주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잘 설해진 가르침’, 곧 다르마를 척도로 삼아야 한다. 

그 다음, ‘길을 가르치는 자’는 “최상을 최상으로 아는 사람/ 법을 알려주고 해석하는 사람”이다. ‘최상의 법’을 안다는 건 이제 도달해야 할 지점이 명료해졌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제 누구에게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저기 길이 있다! 그러니 함께 가자!’고. 배우고 가르치고, 가르치면서 또 배우고. 그렇게 길을 가노라면 마침내 길의 정복자가 된다. 

“독화살을 뽑아서 의심이 없고/ 갈망하는 것이 없어 열반을 좋아하는/ 천신을 포함한 세간의 인도자/ 모든 붓다 그를 일러 길의 정복자라 한다.” 

그렇다. 길을 정복하려면 ‘의심과 갈망을 벗어나 열반을 좋아’해야 한다. 의심은 두려움을 낳고, 갈망은 망상을 낳는다. 그래서 의심과 갈망은 독화살이다. 독화살을 뽑았다는 것은 이 무지와 고통의 싸이클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았고, 마침내 그 길의 주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곧 열반이다. 바라문교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종교는 신이라는 초월자를 향해 나아간다. 심판과 구원의 주체 역시 신이다. 하지만 붓다의 길은 무지와 번뇌로부터의 해방이다. 그것은 신조차 도달하지 못한 경지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붓다는 이 길에 도달했고, 이후 45년간 한결같이 그 길 위를 걸었다. 

길 위에서 ‘길’찾기! 모두에게 절실한 시절이다. 코로나19와 전쟁, 기후위기, 그리고 12·3비상계엄에 이르기까지, 바야흐로 격동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이 시대의 카오스를 뚫고 새로운 지도를 그려낼 수 있을까? 붓다에게 길을 묻는 이유다. 왜 하필 ‘숫타니파타’인가? ‘숫타니파타’는 초기경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텍스트로 손꼽힌다. 막 길 위에 나선 청년 붓다의 호흡이 생생하게 담겨있다는 뜻이다. 하여, ‘숫타니파타’에 담긴 청년 붓다의 목소리와 우리 시대를 ‘대각선으로 연결하는’ ‘붓다컬럼’을 시작하고자 한다. 이 무모한 여정에 행운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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