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나이를 먹으면 어른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 과연 ‘진정한 어른’은 존재하는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공동의 가치를 우선시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어른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권위와 탐욕을 앞세운 가짜 어른들이 만연한 현실에서, 고(故) 김민기(1951–2024)의 삶을 돌아보면, ‘진정한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김민기의 고달픈 삶은 서울대 미대 재학 중이던 1971년부터 시작됐다. <아침이슬>이 수록된 첫 앨범이 발매 직후 압수되며 그는 수차례 연행되었다. 묵직한 저음으로 말을 건네는 듯한 그의 노래들은 군사정권 시절 저항과 위로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1975년 금지곡으로 묶인 그의 노래들은 1987년에야 비로소 해제되었다. 본인의 표현대로 ‘엉망진창이 된’ 대학 생활을 뒤로하고 입대한 그는 1977년 제대 후 생계를 위해 부평의 한 봉제 공장에 위장 취업했다. 이미 대학 시절 신정동에서 야학을 열어 어린 직공들을 가르쳤던 그는, 공장에 취업한 뒤 밤샘 작업으로 공부할 수 없는 노동자들을 위해 이른 아침의 조학(朝學)을 열었다. 원단에 적힌 간단한 영어 단어조차 읽지 못해 곤란을 겪는 그들에게 알파벳부터 가르쳤다. 또한 그 무렵, 가난한 노동자 부부들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만든 축가가 바로 〈상록수〉(1977)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이 곡을 ‘친구 송창식이 만든 노래’라고 둘러댔다.
한편 김민기가 공장에서 목격한 가장 처참한 현실은 노동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대우와 가혹한 노조 탄압이었다. 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는 노래굿 〈공장의 불빛〉(1978)을 만들었다. 음반 제작이 금지된 상황에서 그는 송창식의 개인 스튜디오를 빌려 창문을 담요로 막고 밤샘 녹음을 했다. 그렇게 복제된 2,000개의 카세트테이프에는 어린 여공들의 처절한 삶과 생생한 목소리가 담겨 대학가와 노동현장으로 은밀히 퍼져 나갔다. 김민기는 노동자들과 함께 계속 일하고 싶었지만,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1년 만에 현장을 떠나야만 했다. 당시 조학에 참여했던 한 노동자는 세월이 흐른 뒤 그를 떠올리며 ‘세상에 정말 이런 사람도 있구나’라고 회고했다.
그렇게 공장을 떠난 뒤, 1970년대 말 김민기는 전북 익산에서 ‘김경수’라는 가명으로 농사꾼의 삶을 시작했다. 소를 키우고 배추 농사를 지으면서도 청년들에게 탈춤을 지도하고 마당극을 기획하며 민중예술의 뿌리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냉해로 농사를 망친 그는 1981년 경기도 연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연천에서는 돼지를 키우며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유기농법을 실천했고, 농민들과 함께 농기구 개량과 협동조합 운영을 고민했다. 이듬해인 1982년에는 농가의 창고와 마당을 무대로 삼아 마당극 〈희망〉을 올렸다. 제목은 ‘희망’이지만, 그 안에는 붕괴하는 농촌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또한 돌봄에서 소외된 농촌 아이들에게 글과 그림을 가르치며 든든한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연천에서의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돼지 파동에 이은 가격 폭락과 대홍수로 그는 1985년, 정들었던 연천을 떠나야 했다. 김민기의 농촌 경험은 1986년 제기동에 문을 연 ‘한살림 농산물’로 이어졌다. 그는 한살림 초대 사무국장을 맡아 기반을 다지며, 유기농으로 재배한 농산물을 도시 소비자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직거래 창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한살림이 안정 궤도에 오른 1990년, 그는 사무국장직을 내려놓았다. 훗날 그는 한살림의 규모가 커지자,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돈 안 되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