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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조르바와 두목 사이에서 지혜를 찾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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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6-04-09 09:53 조회9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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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바와 두목 사이에서 지혜를 찾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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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 수 (금요 감이당 글쓰기 아카데미)

 

3. 무너진 갱도 후의 벌목 사업, 무너진 케이블 뒤의 새로운 출발

새로운 줄을 만나다

사회로부터 주입된 욕망을 향해 질주하던 과거의 나는 주당이었다. 14년 전에 우울증 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매일 마시던 술을 끊었다. ‘밑 빠진 독에 술 붓기’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기껏해야 1년에 1~2잔도 안 마실 정도로 아주 확 사정없이 끊었더랬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우울증 약도 끊었다. 조르바가 욕망의 끝단까지 밀어붙여 다스리는 방법을 썼다면, 내게는 단주가 준 새로운 감각에 대한 경험이 지속할 수 있는 강력한 동기가 됐다. 술도 약도 끊고 난 이후, 느껴지는 감정들이 결결이 섬세하게 달라졌다. 슬픔이나 기쁨 등은 물론이고, 딱히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다양한 감정들의 미세한 결들이 입체적으로 느껴졌다. 감정을 받아들이던 유리창이 쨍하게 청소된 기분! 이랄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하고 풍성해진 감정들을 느끼는 새로운 감각들이 즐거웠다. 훅~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그 감정들 사이를 거닐며, 마음이 평안해지고 거칠던 사고방식도 조금씩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가끔씩 다루기 어려운 무언가가 마음속에 꿈틀댈 때였다. 혼자서는 어쩔 수 없는 널뛰는 감정들을 마주할 때면 속절없이 가라앉거나, 나대었다. 그럴 때면 나는 나를 감당할 수 없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게도 산투르가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그 때 만난 새로운 취미가 판소리였다.

소리를 내기 위해 호흡에 집중하고, 발음 습관을 교정하고, 시김새와 성량을 좌우하는 신체의 사용을 훈련하면서 특별한 몰입과 집중력을 경험했다. 몸을 사용하면서 느껴지는 섬세한 날 것의 감각들. 반복되는 연습에서 호흡과 신체를 관찰하는 경험을 통해 내면에서 불쑥불쑥 꿈틀대던 그것들은 자유로워졌다. 섬세하게 관찰하며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과, 필요한 소리를 내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근육의 떨림을 감각으로 익히는 과정은, 매일이 환희의 연속이었다. 내가 어디까지 소리를 낼 수 있을지, 내가 호흡을 어디까지 조절하고, 내 몸을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공부하고 연습하는 모든 과정들이 내 자신과 내 몸에 대한 탐구이자 도전이었다. 실력이 늘지 않고 습관이 고쳐지지 않아 실망스러울 때조차도, 우스꽝스런 소리를 내는 헤프닝에 깔깔 거리고 웃을 수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 경험한 가장 충만한 시간이었다. 연습 후에 느끼는 날아갈 듯 홀가분한 기분은 정말이지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감각이다.   

판소리 공부를 시작하고 1년 쯤 지나, 감이당과 인연이 되어 사주명리 공부를 하게 되었다. 기초반과 글쓰기까지 16주를 공부하고 음양오행이 뭔지 좀 알게 되었을 무렵, 판소리 수업에서 <춘향가>의 ‘동벽을 바라보니’ 대목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광한루에서 춘향의 그네 띄는 모습에 반한 이도령이 춘향을 찾아갔고 춘향을 기다리면서 춘향의 방을 구경하는 눈대목이다. 그리고 그 눈대목 바로 뒤에 아직 춘향의 얼굴도 제대로 본 적 없는 이도령이 월매에게 춘향과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청혼을 한다. 이 뜬금없는 전개! 방에 걸린 그림 몇 점과 글 몇 글자에 얼굴도 못 본 여인에게 백년가약을 약속하는 이도령. 그런데 이 눈대목을 배우면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아오던 그 기분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오행의 방위에 따라 춘향가 전체의 내용이 복선으로 담긴 그림들과 춘향의 일부종사 의지를 상징하는 방 중앙 서안 위의 자필! 고전소설다운 독특한 전개지만, 이 대목의 진면목은 오행이 생하는 관계와 오행의 방위에 따른 배속을 모르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됐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판소리의 다른 대목들이 연줄연줄 새롭게 다가왔다. 완창 공부를 하고 있던 <수궁가>에는 ‘약성가’도 ‘토끼 배 가르는 대목’도 ‘사람의 내력’ 대목도… 온통 사주명리, 주역, 동의보감이 담뿍담뿍 녹아들어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나 입체적인 고전공부라니! 그 뒤로 판소리 공부도, 고전 공부도 내게는 다른 의미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지혜로워지고 싶다는 비전을 품게 된 나는 일상이 조금씩 평화로워지고 있다. 그런 내게 두목은 이상적 인간이었지만, 조르바에는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니 두목과 다른 독자들의 조르바를 향한 긍정은 나의 지혜로워지고 싶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새로운 비전 딴지를 거는 느낌이었다. 더 지혜로워지고 싶다는 나의 방향성은 과연 괜찮은 걸까.

“하나의 정열에서 풀려나와 다른 더 고상한 정열의 지배를 받는 것. 그러나 이 역시 예속의 한 형태가 아닌가? 이상을 위하여, 종족을 위하여,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다? 우리의 지향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더 길어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같은 책, 38~39쪽)

크레타 혁명에 동참했던 조르바는 크레타에 도착하면서 수많은 살육이 벌어진 후에 찾아온 자유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반란군이 되어 사기 치고, 훔치고, 죽인 덕분에 크레타에 자유가 찾아온 결과에 의아해 했다. 왜 친절하고 정직한 곳에서는 자유의 씨앗이 꽃을 피우지 못 했는지, 왜 피와 더러운 거름을 필요로 했는지 반문한다. 그런 조르바를 보면서 두목은 ‘정열을 품는 것, 황금 조각을 그러모으는 것, 그러다 갑자기 자신의 정열을 무찌르고 보물을 사방에 날려 버리는’ 과정이 자유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정열을 품게 되고, 또 다시 반복하면서 점점 더 긴 사슬로 갈아타는 과정에서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부자가 되어 ‘경제적 자유’를 이루겠다던 막연했던 욕망의 민낯을 확인하고, 이제는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새로운 욕망의 더 긴 줄로 갈아타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두목이 새로운 정열을 품게 되고,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더 긴 사슬로 갈아타는 과정에서 자유롭다고 착각했던 그 여정을 내가 똑같이 따라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무서운 말은 사업이 망하고 이별을 앞두고 있을 때, 조르바가 두목에게 건넨 말이다.

“머리는 줄을 자르지 않아요. 아니, 아니지! 더 단단히 매달려요. … 그런데 사람이 이 줄을 끊어버리지 않으면 산다는 게 무슨 맛이겠어요?” (같은 책, 428쪽)

힘이 센 머리는 계산을 하고, 가진 걸 몽땅 거는 모험 따위 하지 않는다. 예비로 무언가를 남겨놓고 어딘가에 예속되는 줄도 모를 사슬에 더 단단히 매달린다. 자유로워졌다는 두목의 말에 조르바는 그 긴 줄조차 끊어버려야 자유로워진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나는 돈을 쫓던 욕망에서 벗어나, 지혜로워지고 싶다는 새로운 사슬로 갈아탄 것은 아닐까. 자유라고 생각했던 나의 행적들이 사회로부터 주입된 욕망에 끄달린 모습이었던 걸 뒤늦게 깨달았는데, 더 지혜로워지겠다는 방향성이 나를 또 다른 줄로 옭아매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새로이 갈아타 매달리게 된 정열이 지혜의 추구라면, 단지 조금 더 길어진 줄 끝에 서있을 뿐인 내가 좀 더 평화로워졌다고 위안하고 있는 모양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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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자가 되어 ‘경제적 자유’를 이루겠다던 막연했던 욕망의 민낯을 확인하고, 이제는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새로운 욕망의 더 긴 줄로 갈아타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두목이 새로운 정열을 품게 되고,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더 긴 사슬로 갈아타는 과정에서 자유롭다고 착각했던 그 여정을 내가 똑같이 따라 밟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 세계 사이에 서다

그저 글자로 읽을 때는 별 감흥 없던 판소리의 사설도, 온 몸으로 연습해 시김새까지 몸에 붙여 체득이 되면, 그 전과는 느낌이 영 달라진다. 게다가 점점 단련되어가는 신체가 온 몸으로 감각하는 고전의 지혜가 듬뿍 담긴 입체적인 텍스트와의 만남이 주는 공감각적 감흥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이 있다. 음악의 형태로 온 몸에 퍼부어지는 지혜의 세례! 소리로 공명하는 지혜의 울림이 전신의 세포 속까지 전달되는 느낌이다. 그 덕에 판소리 공부 이후, 판소리 사설에서 문득문득 만나게 되는 고전들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래서 내 공부는 여전히 Ongoing이다. 판소리 공부를 하다 보면 고전의 지혜가 새록새록 다가오고, 그래서 또 고전을 읽다보면 판소리의 예술성에 담긴 감동이 머릿속을 뒤 흔든다. 수백 수천 년의 풍파와 검증을 겪고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고전의 세계는 판소리와 함께 내 지혜를 향한 열망을 떠받치고 가는 두 개의 바퀴가 되어주고 있다.

부자가 되겠다는 목적이 있던 시절, 나는 재테크 정보나 경제 지식을 다루는 책들을 주로 보았다. ‘입이랑 발로 먹고사는 직업’답게 우리는 새로운 정보를 익히고 전달하는 능력이 밥벌이에서 제일 중요했다. 전날 발표된 주요 정책을 조간신문을 탐독해 완전히 숙지하고 출근해야, 아침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응대할 수 있었다. 밥벌이 현장의 공부는 매일 새로 업데이트되는 새로운 정보를 끝없이 습득해야 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소모적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다. 그러나 고전을 읽는 공부는 달랐다. 오늘 공부하고 그 위에 또 내일 새로운 지식으로 덮어씌울 필요가 없었다. 하루 사이 내 안에서 더 무르익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주석들을 읽으면서는 글자를 매개로 맺어지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인연에 감동한다. 수백 년 전의 사람과 나누는 대화라니… 그리고 온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판소리와 독서, 글쓰기 공부에 시간이 더해지면 10년 후의 나는 좀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숙성되어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커진다.

판소리는 공연을 전제로 하는 대중예술로 발전하여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창자가 전달하는 이야기와 노래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장르의 특성이 문자로만 전달되는 소설과 시공간의 제약을 가지는 공연의 단점을 극복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고전공부와 만나게 된 판소리 공부. 어쩌다 보니 나는 대중예술로 시작된 판소리와 고전의 지혜를 배워나가는 이 절묘한 사이에 놓여 공부의 길을 내딛게 되었다. 언젠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판소리 리라이팅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글쓰기 공부를 시작했다. 조르바에게는 산투르가 있었고, 내게는 판소리가 나만의 산투르가 되어주고 있다.

“세상만사에는 숨은 뜻이 있다. 사람, 동물, 나무, 별, 그 모든 것은 상형 문자다. 그 상형 문자를 해독하며 의미를 짐작하려 드는 자에게는 비탄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도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것들을 진짜 사람이며 동물이며 나무며 별이라고 여길 뿐이다.” (같은 책, 68쪽)

두목은 친구와 방문했던 베를린 미술관의 그림을 떠올리며, 친구와 나눴던 대화를 추억했다. 인간은 이 우주에서 지극히 작은 존재일 뿐이고, 우주의 진리를 이해하고자 할 때 한없이 작고 어리석은 존재임을 느낀다. 인간은 결코 우주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에게는 눈에 보이는 모습, 알량한 과학으로 밝혀진 지식 등이 전부라고 치부하는 어리석음이 있다. 인간 통찰의 근본은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작고 무지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경험한 다양한 우연과 선택들 사이에서 알 수 없는 우주의 신비에 의해 나는 지금 여기 사이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유롭게 온 몸으로 삶을 헤치며 살아낸 조르바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동받고, 만물에 깃든 영혼들과 소통하기를 원했다. 그가 자유의 끝에서 얻어낸 통찰이었다.

자유를 추구하는 노인과 이상을 추구하는 청년

두목과 조르바. 이질적인 두 사람의 조합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특징이다. 삶에 맞서 정면 승부를 펼치듯 살아온 조르바는 두목을 존경으로 대한다. 그에 반해, 패기 넘쳐야 할 것 같은 청년 두목은 오히려 이상과 신념을 이루기 위해 고민한다.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던 두목은 이성적이고 철학적이며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삶에 높은 이상을 구현하려는 시도를 해나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조르바는 끝없이 자유를 추구하며 인간이 지닌 야수성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도대체 처음에는 수긍되지 않던 캐릭터 설정이기도 했다. 언뜻 생각해보면 지혜로운 노년과 패기 넘치는 청년의 조합이 더 자연스러워 보일 법도 한데, 카잔차키스의 설정은 달랐다. 노년에도 수그러들지 않는 자유를 향한 의지를 지닌 노인과 청년임에도 절제하고 이상을 추구하는 두목이 대조적이었다.

“우리의 낡은 세계는 구체적이고 견고하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실재하는 세계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을 빚는 재료인 빛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광풍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휩쓸린 한 조각 구름이다.” (같은 책, 92~93쪽)

두 사람을 통해 청년의 자유로움과 노인의 이성이라는 틀에 박힌 이미지를 깨는 작가는 새로운 인간의 길을 보여준다. 세속(?)과 공부 사이에서 내 중심을 잡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 세계를 살아내야 할 나는 양자 사이에서 균형잡기를 고민 중이다. 조르바에 비해 아직 젊은 나는 더 살아보고, 경험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똥밭에 굴러야 할 것 같은 현실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는 두목처럼 가슴에 품은 이상으로 나침반 삼아야 할 것이다. 내가 자리한 다양한 두 세계 사이의 길에서 아직 살아보지 못한 미래는 막연하기만 하다. 구체적이고 견고한 지면에서 발을 떼는 것! 인간의 영성은 그 빛으로 만든 미래를 현실에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데에 있잖나. 조르바는 나에게 얼마든지 그렇게 용기를 내보아도 된다고 추동한다. 조르바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과 만나 서로의 자유를 향해 나아갔던 스텝처럼, 내게도 타자와 만나고 우주와 만나 더 큰 자유로 나아가라고 등을 떠민다. 평화로운 세상, 사랑하는 세상, 더 이상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 세상! 현실의 벽이 견고하고 높다고 해도, 그 벽 너머를 꿈꾸며 사는 것이 인간이라고, 두목의 시선을 통해 조르바의 야수성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임을, 두목이라는 필터를 통해 인간이 여전히 이상을 지향해 살아야 함을 이야기한다. 결국 인간은 야수성과 이성,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영성이란 결국 그 사이에서 끝없이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시도하고 실패하면서 걸어가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갱도가 무너진 후 벌목 사업을 시작하고, 또 케이블이 무너진 후에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던 두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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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영성은 그 빛으로 만든 미래를 현실에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데에 있잖나. 조르바는 나에게 얼마든지 그렇게 용기를 내보아도 된다고 추동한다. 조르바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과 만나 서로의 자유를 향해 나아갔던 스텝처럼, 내게도 타자와 만나고 우주와 만나 더 큰 자유로 나아가라고 등을 떠민다. 평화로운 세상, 사랑하는 세상, 더 이상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는 세상! 현실의 벽이 견고하고 높다고 해도, 그 벽 너머를 꿈꾸며 사는 것이 인간이라고, 두목의 시선을 통해 조르바의 야수성이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임을, 두목이라는 필터를 통해 인간이 여전히 이상을 지향해 살아야 함을 이야기한다.

4. 두목처럼 조르바처럼

최근에 온라인 타로 상담 알바를 시작했다. 아직 상담횟수가 많지 않지만 상담 사례들을 접하며 난 여전히 사이에 서 있음을 절감한다. 욕망이 충돌하는 사연들과 공부 사이에서 나는 어떻게 지혜를 나눌 수 있을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중이다. 겨우 10분 혹은 길어야 30분 남짓한 사이에 내가 가진 작은 지혜나마 나누어주기 힘들다는 한계를 체감하고 있지만, 시간이 흐르고 경 륜이 쌓이면 제법 쓸 만한 지혜를 나누는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을까 희망을 품고 있다. 나도 좀 더 공부와 삶의 내공이 쌓이면 좀 더 쓸모 있는 지혜의 전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다양한 충동들에 휩쓸리며 좌충우돌하면서 지냈던 청년시절과 중년에 이르러 지혜를 쫓아 새로운 여정을 따라가는 나를 돌아보며 균형잡힌 인간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해 보게 된다.

“나는 당신의 소위 그 <신비>를 살아 버리느라고 쓸 시간을 못 냈지요. 때로는 전쟁, 때로는 계집, 때로는 술, 때로는 산투르를 살아 버렸어요. 그러니 내게 펜대 운전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러니 이런 일들이 펜대 운전사들에게 떨어진 거지요.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 (같은 책, 313~314쪽)

책을 써보라는 두목의 제안에 조르바가 한 대답이다. 익살스러우면서도 정곡을 찌른다. 어느 쪽으로든 치우치며 사는 것이 삶의 과정이다. 신비를 사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신비를 살 줄 모른다. 온 몸으로 삶과 맞부딪히며 사는 인생과 이상을 추구하는 비전을 품고 사는 인생. 그러나 인간은 그 양쪽 사이에서 선택하거나 혹은 자신만의 길을 새로이 열어가는 존재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살아가듯, 인간은 태생부터가 사이의 존재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삶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나는 내가 사는 현실과 감이당 사이에서, 판소리와 고전 사이의 공부에서, 내 비전의 여정과 삶 속의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새로이 길을 찾아 나가려 한다. 조르바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두목에 매력을 느꼈었지만 조르바를 향한 혐오를 조금쯤 내려놓는다면 사이에서 길을 열어나가는 나의 포지션은 더 넓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온 몸으로 땅을 쓰다듬으며 사는 뱀처럼 삶에 대한 열정을 가졌던 조르바와 이상의 높은 경지에 다다르기 원했던 두목 사이에서 나는 이제 두 사람 모두가 인간의 양면적 모습임을 인정해야 한다. 조르바처럼 살 수만도 없고, 두목처럼 살 수만도 없다는 걸 이제 안다. 둘이지만 결국엔 인간의 양면성을 대표하는 캐릭터들. 그 둘은 둘이되 결코 둘이 아니었다. 만나서 크레타로 향하고, 돌연 둘의 인연이 다하는 날 미련 없이 헤어졌던 것처럼 그 둘은 각자이면서 또 하나인 인간의 전형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헤어져 각자의 인생길을 선택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이 그 둘 사이의 어정쩡한 정반합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인간에게는 이상과 현실이라는 두 세계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갈림길들이 놓여있다. 때로는 조르바처럼 때로는 두목처럼 그리고 가끔은 그 사이 어디쯤에서 살아내야 하는 삶. 지금 당장은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삶의 지혜를 전달하기.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지혜를 펼치는 통로가 될 수 있게 판소리 리라이팅 쓰기. 무대에서 관객에게 더 친근하게 판소리와 고전의 유머와 지혜를 전달하기. 삶과 공부 사이에서 새로이 찾아 나서고 싶은 길들을 열어가려고 한다. 아직 태어나지 못한 미래를 향해 마음에 비전을 심었다. 나는 여전히 현실과 이상이라는 두 세계 사이에서 살아가야 함을 알게 되었고, 이 사이에 새로운 길을 계속 열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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