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구에서는 ‘견악인 무구(見惡人 无咎)’라한다. 즉 나만 옳았다는 고정된 생각을 가지지 말고 어긋남의 해결을 위해 초구처럼 마주하여 적극적 자세를 가지고 문제를 풀어 나가라하고 구이효에서도 마찬가지로 후미진 골목조차라도 만나야 허물이 없다고 한다. 또한 음이지만 강한 자리에 있는 삼효의 ‘기인천차의 무초유종(其人天且劓 无初有終)’이 중요한데 화택규에서의 문제해결 메시지를 가장 강력히 알려 주었다. 내가 유연해지기 위해서는 천차의(天且劓)해야했다. 체면이나 형식적인 자리를 지워야 하며, 나의 자의식이 살아있는 한, 상대가 달라지는 것만 기대하는 것은 문제가 풀리지 않음을 말해준 것이다. 일단 피하고 보는 나의 자세에 문제가 있었음에 일침을 가한다. 그래야 규의 상황이 끝나 무초유종(无初有終)이 되는 것이었는데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다른 가족들도 공감해준 인식을 얹어서, 그녀에 대해 ‘매우 강한 여자다’라는 선입견으로, 그녀는 나에게 ‘맏며느리는 갑’이다 라는 핑계로 애초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 버린 것이었다.
궐종서부(厥宗筮膚)하여 완전히 믿고 따라 주면 나아가는데 아무런 허물이 없었겠지만 나는 그녀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부족했다. 그녀가 맏며느리가 갑이란 생각을 하는 어긋남의 상황일지라도 상구효가 구삼에게 가서 지속적으로 마주했듯이 내가 손아래 동서에게 그리했어야 ‘종래 왕우우 칙길(往遇雨 則吉)’이 될수 있지 않았을까? 그동안 ‘안보며 사는 게 최선이다’라고 하는 핑계를 위안 삼아 어긋난 상황을 피하면서 덮어버리고 살아 온 내 자의식과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부서를 바꾸거나, 회사를 옮기면 해결되는 사회생활과는 달리, 가족관계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대소사를 피할 수 없었고, 최소한의 형식적인 만남조차에도 서로 불편함을 참아왔다.
해결되지 않은 채 감춰둔 어긋남이 이토록 오래 지속된 것에 대해 글을 써 내려가면서 나는 맨 얼굴의 화끈거림을 부끄러움으로 만났는데,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떤 자세로 그녀를 마주 해야 하는가? 내가 손윗사람인데, 하는 체면과 가족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문제는 풀리지 않고 반복될 것이다. 우선 단단한 껍질 속에 있는 나의 자의식과 익숙한 편견과 결별을 해야 하는 것이다. 화택규의 삼효처럼 날마다 자기 얼굴 없애는 일이다. 집안 대소사에 나 몰라라 하는 동서의 몰염치에 나만 희생한다는 단단한 피해의식과 스스로 만든 상식의 프레임 속에 편견의 늪을 허우적거리며, 그녀의 돌발적 행동을 이해하기보다는 가족이라는 집단의식만을 고집하며 너그럽지 못했던 것이었다.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서 만나고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해결 했어야 했지만, 명절이 다가오면 동서 만나는 일로 가슴이 울렁거리며 속만 끓이다가 너무 멀리까지 온 것이다. 이런 냉랭한 둘 사이의 분위기를 나 몰라라 하시며 방관하시는 시누이나 시어머니가 도와주기를 바란 적도 있었지만 원망스럽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아닌 내가 믿음을 갖고 적극적으로 풀어야만 했던 문제였음을 규 괘를 배우면서 커다란 후회로 남았다.
모든 과정이 소사(小事), 즉 눈에 보이지 않으나 수없이 많은 과정과 작용을 통한 변화의 중요성과 어떤 것이 들어와도 안에서 부드럽게 좋게 만들어 내는 그 의미를 나는 놓친 것이다. 각자의 소사(小事)가 중요하고 내면의 소사(小事)가 중요한데 나는 집안의 대소사에만 비중을 놓고 그녀가 소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아예 참여하지 않는 부분에 서운해 하며 속으로 화만 끓이다가, 어긋남을 회피하면서 그녀와 나 사이의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