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에세이] 어긋남을 당당히 마주하기 > MVQ글소식

MVQ글소식

홈 > 커뮤니티 > MVQ글소식

[감성에세이] 어긋남을 당당히 마주하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6-01-22 09:40 조회93회 댓글0건

본문

어긋남을 당당히 마주하기

1.jpg


최 승 천 (토요 감이당 주역스쿨)

직장에서는 물론이고 뜻을 함께하여 모인 성당 봉사활동이나 독서 모임을 하면서도 호흡이 서로 다른 이들과 만난 경험을 생각해보면 나는 평생 사람을 만나는 일이 참 어려웠다. 공동체 속에서 내 자의식과 어긋남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말도 섞지 않고 가능한 한 마주치지 않으려 함께하는 시간을 피해 왔다. 솔직히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으려는 배려보다는 어긋남으로 인해 나 자신이 상처받지 않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러나 이런 회피의 결과는 빗나간 감정들을 고스란히 가라앉아 오랫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으며 어긋남의 상황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여러 차례 경험을 통해 나의 소극적 회피 자세는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고쳐지지 않는 나의 고착화 된 자기방어 기제였다.

가족관계의 어긋남도 다를 바 없었다. 아니 가족이기에 더욱 꼬여서 풀기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게 되는데 바로 삼십 년 넘게 평행선으로 달려온 하나밖에 없는 손아래 동서와의 관계이다. 어긋남을 풀지 못하고 늘 피하여 온 결과, 그녀는 누구보다도 내 마음의 힘든 정서적 장애가 되었으며 이를 입증하듯 ‘화택규(火澤睽)’를 접하며 나에게 제일 먼저 떠오른 대상 또한 그녀였다. 그녀와 나는 처음부터 어긋난 만남이었다. 그 이유는 내 친한 친구를 시동생의 결혼상대로 소개한 것이 발단이 된 것이다. 시동생은 내 친구와 지금의 동서,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동서를 선택했고, 농담으로 털어놓으신 시어머니를 통해 드러난 이 사실이 둘 사이를 묘하게 불편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굳이 또 이유를 찾아보자면 그녀는 교회를 매우 열심히 다녔고, 나는 미지근하게나마 성당을 다녔으며, 평생 직장 생활을 한 나와 전업주부로서 살아온 그녀의 생활 패턴도 서로에게 보이지 않는 벽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나에게 한집에 살아가며 은근히 챙겨주시는 시부모의 애정이 어린 관심을 부러워했고, 나는 단촐하게 사는 그녀의 자유로운 삶을 한없이 부러워했다.

그녀를 힘들게 한 결정적인 부분은 나의 친정과 시댁의 관계였다. 평소 양가가 가까운 인연으로 사돈이 맺어진지라 네 분이 해외여행을 같이 하시며 허물없이 친분을 나누시던 이 부분에 누구보다도 소외감을 많이 느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비슷한 점이라고는 밖으로 감정을 툴툴 털어내지 못하는 둘의 성격이었다. 나는 웃음기 없는 그녀의 차가운 냉소적인 태도가 늘 신경이 쓰였다. 마음을 꽁꽁 싸맨 듯 일정한 선을 긋고 다가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형제로서 집안 대소사에 최소한의 역할을 하지 않는 그녀에게 매번 서운했지만 나의 불만을 그녀에게 정면으로 드러내지 못했으며, 그녀의 마음속에도 나에 대한 불편함이 앙금으로 쌓여 있는 듯 늘 그녀의 표정에서 ‘어쨌든 맏며느리는 갑’이라는 것이 읽혀졌다.      

화택규는 자리가 어긋나 있는 괘이다. 그러나 처음(初九)부터 어긋난 것은 아니며 뜻이 같은 사람끼리 모였지만 그 과정에서 어긋난 것이다. 지난 시절의 나와 동서처럼 말이다. 주역에서는 어긋남의 화택규를 어떻게 풀어 나가는지, 평생 응어리진 마음에 어떤 가르침을 줄 것인지, 그리고 나는 주역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 어떤 마음가짐으로 달라져야 할지 그 어느 괘보다 매달려 보는 자세로 각 효사를 풀어 보았다. 괘사부터 상구효까지 나의 입장과 그녀의 입장을 대비 시켜보았으며, 비록 지난 일이지만 어긋남의 때와 상황에 맞춰 해법을 찾아보려 했다.

2.png

화택규는 자리가 어긋나 있는 괘이다. 그러나 처음(초구)부터 어긋난 것은 아니며 뜻이 같은 사람끼리 모였지만 그 과정에서 어긋난 것이다.

초구에서는 ‘견악인 무구(見惡人 无咎)’라한다. 즉 나만 옳았다는 고정된 생각을 가지지 말고 어긋남의 해결을 위해 초구처럼 마주하여 적극적 자세를 가지고 문제를 풀어 나가라하고 구이효에서도 마찬가지로 후미진 골목조차라도 만나야 허물이 없다고 한다. 또한 음이지만 강한 자리에 있는 삼효의 ‘기인천차의 무초유종(其人天且劓 无初有終)’이 중요한데 화택규에서의 문제해결 메시지를 가장 강력히 알려 주었다. 내가 유연해지기 위해서는 천차의(天且劓)해야했다. 체면이나 형식적인 자리를 지워야 하며, 나의 자의식이 살아있는 한, 상대가 달라지는 것만 기대하는 것은 문제가 풀리지 않음을 말해준 것이다. 일단 피하고 보는 나의 자세에 문제가 있었음에 일침을 가한다. 그래야 규의 상황이 끝나 무초유종(无初有終)이 되는 것이었는데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다른 가족들도 공감해준 인식을 얹어서, 그녀에 대해 ‘매우 강한 여자다’라는 선입견으로, 그녀는 나에게 ‘맏며느리는 갑’이다 라는 핑계로 애초부터 일정 거리를 두고 멈춰 버린 것이었다.

궐종서부(厥宗筮膚)하여 완전히 믿고 따라 주면 나아가는데 아무런 허물이 없었겠지만 나는 그녀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부족했다. 그녀가 맏며느리가 갑이란 생각을 하는 어긋남의 상황일지라도 상구효가 구삼에게 가서 지속적으로 마주했듯이 내가 손아래 동서에게 그리했어야 ‘종래 왕우우 칙길(往遇雨 則吉)’이 될수 있지 않았을까? 그동안 ‘안보며 사는 게 최선이다’라고 하는 핑계를 위안 삼아 어긋난 상황을 피하면서 덮어버리고 살아 온 내 자의식과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부서를 바꾸거나, 회사를 옮기면 해결되는 사회생활과는 달리, 가족관계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대소사를 피할 수 없었고, 최소한의 형식적인 만남조차에도 서로 불편함을 참아왔다.

해결되지 않은 채 감춰둔 어긋남이 이토록 오래 지속된 것에 대해 글을 써 내려가면서 나는 맨 얼굴의 화끈거림을 부끄러움으로 만났는데,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떤 자세로 그녀를 마주 해야 하는가? 내가 손윗사람인데, 하는 체면과 가족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문제는 풀리지 않고 반복될 것이다. 우선 단단한 껍질 속에 있는 나의 자의식과 익숙한 편견과 결별을 해야 하는 것이다. 화택규의 삼효처럼 날마다 자기 얼굴 없애는 일이다. 집안 대소사에 나 몰라라 하는 동서의 몰염치에 나만 희생한다는 단단한 피해의식과 스스로 만든 상식의 프레임 속에 편견의 늪을 허우적거리며, 그녀의 돌발적 행동을 이해하기보다는 가족이라는 집단의식만을 고집하며 너그럽지 못했던 것이었다.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서 만나고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해결 했어야 했지만, 명절이 다가오면 동서 만나는 일로 가슴이 울렁거리며 속만 끓이다가 너무 멀리까지 온 것이다. 이런 냉랭한 둘 사이의 분위기를 나 몰라라 하시며 방관하시는 시누이나 시어머니가 도와주기를 바란 적도 있었지만 원망스럽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아닌 내가 믿음을 갖고 적극적으로 풀어야만 했던 문제였음을 규 괘를 배우면서 커다란 후회로 남았다.

모든 과정이 소사(小事), 즉 눈에 보이지 않으나 수없이 많은 과정과 작용을 통한 변화의 중요성과 어떤 것이 들어와도 안에서 부드럽게 좋게 만들어 내는 그 의미를 나는 놓친 것이다. 각자의 소사(小事)가 중요하고 내면의 소사(小事)가 중요한데 나는 집안의 대소사에만 비중을 놓고 그녀가 소극적으로 참여하거나 아예 참여하지 않는 부분에 서운해 하며 속으로 화만 끓이다가, 어긋남을 회피하면서 그녀와 나 사이의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만 것이다.

3.jpg


“규괘의 원리는 어지러짐이어서 밝음에는 적합지 않은 것 같지만 이를 잘 활용하면 하늘과 땅의 지어냄, 사물과 물들의 실정과 이치가 모두 다름을 바탕으로 하여 같음을 얻을 수 있고, 때에 맞추어 활용을 잘하면 또한 거대하리니”(『주역내전』, 929쪽)라는 화택규의 가르침은 맏며느리 노릇을 더 멋지게 했을 텐데 라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러나 이제라도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은 퍽 다행스럽다. 나는 앞으로 내 주관적인 동서에 대한 푸념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이는 나에게도 충분한 문제가 있었음에 대한 고백이며, 문제의 핵심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전하는 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내 주변의 많은 ‘어긋난 동서’들과 더 이상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완전한 믿음을 갖고 당당히 마주하는 용기를 낼 것이다. 그리고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 그래서 자기의 문제를 내밀하게 살펴보아야 함을 주역 공부에서 배우 게 된 삶의 변화로 삼을 것이다. 주역은 지난 삶의 곳곳에서 나를 제대로 일깨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